"소소한 실수였죠. 사과하고 즉시 가져다 주었는데요."

"그런 작은 실수가 신뢰를 해치지. 좋은 책을 만든다는 둥 뜬구름 잡는 소리 하기 전에 당장 눈앞에 있는 작업에 집중하는 게 어때." - P-1

컬러 견본을 엉뚱하게 전달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해도, 마침 오다의 불신이 깊어졌을 때 월드인쇄 영업자가 자꾸 찾아오자 거래처를 바꾸게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 P-1

"제가 생각하는 사양과 비용 등 여러 가지에서 합의가 안 돼서요. 뭐, 간단히 말하면 제가 짜증이 나서 ‘관둡시다’라고 끝내 버렸죠."

"그래서 저희 회사에 문의하셨군요. 감사합니다." - P-1

"실은요, 제가 소설은 이번에 처음 맡아 봅니다." - P-1

"월드는 출판인쇄 점유율을 석권할 작정으로 움직이고 있어. 싸우는 방식부터가 차원이 달라. 우리는 기존 고객을 소중히 여기고 신규 거래처 획득도 지금의 고객을 바탕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봐."

"자네는 천생 미스터 꿍이군. 귀찮은 일이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최대한 기분 좋게 하는 게 낫지."

"컬러가 생각대로 나온 날은 일을 잘했다 싶고 실패한 날은 기분도 찝찝하고 주눅이 들지. 기술자의 하루하루는 그 둘 가운데 하나야."

주점 미닫이문을 열고 남녀 네 명이 들어왔다. 자리는 거의 만석. 술이 제법 들어갔는지 자리마다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해방감 가득한 기분 좋은 소란이다.

‘에치고의 호랑이인 아버지는 까마득히 먼 존재다. 하지만 새끼 호랑이는 강자를 따르며 살아남았다.’

양부 우에스기 겐신의 뒤를 이어 도요토미-도쿠가와 시대를 살아 간 가게카쓰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프롤로그의 한 문장이다. 이 작품을 늘 곁에 두는 아마쿠사는 영화계의 호랑이인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발버둥치고 있을 것이다.

이번 『나가시노의 바람』도 부친 다케다 신겐에게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기치를 물려받은 다케다 가쓰요리의 고뇌를 중신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시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다네가시마
포르투갈산 철포가 최초로 전해진 규슈 가고시마 현에 있는 섬으로, 초석, 유황, 숯 조달에 유리하여 전통 화약 생산이 활발했다

"일을 그렇게 너무 깔끔하게만 진행하려고 하지 마. 쩔쩔매도 좋으니까 선배나 상사에게 울며불며 매달려도 돼. 책을 기한 내에 완성시키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그럼 노즈에 씨는 무엇을 위해 일하지?"
무엇을 위해. 요즘 스스로 누차 물었지만 답을 찾지 못한 물음이다. 아니, 답을 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돈이지."

판권은 책의 엔딩 크레딧이다. 제작에 관여한 모든 이의 이름을 실을 수는 없지만 ‘도요즈미인쇄주식회사’ 너머에는 노즈에나 지로 씨, 후쿠하라, 우라모토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종이 구입처를 알아봐 준 게이단샤 업무부의 요네무라 신코나 기후의 이나바야마지업 사람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뇨, 오쿠다이라 씨는 원래 저런 편집자인지도 모릅니다. 작가나 작품을 위해서 때로는 오만해지기도 하고 싹싹하게 굴기도 하죠. 보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요."

"인쇄 회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보다 나은 책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좋은 책이란 뭘까를 고민해 보면 답은 하나가 아니죠. 꼭 디자인이 좋다거나 만듦새가 튼튼하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가르쳐 주는 것 같아요."

‘인쇄기는 같이 일하는 동료야. 귀하게 대하면 보답해 주지.’

막 입사했을 때 들었던 말인데, 규 씨는 심각한 병으로 쓰러졌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았구나.

"같이 일하는 동료잖아. 인쇄공은 인쇄기와 함께 일하는 거니까."

"아니, 더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 인쇄 회사는 매일 방대한 종이를 사용하며 책을 찍습니다. 독자 손에 전해질 때까지 여러 회사가 중간에 마진을 빼 갑니다. 이참에 솔직히 말하지만……."
후리하타는 일동을 둘러보더니 호흡을 한 번 고르고 나서 말했다.
"종이책은 기득권 덩어리입니다."

역전 헌책방 무사시야서점 주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책과 작별하는 것은 아쉽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후쿠하라는 사람이 싫었다. 하지만 책에 관련된 사람들은 좋아할 수 있었다.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리더 시라오카,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 주며 어려운 업무를 맡겨 주는 우라모토, 소중한 장서를 구입해 주는 무사시야서점의 주인 아저씨. 책에 관련된 사람들은 그녀를 온전한 한 인간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것은 아마 자신이 책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후쿠하라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타인과 연결해 주었다.

"저이가 월드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알게 되었고 도요즈미로 이적했기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벚꽃놀이를 하고 있잖아요. 인연의 끈이 여러 가닥 이어져서 지금 여기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도요즈미인쇄, 좋은 회사니까요."

"월드인쇄는 워낙 다양한 것들을 인쇄해서 장차 어떤 라인에 배치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도요즈미인쇄에 남으면 나는 계속 책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 도움을 주는 것을 만들고 싶다는 동경. 후리하타가 풍기는 헝그리 정신의 근원은 거기에 있었다.

"시대가 변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어. 전용 단말기가 좀 더 보급된다면, 판로가 좀 더 확대된다면, 좀 더 많은 작품이 디지털화된다면…… 하면서."

상하권 총 30만 부의 본문을 인쇄하는 방대한 작업은 기계만으로 혹은 사람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양자가 한 몸으로 움직여야 가능한 작업이다.

책은 언젠가 사라져 버릴 것인가.

"도요즈미인쇄라는 글자 너머에는 전체 직원의 이름이 새겨겨 있는 거야. 판권은 책의 엔딩 크레딧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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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다."

그렇게 말하고 유카리는 가스레인지에 오뎅을 데웠다. 유카리는 곤약을 몹시 좋아해서 한여름에도 오뎅을 먹는다. - P-1

"농담이 아니라 확실히 일하지 못하면 월드 쪽에 다 빼앗겨요."

오쿠다이라가 소리 죽여 말했다. 마냥 협박은 아닐 것이다. 사실 지난달에도 단행본 일감을 월드인쇄에 빼앗겼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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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태도는 보기에 따라 어리석어 보이지. 하지만 철저한 태도를 버리면 우리 기술자는 기술자가 아니게 돼. 밥 먹기 위해서만 일하는 거라면 철저한 태도는 거추장스러운 것인지도 모르지." - P-1

"하지만 이렇게 작업을 거듭하는 정성과 소망이 표지를 통해 이 책을 집어 드는 사람의 직감이나 잠재의식에 어필할 거라고 생각해." - P-1

"미스터 꿍,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이럴 때는 의외로 맨 처음 감이 맞을 때가 있어."
지로 씨의 연륜에서 나온 말은 적중했다. - P-1

총 10번의 시행착오 끝에 뜻밖에도 맨 처음의 인쇄 설정이 채택되었다. 직원들 표정에 안도와 함께 허탈한 기색이 배어나온다. 하지만 나머지 9번이 있었기 때문에 맨 처음 설정이 좋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는지 모른다. - P-1

"고칠지 말지를 포함해서 모든 결정권은 고객에게 있어. 출판사가 저자와 상의해서 결정할 일이야. 우리는 성심성의껏 사죄하고 그 결정에 따르면 돼."

"만약 우라모토 씨가 저자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양보할 수 없는 간행일과 오자 한 글자. 어느 쪽이 중요할까."

위태로운 통화에 가슴이 아프게 오그라드는 가운데 상대방 처지에 선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고 실감했다. 자칫 책임을 회피하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그래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선택지를 전부 고객에게 제시해야 한다.

"이번 일로 실감했겠지. 인쇄 회사는 모노즈쿠리가 아냐. 실수를 저질러도 고객이 그냥 내라고 하면 따라야 하는 거야. 그런 일이야."

책의 탄생은 저자와 편집자, 여러 방면에 걸친 수많은 관계자에게 두루 축복받는 일이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나오는 책은 애초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실수 없이 작업 하나하나를 잘 마쳐야 한다.

장마를 맞은 밤하늘에서 빗방울이 간간히 듣기 시작했다. 우라모토 마나부는 유라쿠초 선 고코쿠지 역으로 뛰어들었다. 우산을 펴지 않아서 조금 득을 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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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레야레
‘야레야레’는 실망할 때 말하는 ‘아이고 맙소사’에 상당하는 말 - P-1

편집자는 예산이 허락하는 선에서 책의 사양을 궁리한다. 종이 재질, 표지 그림, 장정 등 작품에 대한 기대치는 책의 사양으로도 표현된다. - P-1

금박, 엠보싱, UV(자외선을 이용한 순간건조) 등의 특수 가공을 하거나 반투명지, 한지, 가죽 등 특별한 소재를 사용하는 등 기대치가 높은 작품은 자연히 공을 들이게 마련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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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질문하러 일어선 여학생이 마이크를 양손으로 꼭 쥐고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 P-1

"꿈은, 내가 맡은 일을 하루하루 실수 없이 마치는 겁니다."

새 슈트를 차려입은 학생들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 P-1

이제 곧 사회에 진출할 취업준비생들에게는 너무 냉정한 대답이다. 꿈이나 희망 같은 건 없다는 말인가.

"그런 평상시 마음가짐 말고 장래희망 같은 걸 말씀해 주셨으면……." - P-1

"우리가 하는 일은 인쇄입니다. 주문받은 사양을 충실히 실현하는 거죠.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굳이 말하자면 방금 대답한 대로 하루하루 맡은 일을 실수 없이 마치는 겁니다." - P-1

"제 꿈은…… 인쇄가 모노즈쿠리(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물건을 만드는 것, 혹은 그 장인)로 인정받는 날을 맞이하는 겁니다." - P-1

"혼을 담아 쓴 이야기를 책이라는 물성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나카이도 씨가 말한 대로 실수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꿈과 책임이 있는 일입니다." - P-1

해금월
일본은 취업 활동이 학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기업의 홍보 등 채용 활동을 제한하는데, 이 제한이 풀리는 시기를 ‘해금월’이라 한다 - P-1

"더 냉정하게 말할까. 앞으로 책이 더 안 팔릴 건 불 보듯 뻔하니 인쇄업도 객관적으로 사양 산업이고 가라앉는 배야." - P-1

책이 점점 팔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도 우라모토는 책을 만들고 싶어서 도요즈미인쇄를 선택했다. - P-1

배지부에는 공기 샤워가 끊임없이 나와서 인쇄가 끝난 지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파우더를 부착하고 있다. 옥수수가루 등을 원료로 한 미세한 파우더로 종이와 종이 사이에 물리적 틈을 만들어 잉크가 문질러지거나 다른 종이에 묻는 것을 방지한다. - P-1

"영업부에서 물어 와 버리면 아무리 무리한 작업이라도 하는 수밖에. 밥 먹고 살려면."
우라모토는 "늘 고맙게 생각해"라며 조금 과장된 투로 말했다.
"전서구로군." - P-1

외부 계단 밑 흡연 장소에서 지로 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는 별명을 짓는 데는 이 사람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 - P-1

박리다매 때문에 작업량은 늘어만 가는데 공장 직원은 해마다 줄고 있다. 더구나 노즈에의 바로 위 선배 시절에 채용을 극단적으로 줄인 탓에 지금은 중견 사원이 거의 없다. 때문에 공장에서는 30대 초반 직원에게 중간관리 업무부터 현장 작업 관리까지 온갖 부하가 집중되고 있다. - P-1

그런 판국에 우라모토는 거래처의 무리한 요구를 제꺽제꺽 받아 온다. - P-1

계장 노즈에는 크고 작은 작업들을 관리하면서 부하 육성까지 맡고 있다. 책임과 중압 탓인지 조용한 장소에 가면 인쇄기 소리 비슷한 이명을 겪는다. 밤에는 인쇄기가 새하얀 종이를 줄기차게 토해 내는 꿈을 자꾸 꾼다. - P-1

인쇄 영업은 외부에 사과해야 할 때가 많다. 언제 사과해야 하는지 제대로 분간하라는 말이다. 시야의 폭, 판단력, 임기응변의 조정 능력. 무엇 하나 나카이도에 한참 못 미친다. 씁쓸한 심정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 P-1

"인쇄 회사는 책의 탄생을 돕는 산파라고 생각해요. 이야기는 책이라는 몸을 얻으며 세상에 태어나니까 태어날 때 거드는 우리야말로 책의 산파가 아닐까 하는 거죠." - P-1

책과 사람은 일대일로 만난다. - P-1

독자는 설사 ‘재미없네’ 하며 던져 버리는 책에서도 뭔가를 건진다. 때로는 한 권의 책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여 인생을 바꿔 놓기도 한다. - P-1

책은 그런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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