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대륙에서 유태인들이 산 역사는 최소한 2천 년은 족히 된다. 유태인 파울로스(바울)가 1세기 중엽 기독교 복음을 전하러 그리스로 들어왔을 때(돌 1장 참조), 그를 환대하거나 박해한 주역들은 이미 로마 제국 도시들에 자리 잡고 살던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가며 때로는 추방당하고 때로는 죽임도 당하며 늘 차별받으면서도 유태인들은 유럽 여기저기에서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며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유럽 대륙에 살던 유태인은 9백만 명에 육박했다. 전쟁 기간에 나치스에 의해 6백만 명에 가까운 유태인이 학살당한 후 유럽의 유태인들은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대거 빠져 나갔다.
스페인 바야돌리드Valladolid를 구글에서 검색하면 축구 관련 기사들이 검색 페이지를 메운다. 축구 명가인가? 스페인 프로 축구 리그에서 바야돌리드가 차지하는 위상을 점검하기에 앞서 이 도시를 존중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도시는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인권’ 개념이 처음으로 학술적인 논쟁 주제로 다뤄진 곳이다. 죄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무참히 죽인 스페인 사람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쪽과 옹호하는 측은 이 도시의 대학에서 1550년에서 1551년에 걸쳐 역사적인 논쟁을 벌였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1484~1566). 그는 세비야Sevilla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살며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을 학살하고 학대하는 광경을 생생히 목도했다. 본인도 한때는 그 대열에 낀 적이 있다. 그는 가톨릭 사제의 신분이었음에도 노예 농장주를 겸했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는 본국에서 온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스페인 사람들의 만행을 꾸짖는 설교를 듣고 양심의 가책이 날로 심해져 자기 소유 노예를 모두 총독에게 반납했다. 그 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문, 수사로 살며 원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라스 카사스는 스페인과 아메리카를 오고가며 본국 정부와 교황에게 아메리카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진력했다. 본국의 일반인들도 아메리카 식민지의 실상을 알 수 있도록 『인디오 땅 파괴에 관한 짧은 역사Brevísima relación de la destrucción de las Indias』를 써서 1552년에 출간했다. 그는 국왕을 움직여 원주민 보호법령을 제정하게 했고, 교황을 설득해 원주민의 인권을 존중하라는 칙령을 얻어냈다.
‘상그레 데 토로Sangre de Toro’(황소의 피)는 스페인 서민들이 부담 없이 마시는 대중적인 레드 와인이다. 음식의 동반자 레드 와인 브랜드가 ‘황소의 피’일 정도로, 스페인은 황소를 찔러 피 흘려 죽게 만드는 투우의 나라다. 오늘날 반대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동물의 권리를 존중한다며 2013년 카탈루냐Cataluña주 의회가 투우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2016년 헌법 재판소가 그 결정을 뒤집었다. 정치인들이 스페인 문화에서 투우를 도려낼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유럽인은 여러 형태의 돼지고기를 즐긴다. 반면에 유럽 남쪽 이슬람권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태인들(발 7장 참조)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경전에서는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한다. 그런데 오늘날 유럽에서는 종교적인 이유와 상관없이 육식을 거부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개중에는 조용히 자신의 식습관을 고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들의 육식도 방해하려는 운동을 벌이는 이들도 있다.
그단스크Gdańsk 구도심 부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것은 붉은색 원형 건물 두 개를 양쪽에 거느린 채 우뚝 솟아 있는 검은색 구조물이다. 폴란드 내륙에서 싣고 온 곡물들을 이곳에서 배에 싣던 15세기 크레인이다.
이 고색창연한 크레인이 분주히 돌아가던 시대에 도시 경제를 주도한 사람들은 독일인들이었다. 이 도시의 독일식 이름은 ‘단치히Danzig’. 단치히에서 곡물을 실은 배들은 뤼베크(돈 7장 참조) 등 한자 동맹 도시들로 출항했다.
독일군은 단치히에 진주하자마자 1천 500명의 ‘열등 인간’ 폴란드인을 색출해 총살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망자들은 전혀 열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폴란드 혈통의 교사, 종교인, 언론인 등 폴란드인의 지도자들이었다. 먼저 지식인들을 제거한 후 나머지 폴란드인들은 그야말로 열등한 상태로 만들어 노예로 부려서 멸종시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작전이었다.
와인 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하고, 따라서 가장 값이 비싼 포도주는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서 나온다. 부르고뉴의 중심 도시 디종Dijon에서 코트 드 본Côte de Beaune까지 50킬로미터되는 거리 안에 최고급 부르고뉴 와인 ‘그랑 크뤼Grand Cru’ 원산지가 집중되어 있다. 디종에서 출발하는 ‘그랑 크뤼’ 와인 투어는 이 도시만이 제공할 수 있는 문화 체험 관광 상품이다.
제노바의 꿈은 당찼다. 지중해 동편은 베네치아가 장악했으나 서편은 자신들이 지배하길 원했다. 같은 꿈을 꾸던 이웃 공화국 피사를 제치고(돌 3장 참조) 제노바의 꿈은 실현되는 듯했다.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제노바 전성기의 별칭은 ‘바다의 지배자’. 근대가 열리며 원대한 꿈이 점차 왜소한 현실로 바뀔 무렵에도 제노바는 18세기 말까지 독립 공화국의 지위를 지켰다.
파리 관광 코스에 빠짐 없이 끼어 있기 마련인 베르사유의 넓고 긴 궁전을 둘러보려면 끝없이 몰려드는 단체 관광객의 물결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한다. 이 도시와 궁전을 건축한 왕이 혹시 살아서 다시 돌아온다면 펄쩍 뛸 상황이다.
‘내가 전 세계에서 몰려온 별의별 얼굴색의 오합지졸에게 구경거리가 되라고 이 궁을 지었나?’
루이 14세Louis XIV(1638~1715)가 멀쩡한 루브르궁을 놔두고 이곳에 새로 궁을 지은 이유는 파리의 인파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미있는 일이 많은 그 도시를 왜 싫어했을까? 루이는 아직 어릴 때 파리의 시민과 법관들이 왕권에 도전하는 혁명 사태를 겪었다. 미성년자 왕은 루브르궁에 가택 연금 상태로 여러 달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성인이 되면 파리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말 많은 법관들과 파리 시민들 눈치 보지 않고 내 뜻대로 통치할 것이다."
러시아의 표트르Pyotr 대제(1672~1725)는 사냥터였던 시절의 베르사유보다 훨씬 더 열악한 땅에 새로 석조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를 건설하고 1712년에 수도를 모스크바Moskva에서 그곳으로 옮겼다. 이곳에 거주할 궁전을 짓고 ‘몽플레지르Mon plaisir’(나의 기쁨)로 명명했다. 표트르는 이 궁을 유럽인들이 ‘러시아의 베르사유궁’으로 불러주기를 기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은 베르사유궁 공사에서 죽은 인원보다 수십 배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으나, 표트르 대제가 그런 사사로운 문제에 흔들릴 사람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도 권세를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야심에 있어서는 루이 14세든, 표트르 대제든, 그 누구에게도 밀릴 사람이 아니었다(피 6장 참조). 그는 베를린에서 약간 떨어진 포츠담Potsdam에 베르사유궁을 닮은 궁을 지어 ‘상수시Sanssoucci’(근심거리 없는)라고 이름 붙였다. 상수시궁을 지은 프리드리히 2세는 1747년에 궁을 완공한 후에도, 그 전이나 마찬가지로 주변 왕국들과 끝없이 전쟁을 벌였고 많은 이들에게 많은 근심거리를 듬뿍 선물했다.
1621년 6월 4일. 스웨덴 예테보리Göteborg는 생일이 분명한 도시다. 이 도시를 낳은 사람은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Gustav II(구스타브 아돌프Gustav Adolf, 1594~1632). 도시의 ‘아버지’는 스웨덴 예타Göta강이 북해로 빠지는 하구에 태어난 이 항구 도시가 스웨덴이 북해를 주름잡는 강국이 되기 위한 교두보가 되기를 기대했다.
예테보리는 스웨덴 도시이지만 네덜란드인이 건설했다. 독일인과 스코틀랜드인도 도시 개발에 적극 참여했다. 초기에는 도시 건설에 공로가 컸던 네덜란드인의 입김이 매우 강했다. 스웨덴인이 도시의 권력을 장악한 것은 1650년대 이후의 일이다.
마케도니아의 미친 자에서 그 스웨덴 사람까지,
이른바 영웅이라는 자들이 사는 목적은 괴상하게도
온 인류를 적으로 간주하거나 적으로 삼는 것.
― 『인간론Essay on Man』, 편지 4번
때는 19세기 초, 장소는 앙굴렘Angoulême 한구석에 있는 낡은 인쇄소 겸 주택. 인쇄된 종이가 널려 있고, 인쇄기가 돌아가기는 하나 일감은 많지 않고, 수입은 초라하다.
인쇄소 사장은 젊은 청년. 인쇄소는 부친의 소유였다. 부친은 지독한 구두쇠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사업 수완이 좋아 인쇄소를 운영하며 제법 돈을 모았다. 그러나 그 돈은 한 푼도 자식에게 줄 뜻이 없다. 외아들을 파리에 보내 최신 인쇄 기술을 배우게 한 것,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은 다했다고 자부한다.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1888~1978)의 그림들에는 도시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도시의 정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제목을 안다고 해도 별 도움이 안 된다. 1914년 작품 〈몽파르나스 역(우울한 출발)Gare Montparnasse(The Melancholy of Departure)〉에서 당시 파리 몽파르나스 역의 우아한 원형 아치나 삼각형 지붕의 조화로운 자태, 바글거리는 이용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적막한 콘크리트 기둥들과 경사진 평면이 화폭을 지배한다.
"이 도시는 놀랄 거리가 많다. 근사한 유령들이 출몰하고 섬세한 아름다움 속에 중세가 아직 살아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페라라의 ‘형이상적’ 매력은 과거와 현재가 겹쳐 있는 역사성이다. 그가 근무했던 페라라의 ‘산탄나Sant’Anna’ 병원도 당시에는 아직 15세기에 건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페라라는 자치 도시 자격을 13세기 후반에 상실하였으나, 도시를 다스린 에스테Este 가문은 자신들의 궁궐만 치장한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아름답게 가꾸는 데도 열심이었다.
메스Metz(독일어로는 ‘메츠’)는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만나고 충돌해온 로렌Lorraine의 중심 도시다. 메스가 도시로 변하는 시점에서 만남과 충돌의 주역은 로마 군대와 갈리아인들이었다. 기원전 1세기 중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갈리아 원정대는 오늘날 프랑스 땅을 두루두루 정복한 후 모젤Moselle강까지 진격해 이 지역을 평정한다.
전쟁과 전쟁 사이에서, 프랑스에서 독일로, 다시 독일에서 프랑스로, 또다시 프랑스에서 독일로 국적이 바뀌는 혼란을 겪던 메스. 이 도시는 독일과 프랑스를 화해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위대한 정치가 한 사람을 배출한다.
로베르 슈만Jean-Baptiste Nicolas Robert Schuman(1886~1963). 이름은 프랑스식, 성은 독일식으로 발음한다. 슈만은 룩셈부르크Luxemburg에서 태어났으나 메스에서 중등학교를 다녔고 독일에서 대학 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천 년 동안 유럽인들이 계속 꿈꿨던 바를 실현하려 합니다. 그 꿈은 전쟁을 종식하고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기구를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음악은 끝나기 위해 시작한다. 한 음악의 끝은 다른 음악의 시작. 음악은 순수한 과정 그 자체다. 끝을 향하는,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름다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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