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치유 라이팅북 필사 네번째

윤동주, 1917년~1945년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 간 젊은 시인.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옥중에서 타계하였으며 <별 헤는 밤>, <자화상>, <서시>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김영랑, 1903년~1950년
본명 김윤식, 1930년 『시문학』 동인지에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어 <내 마음을 아실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을 내며 1935년 첫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잘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해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한국어의 시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시인이다.

한용운, 1879년~1944년
독립운동가 겸 승려이자 시인. 
일제강점기 때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했다. <님의 침묵>의 시 전편은 고도의  상징적 수법과 여성적인 정감의 어조로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이다. 하지만그 내면에는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향한 강인한 신념과 희망이 담겨 있다. 사상과실천을 일치시켜 저항운동에 앞장선 대표적 민족시인이다.

김소월, 1902년~1934년
본명은 김정식.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다. 짙은 향토성을 바탕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발표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 등 수많은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백석, 1912년~1996년
본명은 백기행.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했다. 1938년 시집 <사슴>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토속적이고 민족적인 작품으로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광복 이후에는 고향인 북에 머물렀으며, 대표작으로는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모닥불>, <고향> 등이 있다.

박용래, 1925년~1980년1955년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로 박두진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향토적인 사물이나 지나쳐버리기 쉬운 것들을 시적으로 여과시켜 전원적·향토적인 서정의 세계를 심화하였다. 한국적 정서를 간결한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싸락눈》, 《강아지풀>, <먼 바다》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이용악, 1914년~1971년
일본 조치대학 재학 중인 1935년, 『시인문학」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조선 민중의 궁핍한 현실을 예민한감수성과 풍부한 사상으로 작품에 녹여냈으며, 서정주 · 오장환과 함께 3대 시인으로 불렸다.
<오랑캐꽃》, 《이용악집》 등의 시집을 펴냈다.

신석정, 1907년~1974년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을 연구한 신석정은 1931년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동인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1939년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가 수록된 처녀 시집 <불>을 통해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평가를 받으며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작품을 남겼다.

박목월, 1915년~1978년
본명 박영종, 1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길처럼>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민족 정서를 깊이 있게 탐구하여 우리 민족의 감수성과 상상력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 시인이다. 저서로는 박두진, 조지훈과의 3인 합동 시집 《청록집》과 개인 시집 <산도화>, <난· 기타>, <청담>등이 있다.

이병기, 1891년~1968년
시조학자이자 국문학자였던 가람 이병기는 시조 부흥운동을 주도한 한국 대표 시조 시인이다.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문법 강의를 들었고, 조선어연구회와 시조회를 발족해 민족 문학을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시조는 낡은 규범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창작하는 것이라고주장하며 새로운 운동을 펼쳤다. 저서로는 《가람시조집》, 《가람문선》 등이 있다.

노자영, 1898년~1940년
낭만적 감상주의에 기초하여 1920년대 청춘기의 정서를 표현하는 시를 썼다. 시와 산문에서 소녀적인 취향의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임화, 1908년~1953년
시인, 문학평론가, 영화배우, 혁명가로 활동하며 ‘조선의 랭보‘라 불렸다.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계급혁명 운동을 주도했다.

박두진, 1916년~1998년
청록파 시인 중 한 명으로 자연을 통해 시대의 부정적 가치를 비판하면서도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함형수, 1916년~1946년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불안과 비애, 사랑과동경에 관한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조지훈, 1920년~1968년
민족 정서를 섬세하고 우아하게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청록파 시인 중 한명으로 서정적이고 동양적인 미를 추구했다

이장희, 1900년~1929년
섬세한 감각과 심미적인 이미지를 작품에 표출시킨 시인이다. 주요 작품으로 <봄은 고양이로다>, <하일소경> 등이 있다.

오장환, 1918년~1948년
15세 어린 나이에 등단하여 <성>, <헌사>, <병든 서울> 등의 시집을 냈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천재‘로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

박인환, 1926년~1956년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의 시를 썼고, 도시 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했다.

이상화, 1901년~1943년
식민지 치하의 민족적 비애와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식을 기조로 삼은 민족주의시인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가 유명하다.

신동엽, 1930년~1969년
<껍데기는 가라>를 쓴 1960년대 대표적인 민족주의 시인이자 참여 시인이다. 치일한 현실의식과 역사의식,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

이육사, 1904년~1944년
시인이자 독립운동기. <광야>, <절정>처럼 강인하고 담대한 민족시 외에도 <청포도>처럼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작품을 남겼다.

강경애, 1907년~1943년
사회의식을 강조한 사실적인 작품으로 억압받는 하층 여성을 대변했던 식민지시기 최고의 소설가다. 1930년대 문단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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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1917년~1945년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 간 젊은 시인.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옥중에서 타계하였으며 <별 헤는 밤>, <자화상>, <서시>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 P15

김영랑, 1903년~1950년
본명 김윤식, 1930년 『시문학』 동인지에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어 <내 마음을 아실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을 내며 1935년 첫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잘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해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한국어의 시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시인이다. - P39

한용운, 1879년~1944년
독립운동가 겸 승려이자 시인. 
일제강점기 때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했다. <님의 침묵>의 시 전편은 고도의  상징적 수법과 여성적인 정감의 어조로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이다. 하지만그 내면에는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향한 강인한 신념과 희망이 담겨 있다. 사상과실천을 일치시켜 저항운동에 앞장선 대표적 민족시인이다. - P61

김소월, 1902년~1934년
본명은 김정식.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다. 짙은 향토성을 바탕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발표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 등 수많은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 P83

백석, 1912년~1996년
본명은 백기행.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했다. 1938년 시집 <사슴>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토속적이고 민족적인 작품으로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광복 이후에는 고향인 북에 머물렀으며, 대표작으로는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모닥불>, <고향> 등이 있다. - P107

박용래, 1925년~1980년1955년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로 박두진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향토적인 사물이나 지나쳐버리기 쉬운 것들을 시적으로 여과시켜 전원적·향토적인 서정의 세계를 심화하였다. 한국적 정서를 간결한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싸락눈》, 《강아지풀>, <먼 바다》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 P135

이용악, 1914년~1971년
일본 조치대학 재학 중인 1935년, 『시인문학」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조선 민중의 궁핍한 현실을 예민한감수성과 풍부한 사상으로 작품에 녹여냈으며, 서정주 · 오장환과 함께 3대 시인으로 불렸다.
<오랑캐꽃》, 《이용악집》 등의 시집을 펴냈다. - P157

신석정, 1907년~1974년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을 연구한 신석정은 1931년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동인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1939년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가 수록된 처녀 시집 <불>을 통해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평가를 받으며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작품을 남겼다. - P179

박목월, 1915년~1978년
본명 박영종, 1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길처럼>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민족 정서를 깊이 있게 탐구하여 우리 민족의 감수성과 상상력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 시인이다. 저서로는 박두진, 조지훈과의 3인 합동 시집 《청록집》과 개인 시집 <산도화>, <난· 기타>, <청담>등이 있다. - P207

이병기, 1891년~1968년
시조학자이자 국문학자였던 가람 이병기는 시조 부흥운동을 주도한 한국 대표 시조 시인이다.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문법 강의를 들었고, 조선어연구회와 시조회를 발족해 민족 문학을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시조는 낡은 규범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창작하는 것이라고주장하며 새로운 운동을 펼쳤다. 저서로는 《가람시조집》, 《가람문선》 등이 있다. - P233

노자영, 1898년~1940년
낭만적 감상주의에 기초하여 1920년대 청춘기의 정서를 표현하는 시를 썼다. 시와 산문에서 소녀적인 취향의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임화, 1908년~1953년
시인, 문학평론가, 영화배우, 혁명가로 활동하며 ‘조선의 랭보‘라 불렸다.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계급혁명 운동을 주도했다.

박두진, 1916년~1998년
청록파 시인 중 한 명으로 자연을 통해 시대의 부정적 가치를 비판하면서도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함형수, 1916년~1946년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불안과 비애, 사랑과동경에 관한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조지훈, 1920년~1968년
민족 정서를 섬세하고 우아하게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청록파 시인 중 한명으로 서정적이고 동양적인 미를 추구했다

이장희, 1900년~1929년
섬세한 감각과 심미적인 이미지를 작품에 표출시킨 시인이다. 주요 작품으로 <봄은 고양이로다>, <하일소경> 등이 있다. - P256

오장환, 1918년~1948년
15세 어린 나이에 등단하여 <성>, <헌사>, <병든 서울> 등의 시집을 냈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천재‘로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

박인환, 1926년~1956년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의 시를 썼고, 도시 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했다.

이상화, 1901년~1943년
식민지 치하의 민족적 비애와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식을 기조로 삼은 민족주의시인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가 유명하다.

신동엽, 1930년~1969년
<껍데기는 가라>를 쓴 1960년대 대표적인 민족주의 시인이자 참여 시인이다. 치일한 현실의식과 역사의식,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

이육사, 1904년~1944년
시인이자 독립운동기. <광야>, <절정>처럼 강인하고 담대한 민족시 외에도 <청포도>처럼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작품을 남겼다.

강경애, 1907년~1943년
사회의식을 강조한 사실적인 작품으로 억압받는 하층 여성을 대변했던 식민지시기 최고의 소설가다. 1930년대 문단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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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주류를 형성해온 사람들이 지워버리려 애쓴 기억들을 되살리는 날이 선 글들이었기에 몇몇 독자분들은 1권을 읽고 시궁창물을 뒤집어쓴 느낌이라는 항의 편지를 보내 주시기도 했다. 그분들께는 내 소년 시절의 길잡이였던 김수영의 절창 ‘거대한 뿌리’의 한 구절로 뒤늦은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나는 여기에 모인 글들을 쓰면서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끝낼 수 없는 문제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인권단체,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나의 역사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이런 오만한 기대와는 달리 정작 나와 같이 일하는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의 차미경, 김숙경, 이수효 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의 최정민, 정용욱 님을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께는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하는 원고 마감을 맞추어야 한다는 핑계로 내 몫의 일을 못해 오히려 부담만 준 것 같아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나야 안정된 직장에 글을 쓰면 원고료에 인세 수입도 생기지만, 말도 안 되는 활동비와 근무 여건 속에서 자신의 인권은 반납한 채 남들의 인권을 위해 애쓰는 이런 분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놋주발보다 더 쨍쨍한 추억을 쌓아가는 축복이었다.

대한민국사 2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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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용담에 환호하고 박수치던 아이들 중의 하나가 자라서 현대사 연구자가 되어 그 무용담에 가려진 진실의 참혹한 한 단면을 보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베트남 역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해보지는 못했으나, 베트남은 늘 내게 우리 역사를 비추는 마음의 거울이었다.

그 감춰진 역사

미국인들이 노근리를 비롯한 한국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우리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과 마주서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마음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이지만,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번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한 적 없이 전쟁을 정당화하고, ‘기념‘해 온 우리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급보는 오보였다. 오보도 단순한 오보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만주침략의 길을 닦으려는 목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의 감정을 악화시키기 위해 제공한 허위정보에 속아 넘어간 역사적인 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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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350명 전사했어도 격퇴?

우리와 미국은 참으로 특별한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두 나라의 기구한 만남은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1871년의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

이른바 ‘거중조정’(good offices) 조항인데, "만약 다른 열강이 체약국 정부에 대해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대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체약당사국은 그러한 사건에 관하여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위하여 거중조정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김규식은 "자국의 이타주의 지향성과 민주주의 원칙의 범세계적 적용을 그토록 떠들어온 위대한 미공화국"이 가면을 벗어던지고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흡혈귀 국가가 되었다고까지 말했다.

학살의 무덤 위에 선 대한민국을 장악한 친일파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한탄강 일대의 들쥐들이 들녘을 뒤덮은 전사자들의 시체를 파먹고 유행성 출혈열균을 키워갔듯 학살의 무덤 속에서 후천성 반미결핍증 병원균은 걷잡을 수 없이 배양되었다.

2002년 12월14일 시청 앞 집회에서 촛불시위를 처음 제안한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청년은 ‘여러분의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을 만지면 보이지 않는 손, 바로 여러분의 양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일침을 놓았지만, 나는 선후배 동료들이 숱하게 거쳐간 1970~80년대 공안기관의 어두컴컴한 조사실을 떠올렸다.

10년 전 또는 100년 전 범죄행위를 현재 우리는 당당히 우리의 권리로 누리고 있지 않은가?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가는 것이다.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불온한 꿈을 이뤄가면서.

미국의 오만은 국경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분노도 국경이 없다. 미국의 오만에 상처받은 사람들, 우리는 모두 하나다. 촛불의 힘으로, 아무도 감히 경험해보지 못한 평화의 힘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고 있다.

징병제도는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면 국민병제도의 장점을 살릴 길이 없다. 더구나 바람의 아들,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등 특권층을 중심으로 병역비리와 기피가 판을 치고, 사람의 아들들과 어둠의 자식들은 현행 징병제가 국민개병제가 아니라 ‘빈민개병제‘라고 비아냥거리는 현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 시민사회의 성숙, 경제발전, 남북관계의 개선에 걸맞은 병역의무를 시행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현행 징병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프랑스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국민군대를 형성한 성과는 나폴레옹의 유럽 석권으로 나타났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시민계급과 농민계급에 많은 정치적 양보를 하면서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징병제도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에서 징병제도 발전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참정권 등 시민적 권리의 확대과정이기도 했다.

징병제도는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면 국민병제도의 장점을 살릴 길이 없다. 더구나 바람의 아들,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등 특권층을 중심으로 병역비리와 기피가 판을 치고, 사람의 아들들과 어둠의 자식들은 현행 징병제가 국민개병제가 아니라 ‘빈민개병제’라고 비아냥거리는 현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 시민사회의 성숙, 경제발전, 남북관계의 개선에 걸맞은 병역의무를 시행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현행 징병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이런 방대한 군은 1950년대에는 국가예산의 40% 이상을, 1980년대 후반까지 30% 가량을 할당받아 물질적으로 한국사회의 다른 어떤 집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렸다.

상류층 자제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줄줄이 병역면제를 받는 현실에서 우리의 국민개병제는 허울뿐이고, 사실은 ‘빈민개병제’가 되었다는 비아냥거림이 나온 지 오래다. 현역 복무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폭발 직전이다.

조선의 법제상 양반이란 신분의 개념이 아니라 문반과 무반의 관료를 뜻하는 것이며, 법제상의 신분은 양반을 포함한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하나의 이상이었을 뿐,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은 특권귀족화하였다.

중종대에 이르면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향교는 군역을 피하려는 자의 소굴이라고 개탄했을 정도로 향교는 교육적 기능을 상실했다. 더구나 군역면제의 특권이 있는 양반들은 평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득시글대는 향교에 자제들을 보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17세기 이후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고, 공교육기관인 향교의 교육 기능이 붕괴한 것도 군역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아전이라는 것들은 일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일이 있어야 먹을 것이 생기니, 군정을 닦는다고 호적을 재정리하면 아전의 이익이 될 뿐 오히려 농민에겐 부담이 될 뿐이라서, 군정수는 현명한 수령이 할 짓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다산 같은 철저한 개혁가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된 것이다.

병역의무의 형평성을 파괴하여 합법적으로 특혜받는 사람들을 양산하거나, 병역의 의무를 진 젊은이들을 정권연장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병역특례 제도가 특권층을 위한 수단으로 쓰인 것은 전두환 집권 이후 석사장교 제도가 도입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4개월 훈련에 2개월 전방실습만 받으면 예비역 소위로 제대하는 엄청난 특혜가 있는데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서류를 조작하거나 신검 판정을 위해 뇌물을 쓸 일도 없었던 것이다. 말 많은 이 제도는 전두환·노태우 두 군사독재자의 아들들이 혜택을 본 뒤 1990년 대학원 입학자들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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