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생산된 지식들은 파편들처럼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체계화되어야 한다. 이런 체계화의 요구에 부응하는 능력이 이성이다.
칸트의 모든 비판서에는 변증론이 등장한다. 변증론의 주된 목적은 철학사 해체에 있다. 칸트는 변증론을 통해 자기 이전의 사상사를 간결한 삼단논법으로 재구성한 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순수이성비판』의 변증론이 겨냥하는 대상은 전통 형이상학, 특히 17세기 대륙 이성론이다. 서양에서 형이상학은 영혼, 우주, 신이라는 세 가지 문제와 싸워왔다. 이 세 가지 이념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추구해온 것이 서양 형이상학이다. 칸트는 변증론을 통해 전통적인 영혼론, 우주론, 신론을 차례대로 와해해간다.
인간은 그 형이상학적 세계에서 자라나는 물음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를, 나아가 자연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구할 수 없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식의 본성을 밝히고 그 한계를 분명히 한 궁극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대상을 사물로서 인식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그것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러므로 나는 신앙을 위한 자리를 얻기 위해 지식을 폐기해야만 했다. - 『순수이성비판』 재판 서문 XXVI쪽, XXX쪽
순수 이성 비판의 진정한 목적은 이성의 사유에 올바른 문제를 제기하는 것, 이성의 사유에 올바른 방향과 좌표를 제시하는 것, 참된 학문의 체계와 믿음의 근거를 구축하는 것이다.
경험적 인식의 중심에 있는 것이 지성이라면, 인식의 영역 바깥으로 사유가 나아갈 때 올바른 문제를 가리키며 방향과 구도를 열어주는 것은 이성이다. 그리고 이런 이성의 사유로 가기 위한 예비적 과정이 지금까지의 순수 이성 비판인 셈이다.
칸트 이전까지는 명제를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로 나누었다. 분석명제에서는 술어에 해당하는 속성이 주어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분석명제는 주어에 이미 포함된 속성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있을 뿐이다.
‘삼각형은 세 변을 가진다’ 또는 ‘삼각형은 넓이를 지닌다’ 같은 명제를 보자. 여기서 술어인 ‘세 변’과 ‘넓이’는 모두 주어인 삼각형의 정의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런 명제는 결코 틀릴 수 없다. 언제나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다.
종합명제에서는 주어에 없는 속성이 술어에 의해 덧붙여진다. ‘이 삼각형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저 삼각형은 초록이다’ 같은 명제를 보자. 여기서는 술어에 있는 ‘금’이나 ‘초록’은 삼각형의 정의에 없는 요소다. 삼각형 자체와 무관한 경험적 성질이 계사(‘~이다’)에 의해 주어와 결합된다.
종합명제는 보편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다. 다만 개연적이며, 그래서 언제나 오류 가능성에 빠질 위험에 있다.
영국 경험론은 모든 지식의 기원을 감각적 경험에 두었고, 그 결과 학문적인 명제 일반은 개연적이거나 확률적인 타당성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회의론으로 귀착했다.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을 넘어 그 두 가지 입장을 종합한다. 칸트는 뉴턴의 물리학도 수학적 진리만큼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라고 간주했다. 거꾸로 형식과학의 명제도 경험과학의 명제 못지않게 내용의 증가를 동반한다고 보았다.
칸트에게서는 인식이든 사유든 마음속의 모든 일은 4가지 인식능력(감성, 상상, 지성, 이성)에 의해 일어난다.
『순수이성비판』 초판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의 이성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부과되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그렇지만 자신의 능력을 벗어남으로 도대체 대답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운명이다. - 『순수이성비판』 초판 서문 VII쪽
첫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귀결들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초월론적 철학이라고 부른다. 원어인 ‘트랜센덴탈transcendental’의 의미는 칸트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그 번역을 놓고 많은 이견이 오갈 만큼 해석이 쉽지 않다. 이 문제에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먼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룬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의미를 그것이 초래하는 여러 결과들을 통해 정리해보도록 하자.
첫째, 칸트의 첫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단순히 대상 중심의 인식론이 주체 중심의 인식론으로 바뀐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철학, 특히 형이상학이 신학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6 칸트 이전의 철학, 특히 합리론의 독단적 형이상학은 신학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둘째,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시간 개념에서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칸트 이전의 사상사에서 시간은 자연의 규칙적인 운동(특히 천체의 운동)을 기준으로 측정되는 객관적인 사태였다. 그러나 칸트의 인식론에서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인식 주체와 무관하게 실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다만 우리 의식이 외부 세계로부터 자극을 수용하는 감성적 직관의 형식에 불과하다. 의식의 바깥에 있던 시간이 자연의 운동에서 해방되어 의식 안으로 귀속된 것이다.
셋째, 철학적 이성이 수학적 이성으로부터 해방된다. 철학적 이성은 당시까지 과학과 철학을 지배하던 수학적 이성과 분리되어 이제 자기 고유의 논리를 발견하게 된다.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수학은 학문의 모델이었다. 이성은 언제나 수학적 이성을 의미했다. 합리성이란 측정 가능성과 연역적 증명에 기초한 수학적 합리성이었다. 따라서 모든 학문은 보편수리학의 이념 아래 하나로 통합되는 형국이었다.
철학마저 수학의 방법에 의존할 때만 엄밀한 학문으로 인정받았다. 가령 스피노자의 대표작 『윤리학』의 원제는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이다. 기하학적 논증을 모델로 철학적인 논증이 이루어지던 당대의 일반적 추세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칸트는 수학과 철학을 분리하면서 동시에 인식과 사유, 그리고 지성과 이성을 구별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신학에, 그 이후에는 수학에 예속되어 있던 철학은 이로써 학문의 여왕이라는 우월한 위치를 다시 획득한 셈이다.
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 개념들을 다루는 모든 인식을 초월론적이라 부른다. 그러한 개념들의 체계는 초월론 철학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 『순수이성비판』 초판 서론 11~12쪽
철학의 신대륙을 발견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월론적’이라는 용어는 ‘트랜센덴탈transcendental’의 번역어다. 이 말의 어원에는 트랜스-카테고리알trans-categorial, 다시 말해서 ‘범주-초과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단어는 1128년에 철학자이자 독일 지역 궁중대신 필리페Philippe라는 인물이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월론적 차원은 칸트가 철학사에 가져온 가장 위대한 발견이다. 칸트는 철학 고유의 영토, 신대륙을 발견한 철학의 콜럼버스다. 칸트 이후의 철학사는 초월론적 차원의 발굴 및 확장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근대적인 삶에 부합하는 새로운 윤리학을 제시한다. 칸트의 ‘자유’ 개념은 한없이 작고 유한한 인간일지라도 광대한 우주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근거이자 품격의 원천이다.
두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앞에서 『순수이성비판』을 중심으로 칸트가 이론철학에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대해, 이 전회의 귀결점들에 대해 논의했다. 이제부터는 『실천이성비판』을 중심으로 칸트가 실천철학에 가져온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 칸트는 인식론에서뿐만 아니라 윤리학에서도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는데, 그 전환 역시 코페르니쿠스적 도식으로 집약할 수 있다.
고대인들은 동일한 문화적 관습과 전통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그렇기에 구성원들의 사고방식이 대체로 동질적이었다. 동질적인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선)을 놓고 합의한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종교, 풍속, 교육 배경이 같은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인간형과 최선의 삶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 일치를 끌어낸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출생 지역, 문화나 교양, 종교적 신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도시에서 이상적인 인간이란 무엇이고 최선의 삶이란 무엇인지를 놓고 합의한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이합집산하는 곳일수록 규칙을 적게 하는 것이 평화의 길이다. 구성원들이 사이좋게 살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의 규칙을 정하는 것, 그렇게 정해진 규칙은 무조건 따르는 것, 이것이 평화롭게 사는 길이다. 법 중심의 윤리학은 이런 필요성에서 유래한다. 법 중심의 윤리학에서 도덕법칙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니고, 그런 의미에서 의무라 불린다.
인간을 (감성 세계의 일부로서의) 자신을 넘어서게 하는 바로 그것, (···) 그것은 인격성이다. 인격성은 자연 전체의 기계적 질서로부터의 자유이자 독립성이며 동시에 자신에 고유한, 자기 자신의 이성에 의해 주어진 순수 실천 법칙들에 복종하는 존재자의 능력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다. (···) 인간은 비록 충분히 신성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그의 인격에서 인간성은 그에게 신성하지 않을 수 없다. (···) 인간은 곧 그의 자유가 지닌 자율의 힘에 의해 신성한 도덕법칙의 주체다. - 『실천이성비판』 전집 5권 86~87쪽
칸트 철학의 근본 물음들로 돌아가자.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칸트가 말하는 의지는 욕망의 일종이다.8 여기서 칸트가 상위의 인식능력으로 세 가지를 꼽았음을 다시 기억하자. 인식(앎)의 능력, 욕망의 능력, 감정(쾌-불쾌)의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실천의 세계를 여는 최초의 능력 혹은 상위의 능력은 욕망이다.
존경, 도덕적 판단의 원동력 의지 다음에는 존경respect이 있다. 존경이란 정확히 말하면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을 의미한다. 칸트는 도덕적 판단이 일어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동기’를 존경에서 찾았다. 이 말의 독일 원어 ‘Triebfeder’는 원동력을 의미하는데, 요즘 말로는 엔진이나 모터 같은 동력 장치에 해당하는 용어다.
칸트의 존경은 성리학의 ‘경敬’과도 비교해볼 수 있다. 퇴계는 『성학십도』에서 성리학 전체를 ‘경’이라는 한 글자로 압축한다. 칸트 윤리학과 비교해 함께 살펴볼 만한 대목이다.
자율, 적극적 의미의 자유 이제 자유를 의미하는 자율autonomy을 보자. 칸트 철학에서 자율은 의지의 자율을 말한다. 의지의 자율은 ‘초월론적 자유’와 구별되는 ‘실천적 자유’를 정의한다.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는 규칙이다. 아무것이나 다 할 수 있는 상태가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요, 책임이나 의무와 함께 갈 때만 자유는 비로소 의미 있는 자유가 된다는 것이며, 그런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 규칙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는 규칙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규칙이 아니라 행위자 스스로 제정한 규칙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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