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철학에는 세 차원이 있다. 하나는 주체로서는 알 수 없는 물자체다. 다른 하나는 주체에게 경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계다. 마지막으로 물자체와 현상계 사이를 나누면서 이어주는 제3의 차원이 있다. 그것은 경험적 대상을 비로소 나타나게 만들어주는 의식 내 선험적 원리들이 자리하는 영역이다. 칸트는 그런 선험적 원리들이 자리하는 장소를 ‘초월론적transcendental’ 차원이라 부른다.

경험의 선험적 원리들을 탐구하는 철학을 ‘초월론적 철학’이라 명명한다.

앎이란 무엇이며 경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길은 여기서 분명해진다. 현상계의 형식적 원리들, 그것이 곧 경험(인식)의 선험적 원리들이다. 그리고 그 원리들이 선험적으로 의식에 내재한다면, 경험의 기원이나 본성에 대한 물음은 의식의 선험적 원리들을 하나하나 밝혀가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인식론은 의식의 해부학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인식의 메커니즘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초월론적 철학’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비판철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실 칸트의 3대 저작에는 모두 비판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비판critique이란 말은 본래 그리스어 크리네인krinein에서 유래한다. 이는 자른다, 특히 음식의 썩은 부분과 썩지 않은 부분을 가른다는 뜻을 지닌다.

칸트의 비판철학에는 이런 어원적 의미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인식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인식의 영역과 사유의 영역,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등을 나누는 것, 한계를 그리는 것이 칸트적 의미의 비판이다.

거기에는 또한 해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순수이성비판』의 대부분은 우리의 마음을 가르는 과정, 의식을 해부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순수이성비판』 초판 51쪽

지성의 12범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범주3는 실체,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 이렇게 10개가 있다. 그러나 칸트는 고전 논리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10개의 판단 형식에 2개를 더 추가하고, 그로부터 12개의 범주를 끌어냈다. 그리고 그 12개의 범주를 다시 양, 질, 관계, 양태라는 4개의 상위 범주 아래 각각 3개씩 할당했다. 지성은 판단 형식에 해당하는 12개의 범주를 통해 감성적인 내용을 규정해간다는 것이다.

상상력이 감성에서 출발해서 그 직관의 내용을 지성에 전달해줄 때다. 이 경우 상상력이 하는 일을 ‘종합synthesis’이라 한다. 반대로 상상력은 지성의 개념에서 출발해서 감성적 직관의 내용을 그것에 부합하도록 가공해주기도 한다. 이 경우 상상력이 하는 일을 ‘도식화schematize’라 한다.

이런 차이는 상상력에 기인한다.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결국 개념에 부합하는 도식을 효율적으로 그려낸다는 것과 같다. 거꾸로 효율적인 도식을 그려낼 줄 알아야 그만큼 추상적인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응용할 수 있다. 자유로운 개념 사용의 조건은 도식을 그려내는 능력, 상상력에 있는 것이다.

인간 인식의 두 줄기가 있는데, 그것들은 아마도 하나의 공통의,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뿌리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감성과 지성이 그것이다.
- 『순수이성비판』 초판 15쪽

종합 일반은 단지 상상력의 작용 결과에 불과한 것으로, 이런 상상력은 영혼의 맹목적인가 하면 또한 불가결한 기능이다. 이 기능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인식도 가지지 못할 터이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드물게 어쩌다 한 번 의식할 뿐이다.
- 『순수이성비판』 초판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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