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읽기는 누구나 배우지만, 얼마나 강력한 보물을 손에 넣었는지를 진정으로 깨닫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 P26
엄청난 일거리 때문에 지난 8일 동안 꼼짝을 못 했다. 이사를 앞두고 12년 만에 처음으로 서재를 싹 치우고 짐을 꾸려야했던 것이다. 하루에 네다섯 시간씩 꼬박 바친 중노동에 저녁마다 등허리가 쑤시고 머리가 휑해져, 단순노동 끝에 누릴 수있는 피로감을 톡톡히 맛보았다. 남들이라면 훨씬 간단하고수월하게 해치울 일이겠지만 나는 유난히 꼼꼼하게 아주 꼼꼼하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수천 권의 책들이야말로 나의 재산목록 1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젊은 시절 서점과 헌책방에서 일하며 책 다루는 법을 배웠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 P33
너권씩 마주쳐털다가 있었던 일이다. 8절판의 두껍고 무거운 책 두 권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살살 치면서 먼지가 날리는 모양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기계적으로 작업하다가 언뜻 정신이 들면서 책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서구의 몰락》DerUntergang des Abendlandes이었다. 순간 수많은 기억과 상념들이 밀려들었다. 맨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여기 이러고 서서, 내 교양의 창고가 혹시나 먼지에 파묻힐세라 좀이 슬세라 걱정하며 이 책에서 조심조심 먼지를 털어내는 모습을 우리 아들들이나 다른 젊은이들이 봐야 하는데!‘였다. - P34
족히 한 주 내내 책정리에 매달렸다. 이런 장서는 사실 엄청난 짐이고, 그런 걸 평생 끌어안고 다닌다면 요즘 사람들은아마 비웃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야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나 이탈리아의 시인 아리오스토Ludovico Ariosto 같은 책은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테고, 10년 전에 <타잔>을 샀듯 지금도 그 비슷한 읽을거리를 사볼 것이다. - P40
그들이 독서물에 대해 갖고 있는 기준이란, ‘내용이 가벼우면서도 재미있을 것그리고 읽고 나서 간수해둘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 P40
반면우리의 원칙은, ‘가치가 없는 건 가급적장서로 들여놓지 말고 일단 검증된 것은 절대 내버리지 않기!‘다. - P40
이 구닥다리 책들에서 먼지를 터는 모습을 젊은 사람들이지켜보지 않아도 좋다! 상관없다. 그들도 언젠가 머리카락이성글어지고 치아가 흔들거릴 즈음이면, 자기와 평생을 함께하며 신의를 지킨 것들을 새삼 되돌아보게 될 날이 있으리니. - P41
"어떤 책을 가장 즐겨 읽으십니까?" 숱하게 받아본 질문이다. 세계문학을 두루 아끼는 사람으로서 답하기가 참으로 난감하다. 나는 이제까지 수천 권의 책을 읽었고 그중 어떤 것은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었지만,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읽는 문학의 범위와 소장도서 중에서 특정문학이나 사조 혹은 작가들을 골라내는 데는 기본적으로 반대한다. - P52
예컨대 그리스 문학 중에서는 비극작가들보다는 호메로스가 좋고, 투키디데스보다는 헤로도토스에 더 마음이 간다. - P53
이제까지 살면서 세계문학 중에서 내가 제일 많이 들여다봤고 그래서 아마도 제일 잘 안다고 할 만한 영역이라면, 오늘날에는 너무나 아득히 밀려나다 못해 아예 전설처럼 되어버린 독일의 한 시절, 즉 1750년부터 1850년까지의 백 년, 그러니까 괴테가 중심이자 정점을 이룬 바로 그 시대의 독일문학이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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