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절대로 거저 좋아지지 않는다. 10월 2일의 시위 기사가 뒤늦게나마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젊은 기자들의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형식을 당하고 ‘개와 기자는 출입 금지’라는 야유의 대상이 되지 않더라도, 기자다운 기자이고 싶었던 한 인간의 부끄러움이 젊은 그들을 여기까지 밀고 왔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들…….
"아무리 철면피한 입장으로 타락한다 하더라도 500원, 1,000원 그 없는 주머니를 털어 동아를 지켜주려 몸부림치는 저 독자들의 눈을 어떻게 마주 보겠습니까?"
무등산은 넉넉한 산이지만 없는 게 많았다. 무등산 타잔에게도 없는 게 많았다. 그에게는 제인도 없었고, 치타도 없었고, ‘아~ 아아~ 아아아아~’ 하고 부르면 달려와 줄 사자도 고릴라도 없었다. 무등산에는 타잔만 있었고, 치 떨리는 가난이 있었다.
군대에서 살아 돌아와 군 복무했던 쪽을 보고는 오줌도 누지 않고 살아온 이 땅의 예비역들이여! 채 피지 못하고 쓰러져간 6만의 젊은이들에게 "받들어총!" 자식을 가슴에 묻은 12만의 아버지 어머니께 "받들어총!" 통곡을 하며 통곡을 하며 "받들어총!"
이런 안보궐기대회 열풍을 문제 삼은 것은 남장 여자로 유명했던 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이었다. 김옥선은 10월 8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전쟁심리 조성, 사이비민주주의 제도, 안정에 대한 약속 등이 강권통치의 특징이라는 독일의 정치학자 프란츠 노이만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최근의 안보궐기대회를 관제 데모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국을 뒤흔든 각종 안보궐기대회, 민방위대 편성, 학도호국단의 조직, 군가 보급, 부단한 전쟁 위협 경고 발언,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 등은 국가안전보장을 빙자한 정권 연장의 수단"일 뿐이라며 박정희의 1인 통치를 정면 비판했다.
김옥선이 "전쟁도발 가능성의 판단은 오로지 독재자의 전유물이며 독재자는 자신의 실정을 국가안보라는 절대적 명제로 깔아뭉개고 국민을 사병화"한다고 발언하자 국회에서는 난리가 났다. 공화당과 유정회가 김옥선의 제명을 추진하자 김영삼은 김옥선을 보호하지 않고 사퇴를 종용했다.6 남장 여걸 김옥선이 눈물을 머금고 사퇴하자 신민당에는 예리한 면도날을 담은 항의 편지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처음 다룬 안건은 연필 생산에 관한 정령이었다.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백성들, 너나없이 못 배운 한에 사무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법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쿠바를 떠나기 전 체 게바라는 "둘, 셋보다 많은 베트남을 만들자"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를 베트남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고, 김일성은 베트남을 한국의 제2전선으로 보고 대규모 파병을 단행한 박정희에 맞서 한반도를 베트남의 제2전선으로 만들기 위해 이북 사회가 조금이나마 유연성을 견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했다.
"새벽종이 울렸네/새아침이 밝았네/너도나도 일어나/새마을을 가꾸세/살기 좋은 내 마을/우리 힘으로 만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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