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쓴 것은 그의 나이 불과 41살 때였다. 그런데 그보다 거의 곱절이나 나이를 더 먹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귀거래사’가 아니라 ‘출사표’(出師表)를 던지며 신발끈을 조여맨다. 40대 기수론의 주역들은 오늘날 노인정치의 주역이 되어 건강을 뽐내고 있다.

고점리가 켜는 악기에 맞추어 형가는 노래를 불렀다. "바람은 쓸쓸히 부는데 역수의 물이 차구나. 장사가 한번 떠나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壯士一去兮不復還) 그리고는 수레를 타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테러를 독립운동의 주요 수단으로 삼은 대표적인 단체로는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을 들 수 있다. 의열단은 ‘칠가살’(七可殺)이라 하여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탐, 반민족적 토호열신 등으로 암살대상을 명확히 했다. 반면 임시정부가 정한 ‘칠가살’에는 ‘적의 관리된 자, 애국 의연금 횡령자 등 불량배, 모반자’ 등이 포함되어 있어 의열단의 규정에 비해 훨씬 포괄적이었다.

마지막 조선의용대원으로 유명한 김학철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중국으로 망명한 조선혁명자들의 대부분은 테러 분자였다면서 이렇게 썼다. "그들은 거의 종교적인 열광으로 테러활동을 숭상하였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수 용사들의 모험적인 행동으로 능히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적 통치를 뒤엎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망국의 치욕을 자기들의 피로 능히 씻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여 그들은 적의 요인을 암살하고 특무와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것을 자기들의 주요한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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