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의 글을 통해서 나는 이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한국사의 여러 면에 눈을 뜨게 됐다. 한국의근대성, 한국의 민족주의가 얼마나 다각적이며 복잡하게 구성돼 있는지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북한 건국사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들도 확 바꾸어 주었다. 한 교수의 대중적인 역사이야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역사에 대한 무한한 궁금증과 기존 학설에 대한 도전 의식, 그리고 과거의 선각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갖게 한다. 아직까지도 박정희 신드롬 등 역사 인식의 숙환을 고치지 못한 우리 사회에, 한 교수의 이책은 분명 명약이 될 것이다. -박노자(노르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워싱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있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역사이야기 를 연재하면서 역사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 이라는 선입견을 뛰어넘는 신선하고 도발적인 글쓰기로 독자들의 폭넓은 호응을 얻었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집행위원. 양심에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 성공회대 사이버NGO 자료관장 등을 맡고 있다. 논문으로 상처받은 민족주의 외 다수가 있다.
그 말을 듣고 난 황 정승은 "네 말이 옳구나"(汝言이 是也라)라고 답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황 정승은 이번에도 "네 말이 옳구나"라고 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 정승은 "네 말이 또 옳구나"(汝言이 亦是也라)라고 답했습니다.
인간이 살아온, 그리고 살고 있는 세계는 상충하는 이해의 충돌과정이었고, 그것을 기록한 역사서술이나 사료는 대개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해관계에서 어느 한쪽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서술이나 기록이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어느 한쪽의 주장이 말도 안 되게 엉성하거나, 역사가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사건을 둘러싼 상반된 주장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다면 사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개의 경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보고, 영화에 등장하는 승려는 이런 인간사의 모습이 전쟁이나 지진, 화재나 역병보다 훨씬 더 무섭다고 탄식합니다. 반쯤 부서진 건물에 라쇼몽이란 현판이 걸린 큰 문 아래에서 비를 피하면서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주장들이 실상은 잘 포장된 거짓일 수 있다는 점을 나름대로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문제는 관점과 기준입니다. 일어난 일은 분명 하나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분명 이토 히로부미를 쏴죽였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분명 유가증권을 위조했습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그 행동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기회주의자 박정희를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자식들에게 올바르게 살라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일제의 학살만행과 정신대 만행에 분노하고, 노근리 학살에 참담해 하면서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 의혹을 방치해둘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이래서 골치 아픕니다.
‘역사’ 하니, 문익환 목사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산다는 것이라는 말씀이 말입니다.
우리 손으로 자주적인 근대화에 실패하고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휘둘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지적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 피동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단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해방과 근대적 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해 우리는 참으로 끈질기게 주체적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불행히 승리하지 못한 것이다.
단 한번 승리, 어떤 민중가요가 노래하는 그 단 한번 승리의 짜릿한 감격을 아직 맛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
_유산된 민주혁명
일제의 패망이 있기까지 우리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방을 순수한 전취물이라고 말하는 것도 곤란하다.
일제의 패망은 우리에게 너무 빨리 찾아왔고, 어쩌면 우리는 해방마저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분단을 당했다.
이렇듯 숨가쁘게 근대로 끌려들어오는 와중에 우리는 중요한 통과의례를 치르지 못했다. 왕의 목을 치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시민혁명을 이루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근대에 편입된 것이다.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근대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들이 고스란히 다음 시대에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화운동이 확실하게 장사지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보낸 박정희는 지금 부활을 꿈꾸고 있다.
시민 없는 시민사회
우리 사회에 결여된 것은 시민만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는 국가 우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민만이 있을 뿐,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인민(people)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참정권의 경우 이를 보장하기 위한 운동을 18세기 말에 처음 시작한 프랑스의 메리쿠르는 ‘미친년’ 소리를 듣다가 정말로 미쳐버렸고, 구즈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단상에 오를 권리도 있다"고 말하다가 의정단상에 오르기 전에 단두대에 올라야 했다.
전근대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고 무늬만 민주주의인 선거가 실시되고, 게다가 계급과 이념에 기초한 정당정치는 한국전쟁으로 말살되고 보니, 종친회, 화수회(花樹會), 향우회, 동창회 등 혈연, 지연, 학연으로 똘똘 뭉친 조직들이 근대적 이익집단을 대신하여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대개는 쫓겨나는 동료들의 아픔을 같이 느끼며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부끄러움, 도덕적 책무에 번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지위가 높아지고 해당 분야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그날의 아픔은 죽은 자들,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는 자들에 대한 공격성향으로 나타났다.
왕정은 왜 왕따당했나
_입헌군주제 논의와 공화제의 도입
일찍이 독립협회는 "자유나 민권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민권을 주어 하원을 설치하는 것은 위태하다"면서 "무식한 나라에서는 군주국이 민주국보다 견고"하다고 하여 민중들의 국정참여를 반대하였다.
일본의 ‘천황’ 가문이 이어진 것은 위대하거나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힘없이 뒷방으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다스린 중국에서 왕조의 교체 주기는 200∼300년이었던 반면, 국왕이 다스린 한국에서 왕조의 교체 주기는 500년이었고, ‘천황’이 다스린 일본에서는 ‘천황’가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남한 단독선거를 향한 움직임이 구체화될 무렵,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泣告: 울며 고함)이란 유명한 글에서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밝혔다.
임시정부에 ‘9개준승’은 참으로 모욕적인 문서였지만,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손님인 객군(客軍)은 주재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픔을 참으며 이를 접수’[忍痛接受]했다.
필자는 요즈음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이라도 제대로 계승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그런 정부라면 통일을 지향하고, 민중의 생존권을 존중하고, 어떤 특권세력에 의한 부와 권력의 독점을 용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주성을 갖는 정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극기가 박영효가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만들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그 도안을 누가 처음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청의 사신으로 조선에 와 조선과 미국 간의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체결을 주도한 마건충(馬建忠)과 김홍집 간의 필담을 담은 『청국문답』(淸國問答)을 보면 태극기의 도안자가 마건충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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