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의 진보 세력은 검찰과 언론 한두 곳을 진영 속에 묻은 채 정조준하고 있다. 만약 윤석열 검찰총장이 물러나기라도 하면 진보 세력의 할 일은 거의 끝날 듯한 놀라운 시절 아닌가.
거리낌 없는 타락의 정치
4·15 총선이 3주도 남지 않은 오늘,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던 19세기 유럽의 반동적 보수주의자의 말이 뇌리를 때린다.
가령 100퍼센트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독일에서 의석수를 늘리기 위해 위성 정당이라는 꼼수나 변칙 행위를 벌이는 정당이 있다면 곧바로 유권자들로부터 배척될 것이다. 그들의 정치의식이 그런 반칙 행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 그리고 그들의 위성 정당들을 심판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초라하고 낮은 정치의식의 소유자임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위성 정당은 염치없는 정치가 연출한 막장 드라마다. 하지만 민주 시민에겐 정치 혐오와 냉소에 빠질 권리가 없다. 정치적 동물로서 우리는 분노를 적극적 참여로 표출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두 거대 정당과 위성 정당을 제외한 정당과 후보에게 표를 주자. 그 득표수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얼마나 성숙한 정치의식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확한 가늠자가 될 것이다.
인간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이 되지 못하는 한편, 하면 안 될 일을 멈추지 않을 때 괴물이 된다. 간디는 "신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만, 단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킬 수 없다"고 했다.
‘조중동’ 독자들이 대부분 편익을 위해 신문을 구독한다면, <한겨레>나 <경향신문> 독자는 논조에 공감하기 위해 구독한다. 진보 신문의 어려움이 이 점에서 비롯된다. 논조에 100퍼센트 공감할 수 없는 일인데 독자들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한겨레> 창간 주주들 중에도 절독한 사람이 적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습을 게을리하여 실력이 부족하면서도 지적 우월감과 윤리적 우월감으로 무장한 ‘민주 건달’이 되지 않을 것을 자경문의 하나로 삼고 있다.
‘사회적 기포’는 예상했던 대로 금세 잦아들었다. 변혁적 국면은 기성 정치로, 정치는 통치와 행정으로 수렴되었다.
정치는 통치와 행정으로 수렴되었고, 촛불로 뜨거웠던 광장은 다시 시장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시민은 소비자로 되돌아왔다.
물론 상상에 멈춰선 안 된다. 참여하고 행동해야 한다. 광신자나 사익 추구 세력 또는 극단주의자보다 더 열성적으로.
2월 7일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트럼프 행정부가) 일본이나 독일보다 안보의 약점을 더 많이 안고 있는 한국을 상대로 ‘살계경후(殺鷄儆猴, 닭을 죽여 원숭이한테 겁을 준다)’를 시도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마찬가지로 강대국 사이의 갈등도 약자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정리되는 게 국제 현실이다.
그의 ‘분명하지 않음’은 결선투표제가 요구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나는 차선으로라도 유권자 과반수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민에게 했던 공약을 지켜야 한다"고 조금은 더 당당히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
알렉시 드 토크빌의 말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조금 일찍 프랑스에서 태어난 반혁명주의자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의 말이다.
우리에게 이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현대 정치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왜곡과 반동의 굴절을 겪어야 했다. 87년 6월 항쟁이, 속된 표현으로 ‘죽 쒀서 개에게 준’ 꼴이 되어버린 가장 큰 이유는 결선투표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득권 집단은 광신자 집단 버금가게 열성적이다.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키우려고 할 때는 뻔뻔스러움과 억지를 부린다면,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빼앗길 우려가 있을 때는 거기에 악착스러움까지 보태는 경향이 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귀국 전에 "우리는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나?"라는 내 물음에 대한 프랑스 역사 교수의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이 절제는 세 방향에서 작용한다. 내면의 성찰에서 비롯되는 자기 절제, 상호 견제와 비판에 의해 작용하는 절제, 그리고 민중의 비판력으로부터 작용하는 절제가 그것이다.
사람들이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에 설득하기 어렵고, 그래서 모두 설득하기를 포기한다면,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다시금 되새기자.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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