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구절이 있다. 중국의 각급 학교에 붙어 있다는 글귀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 바로 우리 모습 아닌가! ‘배움’과 ‘생각하기’는 어우러져야 한다.
"노력은 실력이 아니라 계층이다!"
앞으로 ‘명문대 졸업장’, ‘좋은 일자리’, ‘비싼 주택’ 소유와 더불어 세습에 따른 계층화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지배계급의 재생산은 일정 부분 문화자본의 전달에 종속되는데, 문화자본은 병합된 자본이라는 고유성을 가지며, 따라서 십중팔구 타고나는 것"(피에르 부르디외)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제 계층 상승의 길은 막히고, 양극화는 심해지는 가운데 지난날의 낙수효과도 사라졌다. 대물림되는 이 땅의 가난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신자유주의가 발호하면서 너덜너덜해졌다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유럽의 사민주의 정책의 잔해가 한국 현실 정치에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인가.
두 전쟁 모두 미국이 개입했는데, 한국전쟁이 ‘승자 없는 전쟁’으로 분단 상태를 지속시켰다면 베트남은 통일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호찌민이라는 걸출한 지도자, 베트남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항쟁 정신, 이념의 차이를 눅여준 마을 공동체 의식 등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베트남에는 밀림이 있는 대신 한반도에는 혹독한 겨울이 있다는 자연 조건의 차이가 가장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베트남 참전 최고의 수혜자는 박정희였다. 베트남이 통일된 날인 1975년 4월 30일보다 3주 앞서, 한국에서는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여덟 분이 처형당했다.
그렇게 일반 민중이 개와 돼지처럼 배만 채우면 되던 시절, 높으신 분들의 심성 안에는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비참함에 대해 서양에는 기독교의 ‘긍휼’, 동양에는 공맹사상의 ‘측은지심’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체 높은 분들 스스로는 추위와 배고픔을 겪지 않았어도 공감 능력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의 "온정, 시혜에 관해 사람들은 받는 쪽이 아닌 주는 쪽에서만 생각한다"는 말이나, 『주홍글씨』를 쓴 너새니얼 호손의 "온정과 오만은 쌍둥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온정과 시혜를 필요로 하는 사회보다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는 것은 분명하다.
남의 온정과 시혜가 필요한 상황, 그것 자체가 이미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요구하자. 인간답게 살 권리를. 어느 때보다도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던 누군가의 말이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가. 이번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에는 한국의 예술가와 활동가가 참여해 콘서트, 퍼포먼스, 캠페인 등을 펼치는 ‘기본소득 주간’ 행사도 함께 열린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리얼리스트의 많은 참여가 있기 바란다.
"다음 혁명에는 바지를"
"나는 공산주의에 찬성이오. 사회주의도 찬성이오. 그리고 자본주의도 찬성이오. 왜냐하면, 나는 기회주의자이므로." 프랑스 가수 자크 뒤트롱의 노래 <기회주의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뒤트롱의 노래 <기회주의자>는 이렇게 끝난다. "저고리를 너무 뒤집어 입어서 이젠 양쪽이 모두 해어졌다오. 다음 혁명에는 바지를 뒤집어 입을 거요." (혁명을 기대하기 어렵기에) 한국의 기회주의자는 바지를 뒤집어 입을 일은 없겠지만….
오늘날 박 정권과 박 정권을 떠받치는 수구 세력이 일본의 식민 체제 아래에서 조선 민중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공감한다면,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저지른 학살과 고문 행위에 대해서는 왜 그리 둔감할까. 아니, 둔감하다는 말은 가당치 않다. 그들이 바로 학살과 고문, 간첩 조작 등 국가 폭력 행위의 주체였거나 거기서 싹튼 세력이기 때문이다.
실상 아베 신조에게는 가소롭게 비칠지 모른다. 자국민을 학살하고 고문한 자들이 식민지 조선과 조선 사람을 유린했다고 일본을 손가락질할 수 있나? 더구나 일본의 식민 체제에 빌붙어 사적 안위와 영달을 추구했던 자들이?
샤를 드골의 발언 "과거를 잊지 않은 채 함께 미래를 바라보기로 했다"
프랑스에서 망명도생을 결심하기 전에 가장 두려웠던 것은 장기간의 징역살이보다 그에 앞서 치러야 할 고문에 대한 공포였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2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 정권’이라는 말에 섬뜩 놀라고 꿈속인 듯이 허우적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또한 나의 성정 탓이겠다.
장발장은행은 되도록 빨리 문을 닫아야 한다. 그러자면 범법 행위자에 대한 벌금액을 소득과 재산에 연동하여 부자에겐 많이, 가난한 사람에겐 적게 받아내야 한다. 즉 현행 총액벌금제를 일수벌금제로 바꿔야 한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고, 돈 바꿔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리라’ 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6월 항쟁 당시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에 몸을 피한 청년 학생들을 체포하려는 정권에 김수환 추기경이 했던 말은 지금도 감동으로 다가온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과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들을 다 넘어뜨린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지난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았던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말했다. "조직의 안위에만 치중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신발에 거리의 진흙을 묻힐 수도 있어야 한다. 나는 교회가 좀 더 깨지고 상처 입고 더러워지기를 원한다." 사회의 변두리는 사제가 피할 곳이 아니라 찾아가야 할 곳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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