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작품들은 정답에 해당하는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해석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카프카의 작품은 셀 수 없이 많은 해석을 유도한다. 단지 그중 어떤 하나가 정답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작품은 내적 구조가 선명하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바가 분명하지 못한, 좋지 않은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보통의 경우라면 좋은 평가를 받지도, 독자들 선택을 받지도 못할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고는 자신이 이부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대도시 베를린의 비참한 노동자들

이 소설에서는 도시빈민화된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일상이 화려한 도시 모습과의 대조를 통해 효과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자본주의화된 사회에서 벌어지는 노동 착취 문제는 이미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열악한 생활조건과 노동조건, 임대료 상승에 훨씬 못 미치는 낮은 임금 상승률 등이 노동자들 삶을 견디기 힘든 것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들은 시민운동가들과 정치인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했으며, 곧 사회주의 정당을 설립하여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실업보험, 노동재해보험 등의 사회보장제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났다. 19세기 후반에 사회보장제도라는 사회주의적 제도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하던 독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노동자들 삶의 조건은 점진적으로 향상되었지만, 자본주의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상품의 생산 과정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데에서 기인했다.

「변신」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누구나가 겪게 되는 인간 소외에 대한 묘사로 보고자 할 경우, 이 작품에서 불가사의한 것처럼만 보였던 여러 사건들이 비교적 쉽게 이해된다.

한 집안의 전체 소득을 담당하던 아들이 갑자기 벌레로 변했다는 것은 그가 노동 능력을 상실했으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출근을 종용하기 위해 그를 찾아온 지배인의 에피소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배인은 잠자가 수금한 돈을 가지고 잠적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고, 부모 앞에서 그의 실적이 좋지 않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그에게 출근을 강요하기 위해 잠자를 찾아온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적인 인간 소외 상황이 가족에까지 도달했음을, 경제적 가치가 가족 사랑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가족구성원 간의 이러한 관계는 개인의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사회경제적 시스템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잠자의 부모와 여동생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환상문학의 기본적인 속성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초자연적 사건이 벌어지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시골의사」 애초에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그 어떤 해석도 허락하지 않는 「시골의사」

우리는 지금까지 「변신」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소외를 다룬 작품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는 가능한 여러 해석 중 하나일 뿐이다. 「변신」은 예를 들어 불치병에 걸린 식구를 돌보는 가족 이야기나, 현대사회에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한계를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녀가 내 곁에 서 있었다. "자기 집에 무슨 쓸 만한 물건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냈군요." 그리고 우리들은 웃었다.

자아가 욕망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골의사가 마차를 타고 환자에게 가는 이 장면은 욕망 실현을 위해 말과 마부가 공모하여 욕망을 통제하는 자아를 몰아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후의 기괴한 장면들도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하다.

카프카는 「시골의사」에서 통제할 수 없는 욕망과 통제에의 의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카프카의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카프카의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작품을 즐기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카프카는 특별하다. 그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 동감할 수밖에 없는 삶의 이미지를 기괴한 이야기로 형상화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의 해석, 하나의 이해로 고정시킬 수 없다. 카프카는 있는 그대로, 기이하고 이해가 불가능한 방식 그대로 읽고 즐겨야 한다. 이 경우, 해석은 즐거움을 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카프카는 우리에게 새로운 읽기의 방식을 요구한다.

가브리엘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의 『백년의 고독One Hundred Years of Solitude』이나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해변의 카프카海辺のカフカ』처럼 현대문학 작품에서 카프카가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20세기 초에 체코와 독일에서 활동했던 카프카가 20세기 중반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콜롬비아에 살고 있던 청년 마르케스로 하여금 작가가 되도록 결심하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카프카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현대성과 특별한 일반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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