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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평점 :
반쪼가리자작 ㅣ 이탈로 칼비노 ㅣ 이현경옮김 ㅣ 민음사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다른 반쪽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성에서 사는 자작, 즉 사악한 자작은 반쪽짜리예요.
그리고 당신은 그 나머지 반쪽이에요.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그게 없어져 버렸다고 믿었지요.
그런데 이제는 그 반쪽이 돌아온 거예요. 바로 착한 반쪽이에요!"
테랄바의 메다르도 자작은 투르크인들과 전쟁 중인 기독교도들의 병영에 합류했다. 전쟁터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전쟁이 아니어도 페스트로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기독교도들의 군인들은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 막 청년이 된 메다르도 자작처럼 용감한 군인들과 함께 투르크인들의 진영으로 파고든 자작은 대포를 보았는데 사용할 줄도 모르면서 덤벼들었다가 대포에 맞았고 깨어나보니 그는 한쪽 팔과 다리가 없었고 몸통이 없으며 눈도 코도 입도 반만 지닌 반쪼가리가 되어 있었다.
고향에 돌아온 반쪼가리 자작은 마을 사람들에게 악행을 저지른다. 모든 것을 반쪼가리로 만들고 사람을 시켜 사람을 죽이는 기계를 만들게 하고 사람들의 집에 불을 질러 죽이기도 한다. 자신을 길러준 유모를 문둥병 마을로 쫓아버리고 악행을 서슴지 않는데 한 편 마을에는 이 반쪽가리 자작이 선행을 베푸는 일화들이 떠돌아다닌다. 반쪼가리 자작은 악행의 아이콘인데 어째서 이런 선행의 이야기들이 떠도는 걸까?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현실 고발적 참여문학을 지향하다가 점차 동화적이며 환상적인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때 쓴 작품들이 바로 #반쪽가리자작과 #나무위의남자, #존재하지않는기사이다. 보통 이탈로 칼비노의 3부작으로 표현하는데 추후 이탈로 칼비노는 마술적 사실주의로 전환하여 글을 쓰게 된다. 마술적 사실주의... 어디서 들어봤는데? 바로 #아우라를 쓴 카를로스 푸엔테스도 마술적 사실주의를 지향한 작가이다. #아우라를 읽었을 당시 내가 제대로 책을 이해한 건지 이해하지 못한 건지 굉장히 헷갈리는 환상적인 느낌이었는데 이탈로 칼비노도 마술적 사실주의를 지향한 작가라니, 뭔가 하나 또 배운 느낌이다. 나무위의 남작은 읽다가 말았는데 재도전해야겠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상을 받았다. 책을 쓰는 족족 상을 받으니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답다.
#반쪼가리자작은 자작의 조카가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인데 조카, 즉 소년의 눈으로 본 악과 선의 충돌, 그리고 그 악과 선을 대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소년의 시선으로 풀어간다. 사람이 반쪼가리가 되어서도 살 수 있으며 분리되었던 나머지 반쪼가리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꽤나 동화적이다. 이런 반쪼가리 자작 이외에도 쾌락을 추구하는 문둥병 환자들이나 반쪼가리 자작에 의해 살인에 쓰일 기계를 만드는 일에 최선인 장인, 자신들의 이익에만 급급한 위그노들을 소년의 시선으로 들려주는데 그저 소년은 들려주기만 하지 판단은 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꽤나 사실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동화적으로 그린다.
#반쪼가리 자작은 자신의 한쪽은 악행의 아이콘, 한쪽은 선행의 아이콘으로 자신 안의 악과 선이 충돌하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자기가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자신을 둘로 쪼개어 나눈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 내면에는 악과 선이 있는데 둘이 떨어져서는 온전하지 못하고 함께 할 때 조화를 이룬다는 느낌도 든다. 악을 행하는 반쪼가리 자작을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기피한다. 그가 저지르는 악행은 끔찍하고 그의 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선을 행하는 반쪼가리 자작도 사람들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의 선행으로 많은 이들이 웃음을 찾았지만 극단적인 선도 악과 함께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작가의 발상이 참 흥미롭고 재미있다. 완독은 못했지만 #나무위의남작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였으며 작가가 동화적 세계를 추구할 당시의 3부작이 꽤나 흥미롭고 신선한다는 느낌이다. 두께도 얇은 편이라 부담 없이 도전해 볼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