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버빌가의 테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2
토머스 하디 지음, 유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
남편을 하늘로 여기고 칠거지악이라는 터무니없는 개념으로 본처를 내동댕이쳐도 손가락질 하지 않는 여성 하대(下待)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 여성에게 희생과 복종은 자아를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리고 이를 수용해줄 여성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지금도 이슬람이나 아프리카의 몇 몇 국가에서는 여전히 여성에게 성적억압과 엄청난 굴레를 씌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을 반영한 문학 은 우리가 이러한 여성들을 만나볼 수 있는 흥미로운 매개체로 작품 속 여성 또한 시대를 거쳐 변화하며 사회상을 반영해 왔는데, 이번에 읽은 ‘더버빌가의 테스’는 여주인공 테스를 통해 19세기 영국의 여성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미혼모이자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테스를 주인공으로 해 출간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자 토마스 하디는 ‘A Pure Woman(순결한 여성)’이라는 부제를 붙여 당대 영국 사회를 풍자하고 자신이 형상화한 인물 ‘테스’를 독자들의 가슴에 쾅!하고 강렬하게 새겨 넣는데 성공하였다. 한때는 위세등등한 명문가였지만 지금은 가난에 허덕이는 더버빌가. 테스는 그 허울 좋은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고 예나 지금이나 어디 빌붙어볼 친척이라도 있으면 눈 씻고 찾아보는 것이 법도인양 테스의 부모 역시 엄청난 부자친척을 찾아내어 테스를 막무가내로 보내버린다. 왠지 꺼림칙하지만 현실의 고통 속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녀는 결국 그곳에서 망나니 알렉에게 겁탈을 당하고 졸지에 미혼모가 되어 죄인처럼 살아가는 비운의 삶을 맞이하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힘없는 피해자였다. 그런데 테스는 오히려 은둔자처럼 숨어 지내야 했고 마을 사람들은 강간당한 것마저도 테스의 잘못으로 전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일이 닥친 건 애시당초 테스가 너무 ‘예쁘기 때문’이라며 못생긴 여자들은 ‘교회’처럼 안전하다는 농담마저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그러고 보니 작년인가 이탈리아 총리도 이탈리아 여성이 너무 예뻐서 강간이나 성범죄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다는 정신 나간 발언을 했는데 시대가 바뀐 지금까지도 여성을 남성에게 성적으로 종속된 존재라고 치부하는 가부장적 사고는 여전히 그 전통이 유지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만 보더라도 테스의 비극적인 생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예쁜 여자의 삶은 온전히 자기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의해 언제든지 농락되고 파멸될 수 있다는 결정론적인 삶으로 말이다. 그러나 테스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깨어짐으로써 서서히 완성되어가는 자신의 삶을.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려 하고 그곳에서 만난 에인절을 통해 진짜 사랑의 감정을 뜨겁게 배워나갔다.
허나 에인절은 사랑의 감정보다는 관습과 사회적 통념, 여성의 순결을 중요시 하는 어쩔 수 없는 사내였는지라 결혼을 하자마자 브라질로 떠나버린다.
아~ 가련한 여인, 테스. 어머니의 말씀처럼 절대로 과거를 말하지 말았어야지, 결국 이렇게 사랑에 배신당하고 마는구나.
  

그러나 누가 테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테스야 말로 진정 순결한 여성이었음을 책을 읽은 독자라면 알 수 있다. 테스는 외적으로는 순결하지 못한 여성이었지만 내적으로는 순결 이상의 가치를 지닌 존재였음을 나는 깨달았고 살인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증명해보인 그녀야말로 진실한 사랑의 상징이었다.
단지 그녀의 죄라면 가난 앞에서는 죄가 되어버리는 순수한 사랑을 했다는 것이다.

토마스 하디의 다른 작품 ‘이름 없는 주드’도 그랬지만 사회의 불합리한 모순에 저항하기위해 십자가를 맨 주인공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가난한 삶에 KO패 당하기만 해서 그의 이야기들은 한없이 처량하고 슬프기만 하다. 이는 그렇게 희망 없는 나락으로까지 밀어내고 존재를 소멸시킨 후에야 비로소 뭔가 부당하다는 걸 깨우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일침일지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콩달콩 연애소설보다 더 가슴이 두근대는 슬픈 이야기가 가슴을 후벼 파더니 이제는 책을 덮은 후에도 여전히 깊은 여운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큼 발랄한 문장들이 죽어가는 아이와 부모의 인생을 노래하는 이 아이러니를 어찌 설명해야할지 나는 모르겠다. 아니 그런 느낌을 설명하기엔 내가 가진 언어의 세계가 너무도 조악하고 촌스럽다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려 한다.
청춘의 뜨거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가 된 남녀가 대책 없이 아이를 세상에 내놓는다. 그렇게 청춘남녀가 살아온 열일곱 해에 생명이 되어 뱃속에 자리 잡은 아이는 세상 누구보다도 빨리 늙어버리는 조로증을 앓고 그의 부모가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때와 꼭 같은 나이인 17살이 된 자식은 신체나이 80의 노인이 되어버렸다. 늙은 소년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사라져가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꽤 늙어버렸다...(중략) 내 피부는 푸석하고 머리카락 또한 하나둘 빠지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러할 뿐 내겐 노인들의 지혜나 경험이 없었다. 내가 먹은 나이 속엔 겹겹의 풍부한 주름과 부피가 없었다. 나의 늙음은 텅 빈 노화였다.”

텅 빈 노화를 경험하는 늙은 소년은 죽음이 점점 가까워지자 부모를 위한 조그마한 선물을 준비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다름 아닌 그들의 연애사를 소설로 써서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생을 선물해준 부모의 과거를 묻고 또 물어 기록해 가는 과정은 어쩌면 이제 사라져버릴 아름이 자신의 생을 재확인하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훗날 내가 죽어 없어지더라도 이런 내가 당신들의 청춘 속에서 탄생했음을 잊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부탁은 아니었는지.
이렇게 그려진 슬픔 속에서 빛을 발하는 건 작가가 하나하나 만들어내는 멋진 문장이나 독자를 무한정 끌어당기는 이야기의 힘 뿐 만이 아니다. 사랑이야기를 재현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사랑을 경험하는 열 일곱 아름이의 풋풋한 연애감정 역시 왜 이 작가가 이리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과 응원을 받아내는지 납득할 수 있게 한다.
역시 사랑은 아파야 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아름이에게도 어김없이 이 진리는 적용되고 오히려 평범하지 않은 삶 속에서 남들처럼 똑같이 평범한 사랑을 경험하는 일이야말로 늙어가는 소년 아름이를 가장 보통의 존재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아이는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을 항상 ‘기적’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언제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뒤죽박죽의 통로를 지나간다는 것쯤은 이미 우리네 인생에서 혹은 수많은 책과 영화에서 확인해왔기에 새삼스럽지 않다. 다만 그 새삼스럽지 않은 일을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삶이 재확인시킬 때 아픔은 배가 되고 인생은 녹록치 않음을 다시금 배워가는 것이다. 에잇! 또 당했어. 어째 세상은 내 편이 아닌거야. 시발. 이라고 외쳐도 가슴이 두근대는 한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며 이 한 권의 책이 나에게 말한다.
늙은 소년은 자신이 몸만 노화되었을 뿐 삶의 경험도 지혜도 없는 텅 빈 노화일 뿐이라고 말하지만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텅 비어있는 시간과 공간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켜켜히 쌓아올린 아이답지 않은 생의 깨달음이야말로 철없는 노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정제된 삶의 언어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늙은 소년의 울음 속에서 자생된 결정체라고도 볼 수 있는...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재 스님의 이야기로 버무린 사찰음식 선재 스님 사찰음식 시리즈 1
선재 지음 / 불광출판사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 년에 서너번은 절에 가는 우리 집 식구들. 불심이 깊으신 엄마는 한 달에도 몇 번씩 절에 가시지만 바쁜 우리들은 그저 마음만으로 부처님을 모신다. 대부분의 절들은 깊은 산 속이나 공기 족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어도 한 번씩 다녀오면 몸과 마음의 피로가 단번에 풀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절에 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절밥을 얻어먹기 위함이 한 가지 더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희한하게도 절에만 가면 입맛이 돌고 그렇게 맛날 수가 없다.
많은 이들이 알듯이 절에서 나오는 밥은 진수성찬도 아니고 고급재료를 이용한 비싼 음식도 아니도. 그저 우리가 흔히 접하는 밥과 나물 한 두가지, 김치가 전부이다. 그런데도 난 그 밥이 왜 그리도 맛이 있는지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는 더 먹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우리같은 신도들은 수양하시며 소식하는 스님들이 아니기에 밥을 더 달라하면 공양주께서는 얼른 더 먹으라고 하시지만 괜히 미안한 마음에 한 그릇으로만 만족하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 그 이유를 알았다. 이 책 [선재스님의 이야기로 버무린 사찰음식]을 읽고 보니 절에서 얻어먹는 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몸도 치유해주는 명약이었던 셈이다.

사찰음식의 대가이신 이 책의 저자 선재스님은 책을 통해 사찰음식이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몸을 치유하는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그 메시지에는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지구환경에 앞장서야하는 당위성은 물론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과 선한 불교사상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담고 있어서 책을 읽는 동안 오히려 경건한 마음까지 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사찰음식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시는데 어떻게 우리몸에서 나쁜 질병을 몰아내는지, 또 이 재료로 만든 음식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는지가 함께 설명된 사찰음식 부분은 스님이 음식 하나하나에도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는지, 또 작은 산나물 하나에도 고이 깃든 생명존중의 사랑을 담고 있는지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스님 역시 간이 좋지 않아 병원에서 1년의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적이 있다는 고백에서 나는 깜짝 놀랐는데 그런 스님이 병원의 약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수양과 사찰음식을 통해 병을 완화시켰다는 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스님 자신은 이렇게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시며 자신과 같은 많은 환자들을 위해 혹은 나쁜 음식에 길들여진 채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수많은 대중들을 위해 사찰음식을 전파하는 일에 솔선수범하고 계신 것이었다. 스님에게는 자연, 바람, 물, 하다못해 작은 먼지 하나까지도 다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는 모든 것들을 귀이 여긴다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다.

“한 방울의 물도 부처님이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이라 생각하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마음으로 음식을 해야만 진정한 요리사다.”

이것이 바로 사찰음식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까지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신비스런 힘을 전달해준다. 사실 현대인들의 병은 육체보다는 마음의 병이 더 클 텐데 사찰음식으로 먼저 마음을 치유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헬프 1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는 내내 오래 전 보았던 미국영화의 잔상이 스르륵 떠오른다. 백인인 주인 남자는 채 20살도 안 되 보이는 어린 소녀를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장면이 바뀌고 여자 아이는 울고 있고 주인 남자의 아내는 소녀를 흠씬 패준 뒤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아버린다. 얼굴에 퍼런 멍이 아직 선명한 소녀는 낯선 남자의 팔에 이끌려가며 자신의 엄마에게 호소한다. “엄마, 나를 데려가지 못하게 해주세요.”
그 소녀만큼이나 까만 얼굴의 여자는 흐느끼며 소녀의 손을 뿌리치고 이내 돌아선다. 그 곁에는 똑같이 까만 얼굴을 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끌려가는 소녀를 구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옆에서 함께 영화를 보던 사촌동생이 말했다.

“아무리 영화지만 너무 불쌍하다. 잘못은 저 놈이 했는데 왜 저 여자가 쫓겨나야 돼?”
내가 대답한다. “바보야, 저 여자는 흑인노예잖아.”라고.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사촌동생이 왜 저 어린 소녀가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하는지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음을. 그 역시 정말 모르고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단지 우리는 비록 스크린을 통해 재현된 영화 속 세상이었음에도 그것이 진짜 현실이라는 걸 재확인한 것이었을 뿐.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선을 지울 준비가 된 자이다.

두 명의 흑인 가정부와 한 명의 백인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 세 명의 여성들은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려 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라는 거창한 이유는 붙이지 말자. 단지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는 세상이 이렇게 참혹하고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흑인 가정부들은 자신이 고용된 집에서 주인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빨래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며 아침마다 헝클어진 침대보를 정리해준다. 하물며 주인이 낳은 아이들에게 변기 쓰는 법 까지도 가르쳐 준다. 성공했을 때는 너무 똑똑하다는 칭찬도 잊지 않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정하고 지시하는 이는 오직 백인일 뿐이고 흑인의 얼굴을 한 가정부는 그것이 부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따라야 할 뿐이다. 게다가 집안에는 결코 섞이지 않는 두 공기가 흐른다. 백인과 흑인이라는 색깔로 구분되는 공기.
세월이 흘러 흑인 가정부를 ‘엄마’라고 부르며 사랑했던 백인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그들의 엄마와 같은 모습을 하는 백인주인이 되고 새로운 흑인 가정부를 똑같이 부리기에 여념이 없다.

아이빌린과 미니는 바로 그 가정부들 중 하나일 뿐이고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쫒겨 나도 내일 또 다시 새로운 고용주를 찾을 생각에 여념이 없는 힘없는 노동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들의 세상 저편에만 존재해야할 백인 여자가 그녀들 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누구에게나 다 보이는 흑백의 선을 무시한 채 다가와 현실을 바꾸고 싶지 않냐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 역시 어린 시절 흑인 가정부에게 양육되어 자랐지만 29년이나 자신을 키우고 살림을 해온 콘스탄틴을 하루 아침에 해고해 버린 집의 딸이었다. 이러하니 그녀의 제안이 얼마나 놀랍고 가슴 뛰겠는지 상상이 가는가?!

사실, 오랫동안 억압받아왔던 이 가정부들에게도 부당함이 뭔지, 차별이 뭔지를 느끼게 하는 억울함은 처음부터 자리잡아왔다. 다만 자라면서 그것은 밖으로 표출되면 안 된다는 걸 그들의 엄마로부터 길들여졌을 뿐이었다. 왜 이들이라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리고 세상에 대해 소리치기 시작한다. 아무 죄도 없는 흑인이 kkk집단에 의해 살해된 후 그들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자는 말에 고개를 들어 항변하기 시작하기 시작했으니까.

“기도요?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한다고요?
“다들 기도만 하면 백인들이 우리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겁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이 후 저 쪽 세상에서만 다소곳이 존재하던 그녀들이 하나 둘 백인 여자에게 이야기 한다. 그들의 삶이 어떤 진실을 숨기고 있는지를. 불안한 미래를 담보로 하면서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토로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 백인여자에게.

“내가 바라는 건 그저...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거예요.”나는 말한다. “하지만 이 일을 백인 여자가 한 다는 건 유감스럽네요.”

가해자는 피해자의 상처가 어떻게 곪아있는지 왜 그런 상처를 입었는지 잘 모른다. 그것이 상처인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려는 스키터에게 그녀의 남자친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묻는 것을 보면 이것이 왜 문제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말한다.

“문제를 일으키려는 게 아니야, 스튜어트. 문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어.”

그렇다. 이것이 정답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종차별의 심각함을 문제라고도 인식조차하지 못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 시작이다. 당신과 나의 세상에 이만큼의 거리와 경계선이 왜 부당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 출발점임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난 아직도 이 세상 곳곳에서 각각의 모습으로 변형된 채 존재하는 차별의 벽을 느끼지 못하는 당신과 어리석은 나에게 이 책을 바치려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 - 셰익스피어에서 헤밍웨이까지 작품으로 읽는 문학 독법
해럴드 블룸 지음, 윤병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벌써 3년째다.
책을 읽고 리뷰라는 형식 속에 조금씩 끄적거리는 습관을 갖게 된지. 처음에는 간단히 몇 줄 안 되는 솔직한 감상들을 즉흥적으로 써대기 시작했고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저 이 책은 읽기 쉽고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 듯하니 좋은 책같다라는 지극히 단순명료한 평들이었으니까. 그러하니 리뷰라는 걸 쓰는 게 하나도 어렵거나 힘들지 않았는데 점점 시간이 흘러 같은 책을 읽고 쓴 타인의 멋드러진 리뷰를 접할 때면 나의 짧은 감상이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이제 나의 리뷰도 업그레이드 시켜야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 나도 저렇게 제대로 된 리뷰를 써야 되는데, 혹은 나도 저 사람처럼 느꼈는데 글로 표현이 안된 것이구나 싶은 그런 생각들을 수도 없이 하면서.

그래서 본격적으로 서평다운(?) 서평을 쓰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노력과 진심이 조금은 통했는지 조그마한 서평대회에서 수상도 하고,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을 해 책을 보내주시기도 한다. 이렇다보니 이제는 내 글에 대한 책임감도 생기고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일이 점점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해 좌절감을 만나는 일도 많아지는 날들이다.
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했는데 단지 그 느낌을 제대로 글로 풀어쓰기가 어렵다면 그나마 성공한 독서이지만 ‘최고’라고 찬사를 받는 책을 읽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거나 도대체 저자가 하는 말이 뭘까 감도 잡지 못할 때는 책을 씹어 먹어버리고픈 생각까지 들었다.
이럴 때 누군가 명쾌하게 작품을 해설하고 비평한 책을 보면 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양 황홀감에 취해 기존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해롤드 블룸의 독서기술]은 책 읽기의 목적과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주었고 더 나아가 어렵게만 느껴지던 고전에 도전할 용기를 주는 고마운 책이다.

  사실, 지난 2월부터 활동하는 책 카페에서 ‘고전읽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한 달에 한권씩 읽고 있는 중인데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고전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고전을 통해 나는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한 것이다. 유명한 인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이 책의 저자는 고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책 읽기의 즐거움이란 타인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튼튼하게 하고 진정한 관심사를 깨닫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저자의 책 역시 고전을 읽는 문학 독법에 대한 내 스스로의 관심사를 통해 지적욕구를 채우는 이기적인 행위가 바탕이 된다는 사실만보더라도 그의 말에 수긍이 간다. 내 관심과 취향에 따라 선택된 책을 통해 또 다른 미지의 것을 알아가는 과정, 그리고 더 나아가 나만의 지식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 이르렀을 때 맛보았던 ‘독서의 즐거움’은 나에게 있어 책을 읽는 목적이자 동기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해럴드 블룸과 내가 느끼는 ‘독서의 즐거움’이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 결코 쉽지가 않다. 저자는 책에서 고전작품 60여 편을 선별하여 우리에게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었는데 가볍게 술술 읽어나가기에 좀 버겁기는 하다. 그가 풀어내는 지적사유의 결정체와 고전문학의 바다에서 헤엄치다보면 어느 새 방향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으니까. 아니 방향만 찾지 못했다면 다시 바른 길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내 지식의 한계는 어느덧 막다른 골목에서 멈추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에 저자의 독서 안내를 힘겹게 쫒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게다가 그가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고전작품들은 아직 반의반도 접하지 못한 글들이기에 그의 문학비평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로 책 페이지만 의미 없이 넘겨버린다. 차라리 소개된 60편의 고전작품들을 한 번씩이라도 접했다면 이리 막막하지는 않았을텐데하는 마음에 심란한 마음이 삐죽 솟아오르지만 때때로 저자가 전하려는 이야기가 완벽하게 이해 되었을때의 기쁨은 또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발자크와 디킨스의 천재성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파리와 런던을 인물들로 가득 채우고 그들에게 기이할 정도로 인상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각양 각층의 사회적 계급을 부여하는 일’이라고 서술했는데 이 부분에서 어찌나 공감이 되던지 얼마 전에 읽었던 디킨스의 작품들이 새삼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디킨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이름, 성격, 사회적 위치와 직업등이 너무도 혼란스러워 인물관계도까지 그려가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또 그 책의 리뷰를 쓰자니 하나같이 중요하고 독특한 등장인물들이 너무도 많아 모두 언급하지 못하는 점을 못내 아쉬워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디킨스의 천재성이 바로 이 부분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런 고생들이 괜한 것들이 아니라, 바로 그의 작가적 역량을 드러내보였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또한 소설가로만 알고 있었던 ‘폭풍의 언덕’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서정시를 소개한 부분에서는 시인으로서의 에밀리를 만나는 색다른 즐거움도 맛보는 한편, 여전히 나에게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힘겹게나마 한 발 다가선 충만감이 전해져왔다. 이렇게 작가는 단편, 시, 장편, 희곡등을 넘나들면서 실로 방대한 지적유희를 제공했는데 독자들은 여기에서 멈추면 안된다. 그의 이야기들을 즐겁게 듣는 한편, 작품 날것 그대로를 독자 스스로가 자신만의 언어로 재해석해 만들어내는 ‘창조적 오독’의 단계를 꿈꾸라는 것이다. 문학작품에서는 절대 진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의 문학 수업을 뛰어넘는 나만의 새로운 오독(誤讀)작업, 이것이 내가 이 책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 통해 얻은 특별한 독서법이다.
어쩌면 앞으로 난 좀 더 과감히 문학작품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