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1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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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오래 전 보았던 미국영화의 잔상이 스르륵 떠오른다. 백인인 주인 남자는 채 20살도 안 되 보이는 어린 소녀를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장면이 바뀌고 여자 아이는 울고 있고 주인 남자의 아내는 소녀를 흠씬 패준 뒤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아버린다. 얼굴에 퍼런 멍이 아직 선명한 소녀는 낯선 남자의 팔에 이끌려가며 자신의 엄마에게 호소한다. “엄마, 나를 데려가지 못하게 해주세요.”
그 소녀만큼이나 까만 얼굴의 여자는 흐느끼며 소녀의 손을 뿌리치고 이내 돌아선다. 그 곁에는 똑같이 까만 얼굴을 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끌려가는 소녀를 구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옆에서 함께 영화를 보던 사촌동생이 말했다.

“아무리 영화지만 너무 불쌍하다. 잘못은 저 놈이 했는데 왜 저 여자가 쫓겨나야 돼?”
내가 대답한다. “바보야, 저 여자는 흑인노예잖아.”라고.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사촌동생이 왜 저 어린 소녀가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하는지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음을. 그 역시 정말 모르고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단지 우리는 비록 스크린을 통해 재현된 영화 속 세상이었음에도 그것이 진짜 현실이라는 걸 재확인한 것이었을 뿐.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선을 지울 준비가 된 자이다.

두 명의 흑인 가정부와 한 명의 백인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 세 명의 여성들은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려 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라는 거창한 이유는 붙이지 말자. 단지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는 세상이 이렇게 참혹하고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흑인 가정부들은 자신이 고용된 집에서 주인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빨래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며 아침마다 헝클어진 침대보를 정리해준다. 하물며 주인이 낳은 아이들에게 변기 쓰는 법 까지도 가르쳐 준다. 성공했을 때는 너무 똑똑하다는 칭찬도 잊지 않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정하고 지시하는 이는 오직 백인일 뿐이고 흑인의 얼굴을 한 가정부는 그것이 부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따라야 할 뿐이다. 게다가 집안에는 결코 섞이지 않는 두 공기가 흐른다. 백인과 흑인이라는 색깔로 구분되는 공기.
세월이 흘러 흑인 가정부를 ‘엄마’라고 부르며 사랑했던 백인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그들의 엄마와 같은 모습을 하는 백인주인이 되고 새로운 흑인 가정부를 똑같이 부리기에 여념이 없다.

아이빌린과 미니는 바로 그 가정부들 중 하나일 뿐이고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쫒겨 나도 내일 또 다시 새로운 고용주를 찾을 생각에 여념이 없는 힘없는 노동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들의 세상 저편에만 존재해야할 백인 여자가 그녀들 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누구에게나 다 보이는 흑백의 선을 무시한 채 다가와 현실을 바꾸고 싶지 않냐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 역시 어린 시절 흑인 가정부에게 양육되어 자랐지만 29년이나 자신을 키우고 살림을 해온 콘스탄틴을 하루 아침에 해고해 버린 집의 딸이었다. 이러하니 그녀의 제안이 얼마나 놀랍고 가슴 뛰겠는지 상상이 가는가?!

사실, 오랫동안 억압받아왔던 이 가정부들에게도 부당함이 뭔지, 차별이 뭔지를 느끼게 하는 억울함은 처음부터 자리잡아왔다. 다만 자라면서 그것은 밖으로 표출되면 안 된다는 걸 그들의 엄마로부터 길들여졌을 뿐이었다. 왜 이들이라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리고 세상에 대해 소리치기 시작한다. 아무 죄도 없는 흑인이 kkk집단에 의해 살해된 후 그들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자는 말에 고개를 들어 항변하기 시작하기 시작했으니까.

“기도요?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한다고요?
“다들 기도만 하면 백인들이 우리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겁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이 후 저 쪽 세상에서만 다소곳이 존재하던 그녀들이 하나 둘 백인 여자에게 이야기 한다. 그들의 삶이 어떤 진실을 숨기고 있는지를. 불안한 미래를 담보로 하면서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토로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 백인여자에게.

“내가 바라는 건 그저...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거예요.”나는 말한다. “하지만 이 일을 백인 여자가 한 다는 건 유감스럽네요.”

가해자는 피해자의 상처가 어떻게 곪아있는지 왜 그런 상처를 입었는지 잘 모른다. 그것이 상처인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려는 스키터에게 그녀의 남자친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묻는 것을 보면 이것이 왜 문제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말한다.

“문제를 일으키려는 게 아니야, 스튜어트. 문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어.”

그렇다. 이것이 정답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종차별의 심각함을 문제라고도 인식조차하지 못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 시작이다. 당신과 나의 세상에 이만큼의 거리와 경계선이 왜 부당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 출발점임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난 아직도 이 세상 곳곳에서 각각의 모습으로 변형된 채 존재하는 차별의 벽을 느끼지 못하는 당신과 어리석은 나에게 이 책을 바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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