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브라-샤틸라 난민수용소에서 3,000여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팔랑헤당 민병대원들에게 무참히 학살되자 가족을 잃은 노인이 오열하고 있다.>


두 개의 이스라엘과 세 개의 팔레스타인
- 팔레스타인 수난사

 
유엔의 이스라엘 만들기

중동에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정식으로 수립된 것은 1948년이지만 이스라엘이 아랍에 뿌리를 내리려는 작업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시온주의 단체들에게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 '민족국가' 수립을 인정한다고 선언한다. 1920~22년까지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했는데, 1947년 비로소 유엔 결의안 181조가 채택된다. 이는 예루살렘 시를 국제화하는 내용이었는데, 유대 국가와 아랍국가의 동시 수립을 염두에 둔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바로 181조이다.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지금도 예루살렘 문제에 관한 국제적 판단의 준거가 되고 있다. 유엔의 분할안은 예루살렘이 가지고 있는 성지로서의 중요성으로 인해 "별도의 지위"를 누리고, 국제적으로 관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국제적'이 아니라 '국내적'인 지역이라는 사실은 머지 않아 밝혀졌다. 1949년에 휴전선에 분리벽이 설치되면서 옛 예루살렘의 동쪽은 아랍 국가들의 통치 아래, 서쪽 지역은 이스라엘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1950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서쪽을 자국의 수도로 선포한다.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인의 갈등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멀쩡한 나라를 둘로 쪼개 유대 국가에게 준다는 것은 주권국가에게는 가장 비참한 일이기 때문이다. 1948년 시작된 갈등은 이듬해 정전으로 잠시 멈추지만, 이 과정에서 70~80만 명의 피난민이 생겨 인근의 아랍 국가들로 이주한다. 상황이 이와 같은데 나라가 멀쩡할 리가 없다. 1950년 시나이 서안이 요르단 하심 왕국에 병합되고,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통치를 받게 된다.

고단한 팔레스타인의 국제사

1967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동쪽을 불법적으로 병합하는 동시에,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통치권을 행사한다. 같은 팔레스타인 인이라도 사는 곳에 따라 다른 신분이 된다.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정의 지배를 받으며, 예루살렘 동쪽의 팔레스타인 사람들만이 "영주권자" 자격이 주어진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데 그것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더욱 해결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즉 1957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동쪽을 합병한 사실과, 이후 "대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비난하면서도, 철수를 요구하지는 않음으로써 사실상 예루살렘 서쪽에 대한 "이스라엘화"를 인정한 셈이다.

결국 국제사회로부터 이스라엘 영토는 웃지 못할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예루살렘 서쪽은 '이스라엘 영토'로, 또 예루살렘 동쪽은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로 간주한다. 이 두 지역의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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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곳'에 있었다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책을 출간하겠다던 출판사 관계자와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의 제목도 <바시르와 왈츠를>(WALTZ  WITH  BASHIR, 2008). 책의 부제를 붙여달라는 것이 영화를 공짜로 보여주는 조건이다. 그가 붙인 부제는 "지옥으로 내몰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였다. 이스라엘인이 저지른 팔레스타인 학살사건이 주제인 이 영화는 얼핏 들으면 현실과 겹친다. 택시를 타고 영화관으로 가는 길에, 나는 최근에 보았던 기사를 바탕으로 부제를 마구 뱉어냈다. "팔레스타인, 죽음이 고통의 끝은 아니야."나 "홀로코스트는 전염된다, 팔레스타인" 따위의 부제를 떠올리며 왜 이것이 부제가 되어야 하는지 마구 떠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자 앞서 언급했던 부제들이 쏙 들어갔다. 나는 순간 <바시르와 왈츠를>이 예술작품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 같다. 예술작품은 특정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 점점 거대한 역사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이 현실과의 차이점일 것이다. 이 '예술작품'에서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개인은 아리 폴만(Ari Folman) 감독 자신이다. 26마리의 개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었다는 친구(보아즈 레인 부스키라)의 이야기가 아리 폴만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그런데 폴만은 친구의 '개꿈'이 왜 자신의 잊힌 꿈을 일깨웠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꿈이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친 것이거나, 내가 꿈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것이리라. 그는 절친한 정신과 의사 친구 오리 시완으로부터 이론적인 도움을 얻는다. 즉

"기억은 역동적이야.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우리의 정신은 가끔 아주 세세한 일을 놓치기도 해. 하지만 도저히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블랙홀 같은 공간을 품고 있기도 하지."

그는 기억을 복원해줄 친구를 찾으라고 조언을 해준다. 나는 아리 폴만이 일종의 '폭풍의 눈'을 머금고 있다고 느꼈다. 폭풍의 테두리에는 엄청난 비바람과 천둥이 내려치지만 폭풍의 눈에서는 고요한 적막과 함께 공포심만 배양된다. 아리 폴만이 기억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레바논이 아니라, 서부 베이루트만이 아니라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3,000여 명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는데 대부분이 노인과 어린이들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아무도 일어나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화는 주인공이 기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20년 전의 학살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며 사건의 핵심으로 도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의 훼손된 기억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사람들도 사실은 '그 사건'에 관한 기억이 훼손된 상황이었다. 잠재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이다.

'법정의 기록은 어느 누구의 소설보다도 스릴이 풍부하다. 왜냐하면 예술이 손을 대기 꺼려하거나, 또는 겉으로밖에 손을 대지 않는 인간 영혼의 암흑면에 빛을 던져 밝혀 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키)

그런데 주인공이 왜 훼손된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가 불분명하다. 예술작업 안에 정치적 논쟁이 끼어들었다는 의혹이 들기 충분하다. 좀 안 좋게 말하면 '민피용' 영화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유대인이 미국의 금융계뿐만 아니라 예술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이 2009년 오스카에서 수상할 것이 유력하리라는 주장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주인공의 꿈처럼 모호한 영화의 메시지가 아무리 아쉽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를 꼭 보아야 하는 이유는 이런 식의 전쟁영화, 특히 중동을 다룬 영화가 전무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사브라', '샤틸라'라는 검색어를 입력해 보았다. 나 역시 생전 처음 듣는 용어였다. 전두환 시절의 일이다. (1982년) 하지만 검색어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3년도 안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작품이 당시 학살에 관한 거의 유일한 정보다. 지저분한 정치적 거래가 어린 인권을 마음껏 살육한 충격적인 사건을 신문기사나 논픽션이 아니라 예술작품으로 처음 맞게 된 것은 일반독자로서 어쩌면 행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제작비 문제 때문인지 숏컷이 충분치 않아 동작이 부자연스러웠지만 영상은 눈을 즐겁게 하기 충분했으며 영화 안에서 만나게 되는 음악들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동시에 전쟁에 관한 허무하고 일상적인 메시지를 강하게 쏟아냈다. 그리고 현실을 조롱하는 듯한 패러디 영상이 질 높게 펼쳐졌다.
이 영화가 전쟁에 대해서 보여준 관점이 무척이나 깊이가 있었다. 그것은 감독이 전쟁의 한가운데를 살아왔으며 전쟁을 일상처럼 느끼는 상황이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의 전쟁영화는 전쟁을 '신비'로 다룬 반면, 이 영화는 '현실'이자 '일상'으로 다뤘다. 그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전쟁은 이미 일상이 돼 버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감독의 선언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읽혔다.

영화가 끝난 후 방청객을 봤을 때는 또 다시 충격을 받았다. 방청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켠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자막이 내려갈 때까지 나를 포함한 방청객들은 먹먹한 마음으로 자막이 약속된 장소까지 행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영화가 끝나고 그 출판관계자와 맥주를 마시며 나는 그가 원하는 카피를 내놓지 못했다. 이슬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중동의 복잡한 정치사, 사브라 샤틸라 학살 사건 등 이 모든 것들이 생경할 수밖에 없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카피를 써달라는 '값싼' 조언만을 해줄 수 있었다. 당신은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카피를 생각하겠는가?


▲ 87분짜리 러닝타임을 120여쪽으로 압축해서 보았다. 같은 그림을 쓰고 있지만 읽는 맛은 달랐다. 영화에서 내가 캡처한 장면과 비교하면서 읽었더니 재미가 쏠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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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지지율 80%의 대통령

대통령 취임 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인다면 소심하고 의심 많은 시민은 일방주의가 되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들 중에 오바마가 일방주의 정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하버드 로 스쿨에서 법률비평 편집장을 할 때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을 할 때도 정적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정적들을 요직에 앉히거나 존중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편을 많이 만들었다.

오바마니아는 2002년의 노사모와 유사하게 보일 수 있다. 온라인이 강했으며, 아래에서부터 세력을 형성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왠지 노무현과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한다. <만화 미국사>를 보지 않았더라면 이것이 막연한 상상에 그쳤겠지만, 하워드 진의 책을 읽고 오바마는 다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외친 통합이라는 말이 힘을 얻는 이유는 그의 피가 매우 많은 인종들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이며, 그가 한미FTA에 대해서 노동자의 문제를 이유로 반대를 한 것에 신뢰가 가는 것은 미국의 국익도 국익이지만 평생 노동자와 함께 살아온 것 때문이다.

오바마의 정신적 계보 - 흑인 민권운동의 두 거목



▲ 영화 말콤X의 한 장면



오바마에게는 2명의 선구자가 있는데 흑인 민권의 상징인 마틴루터 킹과 다소 과격한 흑인 민족주의를 표방한 말콤 X다. 말콤 엑스는 비폭력적 흑인 인권을 주장한 마틴 루서 킹 2세와 달리 흑인들의 현실과 분노를 그대로 뱉어낸 연설로 흑인 인권운동에서 명성을 쌓는다. 그는 마틴 루서 킹 2세를 '흑인의 탈을 쓴 백인'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오바마의 정신적 계보는 마틴 루터 킹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오바마는 다양한 인종이 결합돼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주기 적격이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정체성의 혼란에 시달려야 했다. 외조부모의 집에 머무르던 당시 오바마는 인종문제로 정체성 갈등을 겪었다. 농구에 미쳤고 술과 담배, 마약에도 손을 댔다. 어두운 경험은 말콤 엑스 등 대부분의 흑인 지도자들이 겪는 통과의례인 듯하다. 맬컴 엑스도 당시 하류층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생활과 함께 범죄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21세에 그는 강도죄로 투옥되었으며, 옥중에서 이슬람 신앙에 귀의하게 된다.

오바마의 당선 때문에 나는 <말콤 엑스>라는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오바마를 이해하는 두 가지 키워드, 노동운동과 반전운동

미국의 역사적인 노동운동 사건을 꼽으라면 풀먼 파업을  들 수 있는데 악덕자본이 백인 노동자들을 인디언이나 흑인처럼 천대하던 지역이 바로 풀먼 신도시였다. 유진 빅터 뎁스는 미국철도노동조합의 젊은 지도자로 활약했는데 1893년 경제불황과 공황기에 미국 철도노동조합을 결성했고, 1894년 풀먼사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주도했다. 풀먼 노동자의 외침이 우리의 실정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1893년 5월에서 9월 사이에 우리의 임금을 다섯 차례나 삭감했습니다. 그래도 집세는 그대로입니다. 그는 고용주로서 우리에게 돈을 지급해놓고 집주인으로서 그 돈을 다시 가져가 버립니다."

 

▲ 1893년 풀먼사 파업 당시 사람의 논물로 목욕을 하는 해골들의 춤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한 세기 뒤 이 현상은 '바닥을 향한 경주(국가나 기업 간의 과다경쟁이 빈곤층을 만든다는 이론)이라고 달리 부르게 되었고, 월마트의 사업모델이 되기도 했다. (만화 미국사, 32쪽)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전쟁을 크게 그리고 빈번히 일으키는 나라이며, 전쟁을 비즈니스로 다룰 줄 아는 몇 안 되는 국가다. 그야말로 '전쟁전문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전문국가'는 그 반대의 방면으로도 트이게 된다. 미국은 대표적인 '반전운동'의 국가이기도 하다.

호전이라는 것은 국가주의와 상업주의가 묻어 있다. 인간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으로 몸을 가린다. 하지만 전쟁 앞에 맨몸을 드러낸 것이 바로 반전이다. 반전은 전쟁의 참상과 전쟁에 발가벗겨진 인간을 그대로 드러낸다. 전쟁만큼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은 없으니까. 오바마가 이라크에서 발을 빼기는 어렵겠지만, 오바마에게 있어서 이라크에서 발을 빼기보다 더 어려운 일은 전쟁을 비즈니스로 삼거나, 전쟁을 일상화하는 일이다. 오바마의 반전메시지가 얼마나 넓게 확산될지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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