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영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특히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느니, 무슨 상 후보로 올랐느니 하는 수식어가 붙은 영화도 그리 흥미를 두지 않는다. 그런데도 개인적으로 유독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만은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스스로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영화였기에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유대인 게토를 청소(?)하는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바흐의 피아노곡은 참혹한 학살의 이미지와 묘한 대비를 이루며 기억 속에 오랜 시간 각인돼 있었다. 캄캄한 밤공기를 가르는 처참한 비명과 반복적인 총소리 그리고 피아노곡이 만들어 내는 비현실적인 무대는 인간 내면에 흐르고 있는 학살의 공포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場)이었다. 2차 대전이 만든 살육의 무대 그것이 바로 유대인 홀로코스트였던 것이다.
레바논. 베이루트 서부. 1982년 9월 16일. 사브라와 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촌.
다시 학살의 무대가 세워졌다. 나치를 대신한 팔랑헤당 민병대와 이스라엘군, 유대인의 자리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번엔 바시르라는 인물이 원인을 제공하고 바시르와 왈츠를 추던 이스라엘의 묵인아래 참담하고 야만적인 학살의 축제가 벌어진 것이다.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은 모두 떠나고 난민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이들과 부녀자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아무런 저항수단이 없는 이들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의 장(場)은 이스라엘과 바시르의 왈츠를 배경으로 베이루트 서부에서 무대에 올려진 것이다.
20년 전 학살의 현장에 섰던 아리가 끔찍했던 그 날의 기억을 잊어버린 이유는 무엇이고, 그가 기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 『바시르와 왈츠를』은 주인공 아리를 통해 팔레스타인 난민학살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망각과 침묵의 방관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저지르는 야만적인 학살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럴 때 마다 사람들은 학살을 규탄하고 숭고한 인간애를 이야기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망각의 늪에서 침묵하게 된다. 아니 기억자체에서 지워버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래서 야만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팔랑헤당 민병대가 학살을 자행하는 동안 조명탄을 쏘아 올렸던 아리는 과연 학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얼마 전 폭격 속에서 죽어간 가자의 아이들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야만의 무대에서 우린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는 것일까? 작품 해설에서 김재명 기자가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바시르와 왈츠』를 과 같은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수는 없는 걸까? 그래서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피로 얼룩진 학살의 과거를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없는 걸까?
잃어버린 학살의 기억을 되찾았음이 학살을 방조한 책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리고 반복되는 야만의 고리를 끊어내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 인간이라면 누구나 전쟁과 학살에 대하여 인간 본연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갑자기 작은 손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어요. 소년의 손인지, 소녀의 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돌무더기에서 삐쭉 튀어나와 있었어요. 그리고 다시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보였어요. 아니 그것은 먼지에 뒤덮인 곱슬머리를 한 사람의 머리였어요. 손 하나와 머리 하나. 그 소녀는 내 딸 또래였어요. 내 딸도 그 소녀처럼 곱슬머리였거든요.”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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