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이사'의 경험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쓰라린 추억이 많을게다. 자기집. 혹은 가족 누군가의 이름으로 된 집이 있다면 더 이상 해마다 오르는 월세,전세 걱정과 집을 구하러 거리를 나다니는 설움을 겪지 않아도 될 터이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집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한지는 고향집을 떠나 객지에 나와 생활하는 모두가 한 번 이상은 경험해 보았으리라. 그만큼 '이사'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추억은 신산스럽고 심란하다. 물론 나 역시 그러하다.
아버지는 평생을 당신의 이름으로 집 한채 갖지 못하셨다. 한때 형편이 좋았던 시절에는 조금 더 큰 집을 사리라 미뤄두었고 결국엔 일도 집도 다 멀어져버렸다. 그 아버지의 아들과 가족들 역시 더 말해 무엇하리오. 이런 모습은 70,80년대를 지나온 4,50대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모습이리라. 한 해, 길면 두 해 살다가 다른 집을 찾아 이사를 가고 그 이사가는 집은 전보다 어딘가 부족한 곳이고….
그렇게 중학교 1학년부터 시작된 우리 가족의 이사도 어머님이 돌아가시던 대학교 2학년, 단칸방 생활에서 밑바닥의 정점을 찍더니 그러고도 두어 차례 더 '짐쌈'과 '떠남'이 있었고 그리고도 몇 년이 훌쩍 더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우리집'이라는 곳에 안착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10년전 여름, 처음 이사온 목욕탕에서 샤워기에서 흐르는 찬물에 몸을 씻고 -이것도 처음!- 거실 마루에 큰 大자로 누웠을 때, 그 때는 정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이제는 옮겨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이제는 우리 집에서 - 비록 갚아야할 융자금이 있더라도 - 착실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 기분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부자였다.
Ⅱ.
[프란시스코의 나비] 라는 책을 읽는다. 오래전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성 프란치스코](지금 확인하여보니 [성자 프란체스코 1,2]로 바뀌었다.)를 감동적으로 만난 기억이 있어 [나비]가 그 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관련이 있는 줄 알고 선뜻 손에 든 책이었다.
하지만 이 책, [나비]에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꾸지만 현실은 누구못지 않게 팍팍한 아이, 프란시스코=판치토네 가족의 불법 이주민 가족史가 담겨있다. 계절을 따라 옮겨다니며 봄(5~8월)에는 딸기 수확, 여름(8~10월)에는 포도 수확, 겨울(11~1월 말)에는 목화 수확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불법 이주민 가족의 삶에서 행복이란게 가능할까? 기쁨이란 게 무엇인지 알 수나 있을까?
남북전쟁시절 흑인노예들의 일을 대신하며 막사 같은 집에서 살아가는 3D업종 종사자, 지금 우리네 현실 속의 조선족, 동남아에서 넘어온 외국인 노동자들 같은 역할을 판치토네 가족 같은 불법 이민자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꿈과 인권이 이뤄지는 나라 미국에서…. 그리고 그들의 삶은 아니나 다를까 짐작하는 것 그 이상 비참하다.
약간 상해서 버린 채소나 과일들을 찾아오면 엄마는 썩은 부위를 칼로 잘라내고 정육점에서 얻어 온 뼈와 썪어서 수프를 만들어주셨다. 엄마는 정육점 아저씨에게 개에게 먹이려고 한다고 거짓말을 하셨다. 하지만 정육점 아저씨는 그 뼈를 우리 가족들이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엄마가 정육점에 갈 때마다 아저씨는 뼈에 고기 살점이 점점 더 많이 붙어 있는 것을 주셨다. (93)
악다구니 같은 생활 속에서도 주인공 아이 프란시스코=판치토는 누에가 나비가 되는 꿈을 놓지 않는다. 엄마와 아빠도 가능하면 못배운 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하여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 비록 몇 개월 뒤면 다른 곳으로 쫓기듯 옮겨가지만 그래도 그들은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오늘은 그냥 이것으로 저녁을 때워야겠구나. 도저히 저녁식사에 신경 쓸 기운이 없단다." 엄마는 미안해하시며 말씀하셨다. "괜찮아요,엄마." 나는 콩이 든 냄비를 불에 얹으면서 말했다. (68)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주인공의 밝음이다. 지치고 좌절하고 치일만도 한데 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주어진 세상을 담담히 받아들일 뿐 투정하거나 포기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의 곁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기 때문이리라. 힘들어도 먹을게 적어 주릴지라도 아빠와 엄마, 형과 동생이 있음으로 프란시스코는 언젠가는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이리라.
그리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그네들보다 어렵고 힘들어도 사람이 갖추어야할 자존심은 결코 꺽지 않는 그런 이들도 있기에 아이는 더 굳건하게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중간에서 자신들을 착취하는 관리자가 또 다른 이들의 착취의 도구로써 이용하려고 하자 함께 일하던 누군가는 쫓겨날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보다 아이에게 더 좋은 교육이 어디 있으랴?
"그 자식이 내 돈을 뺏을 수도 있고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옳지 않은 일을 강제로 시킬 수는 없어. 인간의 존엄성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는 거라고.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153)
그렇다.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선을 끝끝내 지켜내는 일은 힘이든만큼 값어치가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이 책의 처음부터 프란시스코의 아버지가 양심을 속이면 안된다고 못을 박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까닭도 그러하리라. 그리고 끝내는 이민국에 적발되어 끌려가는 가족들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리지만 그들은 쉬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기에 다시 일어서 돌아올 것임을 믿게된다. - 그리고 실제 주인공은 돌아와 마침내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후일담>에 등장한다.!>
마땅히 박수 칠고 기뻐할 일이다. 그나마 살던 집에 불이나서 모든 걸 잃어버렸을 때에도 엄마는 이야기한다. '너의 마음속에서, 너의 기억 속에서 잊지 않는다면 어떠한 것도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이 힘이 그들을 버팅기게하는 희망의 뿌리가 되는 믿음이리라.
"그래, 네 수첩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면 그건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란다." (181)
Ⅲ.
문득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가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그에게 있어 '가난은 구원의 특별한 방법이며, 겸손의 근원이며, 모든 완전함의 뿌리이며, 결실은 보이지 않으나 풍성한 밭에 감추어진 보물과 같은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 가난으로 인하여 더욱 풍성해지는 삶이 있음을 무조건 믿어야만 하는걸까?
하지만 그는 예수처럼 살다간 성인이고 우리는 평범한 속인일 뿐. 가난 그 자체를 통하여 희망을 발견하고 하루를 견뎌나가는 것은, 우리에게 힘겹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 것도 아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었든 '나비 프란시스코'의 성공담을 믿으며 지지를 보낼 뿐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세상에는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거리에 있을 것이고 우리가 항상 <나그네나 순례자>처럼 살 수는 없어도, 그들곁으로 조금이라도 다가서는 그런 삶을 살아야하리라 다짐해본다. 조그마한 목소리로, 손내밀며, 함께 가자고......
2009. 3. 10. 새벽, 아직도 이사는 계속됩니다.
들풀처럼
*2009-074-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