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적인 언론인 구속에 대한 신문의 상반된 보도
YTN 노조위원장 구속, MBC PD수첩 제작진의 긴급체포와 압수수색 보도를 들으면 YTN과 MBC가 중죄라도 지은 것처럼 보인다.
YTN 노조위원장 구속은 언론보도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정부가 언론장악을 위해 낙하산 사장을 임명한 데 대해서 내부자로서 이의를 제기한 것이 구속 사유이다. 때문에 언론에 대한 탄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경향신문이나 한겨레 등 진보적인 매체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 언론자유를 명시한 헌법을 무시한 처사라며 반발하고 있다.
PD수첩 제작진을 구속한 데 대해서 반대하는 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2008년 5월부터 촛불집회가 대대적으로 펼쳐진 것은 PD수첩이 왜곡보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부가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 협상을 비밀리에 하면서 국민의 건강권을 훼손하였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보도를 한 것은 정당하였다는 판단이다.
정당한 이유는 대통령이 부실협상에 대한 부분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두 번이나 국민 앞에서 사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미국에서도 다우너라 불리는 주저앉는 소를 도축 과정에서 완전히 제외하는 법을 마련했다. PD수첩이 문제제기한 부분을 정책에 반영한 것이다. 이런 정황을 살펴볼 때 PD수첩의 보도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서 반대하는 측의 논거는 뭘까?
조선일보는 3월 27일자 보도에서 PD수첩 제작진의 구속 소식을 전하며 “국민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불러 일으킨 것에 대해 누군가는 사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이른바 ‘보수단체’ 관계자의 발언을 실었다. 그리고 “오역과 과장 보도로 ‘미국 소=광우병 소’라는 인식을 퍼뜨렸고, ‘촛불집회’의 도화선이 됐다는 비판을 받아왔다”며 방통심의위원회의 징계, 농림수산식품부의 반론보도 청구 소송 일부 승소 등을 언급하였는데, 이 보도를 보면 PD수첩 제작진이 악의적인 보도를 통해서 국민여론을 호도했다고 믿게 된다. 조선일보 등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대체로 추상적이거나 정치적이어서 토론할 거리를 좀처럼 찾기 어렵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고 있으니 특별한 권위를 차지한다.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일까? 조선일보를 보는 독자들이 바보는 아니다. 조선일보 전체 독자가 실제로 200만 내외라고 할 때 이들 핵심 독자의 숫자는 약 40~60만 정도(20~30%)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정보와 지식, 의사 결정권과 재산 등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는 이른바 파워엘리트이자 오피니언 그룹이다. 파워엘리트들이 조선일보에 고급 정보를 제공하고 나아가 조선일보가 설정하는 아젠다의 중요한 지지층이 되며 조선일보가 제공하는 상품 및 서비스의 수요자가 되기 때문에 조선일보가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언론은 쟁점을 드러내 보여줄 뿐 쟁점에 대한 판단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철학자들의 논거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우리는 평생 사슬에 묶여 동굴에 갇혀 있다 - 플라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평생 사슬에 묶여 동굴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벽에 생긴 그림자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동굴인의 모습을 그린다. 현실을 깨달으려면, 그래서 참된 존재를 알려면 동굴 사람은 과감히 떨쳐 일어나 밝은 빛을 이기고 눈을 크게 떠야만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모사된 거짓 현실의 차갑고 음습한 편안함에 안주하며 동굴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 드림위버(125쪽)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동굴에 갇혀 있는 한 진실과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한다. 진실을 가리는 동굴이란 우리가 밝은 눈을 뜨지 않고 남이 만들어준 터전 위에서 안일하게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것을 유시민은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용어로 정리했다. 즉 우리들은 헌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노동3권을 획득했으며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5.18민주화투쟁과 6.10민중항쟁 당시 많은 탄압을 받았던 선배들이 만들어주 공간에서 호의호식하며 그 때의 경허을 망각하는 사이에 우리들의 민주주의라는 카드계산서가 날아온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언론은 민주주의의 조문객이 된다. 언론은 방대한 정보를 매일같이 배출해내는데 보드리야르는 이들 정보가 의사소통과 사회적인 것을 삼켜버린다고 한다. 언론은 여론을 생성하고 건강한 사회적 토론을 통해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언론정신은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박제된 허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 정보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연출만 하면서 소진하고, 의미도 역시 생산이 아니라 연출만 하면서 소진해 버린다. 결국 의사소통과 의미는 다 없어지고 남은 것은 연출된 허상뿐이다. 예컨대 광우병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보다는 장관이 사퇴한다든가 이를 방송한 방송사 제작진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희생량을 만들어가며 점점 문제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이 언론의 생리라는 것이다.
상방된 언론기사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척도는 '의심'이다. 그러니까 언론탄압에 관한 위의 두 기사를 모두 의심하고 기정사실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철학이 주는 교훈이다. 프랑스의 계몽철학자 볼테르는 "의심하는 것도 즐거운 상태는 아니지만 확신한다는 것은 더욱 말도 안 되는 엉터리다."라고 말했다. 의심을 하는 것은 지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