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은 미 제국주의 역사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학창 시절 결코 나에겐 미국이 제국주의가 아니었다. 그 당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남산의 한 구석으로 끌려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자 영원한 자유민주주의 표상이었다. 어린 시절 즐겨본 서부 영화는 언제나 인디언은 악당이고, 기병대는 악당으로부터 시민들을 구해주는 영웅들이었다. 이런 만들어진 환상은 성인이 된 후에도 한참 동안 변함이 없었다. 몇몇 주장이나 책들이 강하게 미국을 비판하였지만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나의 의식과 지식이 너무 굳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십 수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하워드 진의 역작이라는 <미국 민중사>를 만화로 각색한 것이다. <미국 민중사>에 대해 이름을 들은 것도 개인적으로 몇 년 되지 않는다. 이 책이 1980년에 발간 된 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더 힘든 시기였다. 현재 이 책은 600쪽이 넘는 두 권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다. 언젠가는 꼭 읽고 말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책이다. 그런 와중에 만화로 나왔다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것도 한 권이다. 각색이란 과정을 통하면서 많은 내용이 누락되었겠지만 그 핵심은 결코 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20세기와 그 후의 이야기 일부는 그의 자서전인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원작의 내용을 모르니 만화로 나누어진 12장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시작을 국내의 제국으로 삼고, 운디드니 학살을 이야기하는데 얼마 전 읽은 운디드니 학살 관련 책 기억이 떠오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인디언 학살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북미 대륙 백인의 지배가 확고해졌기 때문이며, 이후 세계로 뻗어나가는 미국의 제국주의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알려주는 단서가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부유한 자본가들을 위해 여론을 조작하고, 군대를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고, 약속을 깨고, 민중들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책은 국내에서 인디언과 악덕 자본가와 대립한 민중들을 먼저 다룬 후 미국의 문호 개방 정책으로 말해지는 제국주의에 시선을 돌린다. 그 처음이 쿠바인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쿠바에서 스페인을 쿠바 혁명군과 함께 몰아낸 후 스페인 민간정부가 공공업무를 계속 담당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놀랍도록 해방 후 한국의 모습과 닮아있다. 친일파를 그대로 둠으로써 한국 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알고 있기에 이 글을 읽는 순간 미국의 정책이 일시적인 것이 아닌 지속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본질이 결코 변함없이 겉모습만 바꾸고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많은 글 중 나에게 가슴으로 와 닿은 문장이 있다. “돈에서 생겨나 법으로 유지되는 독단적인 힘에 대한 분노”라는 대목이다. 현재 우리의 법들이 어떤 모습인지, 어떻게 만들어졌고, 만들어지는지 알려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간 헌법재판소가 내린 판결들을 보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데 하워드 진이 이런 감정을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서 느꼈다니 순간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충격적이고 흥미로운 많은 이야기 중에서 미국 체제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 방어 방법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다. 첫 번째 방어는 진실을 부인한다. 만약 진실이 드러나면 두 번째 방어는 조사를 하되 깊이 있게 하지 않는 것이다. 언론이 그 조사를 보도하겠지만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건, 사고가 발생하였지만 결코 속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보인다.


만화로 보니 딱딱함이 많이 사라졌다. 원작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가볍게 작가의 주장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이 만화는 오만한 제국 미국의 역사에서 제국주의 모습을 중심으로 그렸다. 사실을 다루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외면하고자 한다면 결코 마음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만 본 사람들에겐 분명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제국의 이면에 숨겨진 더러운 역사와 정책은 이 만화에 극히 일부분만 실려 있다. 원작에 대한 갈증이 더 커지고 있다.
 


                                                                                                                    

posted by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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