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속살 - 동시대인 총서 9
임지현 지음 / 삼인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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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내가 지금까지 읽은 역사책의 저자 가운데 가장 독특한 인물 중에 한 명이다. 최근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통해서도 저자의 이력을 보았지만 그는 평범치 않는 길을 걸어 온 듯하다. 본인 스스로. 하지만 그것이 타 역사가들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만들어줬다. 이 책은 그런 그의 활동의 부산물이다.

<이념의 속살>은 학술논문, 잡지나 신문의 기고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제목이 의미하듯이 이념의 속살들을 다룬다. 한국적 상황을 중심에 놓고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의 파시즘, 민족주의, 마르크시즘(혹은 사회주의), 그리고 각종 담론들까지 다룬다. 그래서 이 책은 쉽지 않다. 나의 기본 소양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크지만 각종 전문용어와 서술 방식이 그렇게 평이하지 않았다. 작가의 높은 수준은 명확히 알았으나 이해를 위해 반복해서 읽어야만 했던 시간이 제법 길었다. 그렇게 어렵게 읽어야만 했다.

1. 파시즘
책의 첫주제는 파시즘, 명확히 말해 우리의 일상 속에 녹아 있는 파시즘에 대한 분석이다. 그가 일상적 파시즘에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권력의 지배 코드와 그것에 맞추에 만들어진 가치와 태도가 어려서부터 가정과 학교의 사회화 과정을 통해 내면화된다는 점˝이다. 가령 그는 한국적 파시즘의 사례라 할 수 있는 ‘유신 체제‘를 비판한다. 박정희의 지배 담론인 조국 근대화론에 보낸 지식층의 광범위한 지지는 물론이고 산업 전사, 근대화의 기수라고 호명되어 국가 권력에 대대적으로 동원된 민중들이 보인 자발성을 비판한다. 한국 진보 진영의 보수성도 예외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책이 나와 있다.

2. 민족주의
한반도에서 민족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숙제이다. 서구 근대 역사의 산물이랄 수 있는 민족(민족주의)는 19세기 말 이땅에 들어와 저항적, 폭력적 성향을 띠며 뿌리 내렸다. 문제는 민족을 그 자체로서 이미 존재하는 실체적 본질이며, 영속하여 흐르는 생명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것은 개인의 존재가 민족의 특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민족의 특성이 개인의 존재를 규정하도록 한다. 해방 후 한국 사회는 민족주의가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개인을 억압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었다. 이는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세계 주변부 약소국들 역시 이와 같은 길을 걸어왔음을 저자는 증명한다. 이런 그의 주장을 집약하여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이 출간되었다.

3. 마르크스주의
러시아에서 현실화되어 주변부에서 수용된 마르크시즘은 인간 해방의 계몽적 프로젝트가 이니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개발 독재와 대중 동원으로 타락한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러나 이것은 주변부 사회주의 국가에 전파되어 민족 해방과 근대화의 전망을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비서구적 서구화‘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딜레마를 간단히 해결해 주었다. 주변부 민족주의는 이 과정에서 사회 해방을 민족 해방으로 대체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는 인간 해방으로서의 근대성이라는 보편적 자산을 잃게 되었다. 이때 주변부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의 영속성을 강조하고 민족적 특수성을 절대화하여 자율적 개인을 민족이라는 유기체적 전체에 종속시켰다. 결국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함으로써 민족 사회주의 건설은 전체적 국가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4. 기타 담론들
21세기 한국의 역사는 인문학의 위기, 대학의 위기와 맞물려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르게 보면 역사가 더 이상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권력에 의한 역사학 퇴출은 근대 민족 국가를 정당화는 표상으로서의 역사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신호이다.‘ 이를 위해 역사학의 대중화 시도는 필요하다. 그것은 역사학을 에워싸고 있는 국가 권력을 그물망을 벗어나 시민 사회에서 역사학의 입지를 구척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하며 결국 저자는 지금은 역사학의 위기가 아니라 전환기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은 각각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을 담당하는 해방의 역사학이었다. 그러나 소수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들은 억압의 내포한 해방의 역사학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프롤레타리아 유일주의는 역사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갖는 다양한 국면들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그것은 보편의 이름으로 여성, 농민, 소수민족 등을 타자화시키고 노동 운동의 이해에 종속시켰다. 대신 중심부의 백인 남성 노동자들을 해방시켰다. 민족주의 역사학 또한 민족 해방의 이름 아래 계급, 젠더, 신분 등의 다양한 정체성을 민족적 정체성에 종속시켰다. 특히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이 민족 전통의 이름으로 은폐되고, 기층 민중을 지배하려는 민족주의 엘리트들의 헤게모니가 민족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은 닮아 있었다.

저자 임지현은 한국사학자가 아니라 서양사학자다. 그것도 마르크시즘을 연구한. 그런 그는 활발히 시민 사회와 한국사학계에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도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점을 파고들면서. 이런 그의 노력이 계속 시도되길 바란다. 사회의 전복이 아니라 부조리의 전복을 위해..

이 책은 위에 밝힌 바대로 논문과 기고문들을 주제별로 엮은 것이다. 그래서 4가지의 주제로 나뉘어져 있다. 문제는 각 장의 글들이 체계적 계획을 가지고 일목요연하게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저자가 상황에 따라 쓴 글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중복되는 부분이 많고 분량도 제각각이다. 또한 이 책은 내용이 제법 어렵다. 사상사나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밑줄을 치며 공부하는 심정으로 읽은 책이다. 차마 일독을 권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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