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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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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국어시간에 소설은 1인칭 소설과 3인칭 소설로 분류된다는 이야기를 읽고 이런 질문을 했다. "2인칭은 왜 없나요?"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엄마를 부탁해>의 신경숙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많은 작가들이 2인칭 소설을 시도했다.

 

그런데 새로운 형식의 시도라는 실험적 의미와는 별개로 2인칭 소설에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바로 소설의 화자인 '당신' '너' 'You'가 독자와 일치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북극에 막대가 삐죽 튀어나와 있는 줄 알았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독자는 "아니, 난 안 그랬는데?"라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이나 '너'라는 화자가 등장하더라도 실제로는 '나'의 1인칭 소설이 되어버리고 만다.

 

폴 오스터의 자전적 에세이(혹은 자전적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에세이라고 하여 실제로 있었던 사실만을 적는 것은 아니고, 어쨌거나 폴 오스터는 소설가이니 말이다) <내면보고서>는 '당신'을 화자로 하는 2인칭 작품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처럼 어머니의 희생이라는 보편적 제재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면, 독자가 '당신'이라고 호명되더라도 '그래 우리 어머니도 그렇지. 이건 내 얘기야'라고 공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폴 오스터가 어렸을 적 존경하던 메이저리그 선수와 만나고, 인디언 가장행렬에 딸랑이를 들고 갔던 경험을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을 읽었을 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독자 자신의 이야기처럼 공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폴 오스터의 <내면보고서>는 2인칭으로 쓰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연상시킨다. 작가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썼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년 폴 오스터는 <피터 래빗>을 좋아했고, 스티븐슨의 소설들과 <셜록 홈즈> 시리즈를 탐독했다. 그리고 소년은 민족과 국가, 진실과 거짓, 인류애와 정의, 고독과 비밀 등을 처음으로 발견하며 성장해간다. 상당히 조숙한 소년이었던 것 같다. 물론 어린 시절의 회상은 어른이 된 현재의 관점에서 재구성된다는 점은 감안하여 읽을 필요가 있겠다. 어렸을 당시에는 별 의미를 가지지 않았던 에피소드에서 뒤늦게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제 뭐 먹었는지도 기억 안 나는데 50년도 더 전의 일들을 회상해서 이런 글들을 쓰다니 대단하다.)

 

콜럼비아대학에서 여자친구와 주고 받은 편지를 소개한 부분은 <달의 궁전>을 연상시킨다. <달의 궁전> 주인공 마르코와 마찬가지로 폴 또한 베트남전쟁 참전을 피하기 위해 고뇌하고,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기도 하고, 프랑스어 번역과 글쓰기에 몰입했었다. <달의 궁전>은 작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 투영된 소설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미국문학 작가가 쓴 책이다보니 문장 자체는 잘 읽히고 재미있게 읽혔다. 작가란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책이었다. 그런데 내가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이유는 폴 오스터가 쓴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폴 오스터가 어린 시절 에디슨을 존경하고 친구에게 생일 선물을 양보하고 뉴햄프셔 캠프를 갔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굳이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알 필요가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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