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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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기 힘든 책이 있기 마련이다. 무료하게 보내던 점심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자 싶어 읽기 시작한 이 책이 내게는 그러했다. 짧은 점심 시간이 아쉬워 초침이 째깍째깍 거리는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마음을 졸였지만, 결국은 점심 시간을 훨씬 초과한 후에야 겨우 손에서 놓을 수 있었던 마호로역 다다심부름집은 오랜만에 만난 유쾌한 책이었다

보통 심부름센터를 운영한다고 하면 자연스레 검정 양복을 차려 입고 빡빡 민 머리가 특징인 깍두기 아저씨들을 연상하곤 하는데, 이곳 마호로역 심부름센터의 다다는 덩치만 커다랄 뿐 순박하고 소심한 30대 중후반의 평범한 아저씨라는 점이 꽤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귀찮고 시답잖은 일들을 대신 처리해 주고 받는 일당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이혼남 다다, 가슴 한 켠에 어두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평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남자의 삶에 괴짜 교텐이 끼어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교텐은 다다의 고등학교 동창생이다. 3년 넘게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이 없던 교텐의 엉뚱함이 얄밉기도 하고, 그의 목소리도 궁금했던 다다는 교텐에게 장난을 치게 된다. 재미 삼아 시작된 장난이 교텐의 새끼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큰 사고로 이어지게 되자 당황한 다다는 사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졸업을 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다의 눈 앞에 교텐이 나타난다. 그것도 예전의 과묵한 모습의 교텐이 아닌,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수다맨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렇게 그들의 예상치 못한 동거는 시작되었다. 서로에 대한 기억이라곤 그 사건이 전부인, 말 한마디조차 나누지 않았던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게 될 정도로 따뜻한 우정을 만들어 내기까지의 이야기는 책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흡입력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가지 이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처가 아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다다와 교텐처럼 쉽사리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지닌 사람도 있다. 그래서 서로를 보듬어 줄 여유가 전혀 없는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서로의 상처가 덧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부딪쳐가며 살을 맞대고 살다 보면 어느덧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되듯, 그들 역시 심부름집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부딪치며 지내는 동안 어느 순간 서로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 냄새 나는 소설을 읽을 때면 느껴지는 가슴 뭉클함이 좋아 그런 류의 소설을 일부러 찾아 읽는 내게 이 책은 안성맞춤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정이 그리울 때, 내 속에 감추어둔 상처가 조금씩 쑤시기 시작할 무렵 이 책을 읽어보자. 어느덧 가슴의 응어리가 조금씩 녹아 내리는 걸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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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쉽게 하기 - 기초 드로잉 -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배운다! 스케치 쉽게 하기 2
김충원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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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나는 한때 화가가 꿈이었다. 새파란 하늘에는 하이얀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기다란 머리카락이 살포시 나부끼는 어느 봄 날,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나무로 된 이젤을 세워 놓고, 그 앞에 앉아 마주 보이는 풍경을 그리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어릴적 나에겐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기 위해선 많은 시간은 물론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 때는 나의 꿈이 쉽사리 이루어질 줄 알았다. 지금은 화가의 꿈을 완전히 접고 취미로나마 어릴 적 꿈을 대신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림 그리는 게 좋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게 좋아 열심히 하면서 여러 번 상을 받기도 했지만, 나의 그림 실력은 사실상 초보나 다름 없었다. 보고 그리는 것만 잘 했을 뿐, 기초적인 지식은 턱 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런 점이 마음에 걸려 내 스스로 돈을 벌게 되면서는 미술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기초 없이 시작했던 어린 시절의 습관이 그대로 유지가 되어 배우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고, 가장 기초적인 선 긋는 법을 배우는데 드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가르치는 선생님 또한 미술을 업으로 삼을 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유화나 수채화 위주로 하는 게 낫지 않겠냐며 가르치는 방향을 살며시 바꾸셨기 때문에 결국 기초를 배우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내가 부족함을 느끼는 기법 중 특히 취약한 부분은 명암 넣기인데,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명암 넣는 법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림 실력이 없는 건 아닌데, 명암이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으니 그림이 너무 단조롭고 입체적이지 못했다. 그러니 아무리 실물과 똑같이 스케치하더라도 그림이 살지 않을 수 밖에...

그래서 마지막 수단인 책을 통해 기초 지식을 습득하고자 그림과 관련된 책이라면 무조건 사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 제목은 분명 초보자를 위한 책이라고 나와 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이게 과연 초보자를 위한 책인지, 숙련자를 위한 책인지 알 수 없는 책들이 대부분이라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책을 찾는 일은 진작에 포기했다. '그래, 이제 와서 기초를 배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결국 자포자기 하고 있던 중에 이 책을 만난 것이다. '마지막이다' 라고 마음 먹고 사들인 이 책은 그야말로 내가 원하던 책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의 마음가짐부터 시작해서 스케치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 연필 쥐는 법, 선 긋는 법 등 그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세심하고 자세한 그림과 설명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가장 기초가 되는 선 긋는 연습이 끝나고 나면 인물과 사물을 보고 그릴 수 있도록 하는 실전 방법 또한 쉽고도 체계적으로 나와 있어 초보가 중급자가 되는 건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방식대로 꾸준한 연습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찰력을 기른다면 그림 그리는 일이 그리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또한 책과 함께 들어 있는 '스케치 쉽게하기 연습장'은 손쉽게 보고 따라할 수 있도록 밑그림을 먼저 그려놓아 막상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손부터 떨리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선생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가르치는 선생님의 실력이 좋아도 자신의 노력과 의지가 없이는 실력을 향상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잊지 말고 욕심을 버리고 꾸준한 노력과 인내로 점차 실력을 키워 나가보자. 그러면 더이상 미술이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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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블랙독 -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하는 편안한 그림책
매튜 존스톤 지음, 표진인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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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의욕적이고 활달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무기력과 나태함만이 나를 엄습하고 있는 요즘, 혹 우울증의 초기 증상은 아닐까? 걱정하던 차에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편안한 그림책을 접하게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우울증이란 병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관심하고 무지해서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들이 자주 겪는 심리적 문제일 뿐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게 되면서 우울증은 더이상 개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떠안아야 할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이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혹자는 말한다. 우울증이라는 것이 본인이 감정을 잘 다스린다고 고쳐질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눈 닿는 곳, 귀가 열려 있는 곳마다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암울하고 우울한 이야기들 뿐이지 않느냐고...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우울증에 안 걸리고 살 수 있겠느냐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우울증에 걸려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수가 많은 건 사실이다. 그만큼 현대인들이 느끼는 우울증의 원인이 우리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 사고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과 더불어 심리적, 유전적 요인들이 가중되면서 우울증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라탓, 사회탓, 남탓만 하면서 자포자기 하기에는 우울증이란 병이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우울증이란 것을 말이다.

이 책의 저자 매튜 존스톤 역시 우울증에 시달리던 사람이었다.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어 혼자서 힘들어하던 그는 우연히 목격한 911 테러의 참상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 후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4시간 만에 완성한 이 책은 개념을 잡기가 쉽지 않은 우울증의 증상과 치료 방법들을 쉬운 그림과 핵심을 파악한 간결한 글귀로 표현해 우울한 감정을 한 번이라도 느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만사가 귀찮아서 식욕은 물론 의욕마저 없다면, 남을 믿을 수 없거나 사람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면, 혹은 부정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면 당신의 머리, 팔, 어깨, 등 곳곳에 블랙독 - 우울증의 애칭 - 이 들러붙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블랙독은 결코 당신에게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즐거울 거라는 건 편견일 뿐임을 명심하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블랙독에 시달리고 있으나 단지 감추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고,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그만 블랙독에게 질질 끌려 다니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버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블랙독을 당당히 소개하고 필요하다면 도움도 받아 보자.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이 사랑하면서 천천히 블랙독과의 이별을 준비해 보는 거다.

우울증을 겪고 있거나, 겪어 봤거나, 증상이 의심된다면 이 책을 들여다보자. 우울증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울증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 실마리를 얻어 적절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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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 사랑의 여섯 가지 이름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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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남자와 여자의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에 식상함을 느낄 즈음, 아지즈 네신의 탁월한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인간 이외에도 사랑을 하는 수많은 무생물이 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독수리, 물고기, 인형, 나무, 대리석 조각품, 나비 등 사랑에 아파하고, 그리움에 애가 타는 그들의 사랑, 열망, 노력,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강렬함을 심어준 여섯 편의 단편 모두 나름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단편은 처음과 마지막에 실린 [빛나는 것, 그것은]과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이다.

하늘을 사랑하는 늙은 독수리와 바다를 사랑하는 물고기 익투스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닿을 수 없었기에 쉽게 물러설 수도 있었을 그들의 안타까운 사랑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고고하기만 하다.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들을 아름다운 날개짓과 춤사위로 표현하면서, 서로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독수리는 더 이상 낮게 날 수 없을 정도로 낮게 날았고, 물고기는 숨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바다 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희생하며 불가능을 이겨내는 듯 하지만 결국 독수리가 숭고한 죽음을 선택한 후에야 둘의 사랑은 결실을 맺는다. 비극적 결말을 부추긴 죽음만이 그들의 사랑을 축복하지만, 그들은 분명 행복했다.

직업이 무어냐고 묻는 질문에 ‘튤슈를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그는 4 살 때부터 튤슈를 사랑했으며, 그녀를 찾기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있는 노인이다. 튤슈가 누구이며, 그녀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녀를 사랑하는지는 노인에게 있어 결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튤슈를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그 노인이 추구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꿈인 것이다. 그는 그렇게 누구라도 될 수 있는 튤슈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사랑을 이야기 하자면 밤을 새고도 모자를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지만 사랑만큼 쉽고도 어려운 것도 없다.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은 채로 오로지 자신만의 입장만을 내세운 채 상대방을 판단하고 구속하려는 참나무와 인형의 사랑을 통해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해서도, 자신이 희생한 댓가를 바라지도 말아야 함을, 사랑은 결코 희생 위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 이상의 행운은 없을진데,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한 욕심을 부리며 스스로를 불행에 처하게 한 남녀 조각상의 회의적 사랑을 보며 닿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님을, 함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사랑에 지나친 욕심을 내어선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사랑만 하며 살기에도 모자란 짧은 인생 동안 사랑에 눈멀고 사랑에 휩쓸려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유용한 교과서가 될것이다.

그러나 터키 문학을 처음 접해서일까? 다른 책들과는 달리 쉬이 읽혀지지 않아 몇 번이나 손에서 책을 놓아야 했다.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그림체와 단편을 좋아하는 내게 안성맞춤일 거라 생각하고 쉽사리 선택한 책이었는데, 나와는 성향이 맞지 않는 것 같다. 특별히 싫은 점이 있다기 보다 동물과 식물, 사물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랑의 감정에 나 스스로 동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평소 책을 읽을 때는 그 내용에 완전 몰입이 되어 나도 모르게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 나 자신을 오롯이 내던지기 마련인데, 이 책은 도저히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터키의 국민작가인 아지즈 네신의 풍부한 표현력과 세밀한 은유적 방식을 내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활자만 읽기에 급급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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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마을 이야기 1
제임스 캐넌 지음, 이경아 옮김 / 뿔(웅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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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적한 일요일 오후, 마리키타의 남자들이 사라졌다. 게릴라들의 폭력과 탄압에 마리키타를 지키던 파티뇨 경사를 포함하여 수많은 남자들이 죽거나, 끌려간 것이다. 그렇게 마리키타 여자들은 과부가 되었다.

농사를 짓는 일부터 시작해 마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하던 남자들의 빈 자리는 컸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 오빠, 남동생을 잃은 마리키타의 여자들은 남자들을 잃은 슬픔에 울 겨를도 없이 당장에 먹을 끼니부터 걱정해야 했다. 많은 여자들이 남자들이 돌아오기를, 당국에서 자신들을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동안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여자들이 늘어났고,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결국 며칠이 지나지 않아 길거리는 구걸을 하는 사람들과 엄청난 양의 쓰레기 더미로 뒤덮였고 전기와 전화,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 폐허 마을이 되었다. 마리키타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시궁창에서도 장미는 핀다고 했던가. 파티뇨 경사의 미망인 로살바가 새로운 치안판사로 임명이 되면서 마리키타에도 희망은 보이기 시작한다. 평범한 아낙이었던 그녀는 마을을 위해 해야 할 목록을 만들고 여자들을 독려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등 마을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처음의 뜻과는 달리 도덕적이지 못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하면서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지만 그녀는 탁월한 지도자임에는 분명했다.

그렇게 치안판사로서의 역할에 열심이던 로살바는 더 이상 마리키타를 방문하는 상인들도, 길 잃은 여행자들도 볼 수 없게 되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여자들은 자꾸 나이 들어 죽음과 가까워 지고 있지만, 자신들이 한 평생 일궈놓은 마을을 이끌 아이들이 없었기에 언젠가는 마을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이러한 상황을 빌미로 라파엘 신부가 시급한 출산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적극 제안한 출산장려운동 – 라파엘 신부가 15세~40세 사이의 여성과 잠자리를 가져 그들을 임신시키는 운동 – 에 대해 거절의 뜻을 밝힐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잡혀가지 않은 유일한 남자 - 여성화된 남자를 제외한 – 인 라파엘 신부가 하느님을 빙자해서 저지른 일련의 행동들은 추악하기 그지 없다. 그는 자신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무지하고 순박한 여자들에게 자신이 주님에게 맹세한 순결의 서약을 깨고 연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을 희생하는 이유는 순전히 마리키타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역설한다. 머리가 벗겨진 땅딸막한 신부는 그렇게 마을의 여자들을 유린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운다.

남자들이 있었다면 행해지지 않았을 낯부끄러운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는 곳.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바친 신부조차도 여자들만이 존재하는 낙원과 같은 곳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여자들 또한 그들의 욕망을 풀 곳을 찾지만 마리키타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여자들뿐이라는 것을,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 또한 그녀들뿐인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들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 여성과 여성의 사랑이 아무렇지도 않고 굳이 남자들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인 마리키타에도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남자를 원한 이유가 그것이었듯 어린 아이들의 울음 소리를 들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여자들이 정자를 생성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굳이 남자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남자들이 아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 외에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자궁이 있다면 굳이 여자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 보면 황당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는 요즘을 생각하면 언젠가는 남자도 아이를 낳을 수 있고, 여자도 정자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 개발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마을 마리키타는 전 세계의 축소판과 다름없다.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며 죽음을 재촉하는 나라, 무력에 의한 탄압에 쉴 곳을 찾아 목적 없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나라, 남자들이 최고이고 여자들은 존중 받지 못하는 나라, 동성애자와 게이들이 사는 나라. 이 모든 나라에서 행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마리키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는 전혀 괴리감이 없다. 다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모습들이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과부마을 이야기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울컥 화가 나기도 하고,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했던 이유가 다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숨겨놓고만 싶었던 어둡고 암울한 현실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기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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