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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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13호 캐비닛’에 대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찌감치 집어치우기를 권한다. 그런 상상을 한다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작가가 이래도 되나, 하지만 난 그가 시키는 대로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가가 책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루저 실바리스의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도 그냥 ‘뜸금없네’ 라고만 생각했다. 그는 화산 폭발로 인해 사라진 도시 상피에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몇 십 년 동안 은둔의 생활을 하며 자신의 고향에 대해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희대의 거짓말쟁이다. 그렇다. 그는 거짓말쟁이다. 단지 그뿐이다. 그에 대해 더 이상의 상상은 작가는 용납지 않는다. 그러니 그에 대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지는 마라. 그가 미리 경고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도 그냥 넘어갔다.

 

백칠십팔일 동안 캔맥주만 마신 남자가 있다. 백칠십팔일 동안 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드는 저녁까지 캔맥주를 마시는 생활을 반복하다 백칠십구일 째 되는 날 아침, 맥주 마시는 일을 그만둔 남자. 오로지 캔맥주와 땅콩만으로 백칠십팔일을 버티어온 남자. 그는 공기업의 연구실에서 근무하는 30대 초반의 직장인이지만, 결코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한두 시간이면 처리할 간단한 업무를 끝낸 후 사무실 구석자리에서 화분처럼 조용히 앉아 창 밖을 바라보는 일을 하기 위해 고시원과 학원가를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고, 13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를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개껌이라도 질근질근 씹어먹고 싶은 무료함을 견디다 못한 그는 13호 캐비닛이라는 이상야릇한 세계로 발을 한 발짝 내딛게 된다.

 

그가 왼쪽에서 열세 번 째 놓여 있는, 유일하게 자물쇠가 달려 있는 13호 캐비닛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순전히 무료했기 때문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딱히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심심했을 뿐이었다.

 

13호 캐비닛 안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 ‘믿거나 말거나’ 에 나와야 할 것 같은 특이한 사람들에 대해 기록해 놓은 파일들이 가득하다. 손가락에서 은행 나무가 자라는 사람, 고양이가 되고 싶은 남자, 남자의 성기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 매번 자신의 분신을 화장해야 하는 샴쌍둥이, 눈 깜짝할 새에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사라지는 타임 스키퍼 등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변화된 종의 징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칭하는 심토머들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공대리는 심토머들에 대한 파일을 읽기 시작한 후 심토머들을 연구하는 괴짜 권박사의 협박에 못 이겨 심토머들의 전화를 받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만나서 술 한잔도 기울이는 등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정리하고 보관하는 일을 7년간 계속한다.

 

그렇게 공대리를 통해 심토머들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 들려줄 것 같던 작가는 권박사가 병에 걸려 사망하기 직전부터 어이없게도 스릴러 첩보물로의 변화를 꾀한다. 모기업에 의한 협박과 납치, 고문 등 책의 장수를 늘리는 게 목적인 듯한 인상을 풍기는 인물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 것이다.

 

기괴하고 섬뜩한 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나와 지루한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유머러스하고 능청스러운 문장이 무척 유쾌하고 재미 있었다. 하지만 첩보물로 변하는 순간부터 늘어지기 시작한 이야기는 더 이상 재미를 유발시키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설득력이 약한 궁색한 결말을 이끌어내기는 했지만 작가의 문학동네 수상작다운 면모는 소설 중간 중간에 나타난다.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심토머들의 증상에 관한 기록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물을 보는 듯 허무맹랑하지만 공대리를 등장시킴으로 인해 현실적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고, 감칠맛 나는 작가의 재치 넘치는 글 솜씨와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그만의 독특한 창의력은 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앞으로의 그의 행로가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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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1-20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에서 조금 긴장감이 떨어졌지만 '창의력' 면에서 저도 점수를 높이 주고 싶었어요. 문학의 매력은 그런 데에 있는 것 같아요. ^^

얼음장수 2007-01-21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저런 이야기를 다 끌어왔을까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킥킥 거리는 웃음을 참아가며 읽느라 진땀뺐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ryuhwlove 2007-01-22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김언수 작가의 창의력~ 정말 높이 살만하죠?^^
얼음장수님~ 정말 그렇죠? 저도 웃음 참느라 진땀 좀 뺐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