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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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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통스럽게 '사유'하기 위하여

- 『리영희 프리즘』서평, 그리고 나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 전 친구 하나가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친구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나 그리고 나의 여자친구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물론 그 친구는 엄마가 하도 보채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말했다지만, 나이가 올 해 스물여섯이나 먹은 성인이 제 얼굴에 칼 대는 일을 엄마가 하란다고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친구가 아무리 변명한다 해도 그 선택에 자신의 욕망이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단 한번의 수술로 그간 우리가 지켜왔던 여성주의 운동의 대의를 배신한 친구의 선택에 분노를 터뜨리고 난 후에도 뭔가 개운치는 않았다. 나조차도 부지불식간에 그 친구에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절대 보편이 될 수 없는 도덕률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식의 도덕률로 그를 욕한다면 알량한 대학 졸업장을 받아보겠다고 두 달간 토익학원에 시간과 돈 그리고 영혼까지 갖다 팔았던 나는 얼마나 정당한가? 냉정하게 말해서 그와 나의 차이점이라고는 노동시장에서 나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한 자기계발의 기술을 외모에 까지 적용했느냐 안했느냐 정도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 나면 내가 감히 그 친구에게 들이밀은 도덕주의는 혹시 '꼰대스러운' 운동권의 자격지심의 발로는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시대에 좌파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분열증에 시달린다는 것을 의미"(한윤형, <냉소주의시대의 우상과 이성>, 206쪽)한다는 한윤형의 지적은 이미 그런 분열증 증세 속에 살아가는 나에게는 의사가 작성해준 진단서를 읽는 기분이 들게 한다. 학생운동을 할 때, 우리는 비대해진 사교육 시장과 경쟁교육을 비판하면서도 밀린 방세를 내기 위해 영수과외를 해야만 했다. 이쯤 되면 과연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MB교육인지,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하루에 세 번씩은 꼭 울어대는 내 배꼽시계인지 헷갈리는 지경이다.

내 앞엔 지금 『리영희 프리즘』이란 책 한 권이 놓여져 있다. 70년대 대학생에겐 '스승'이었고, 그래서 프랑스 진보언론 르몽드로부터 '사상의 은사'라는 별칭까지 얻은 상징적인 지식인 리영희. 그는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쉼 없이 '몽롱한 의식에 끼얹은 찬물 한 바가지'같은 글들을 쏟아냈고, 그렇게 리영희로부터 세례 받은 청년들은 소위 '의식화'가 되어 80년대를 분노와 저항의 세월로 채워갔다.

2010년 3월 11일. 나는 리영희의 일생의 화두였다는 우상(偶像)과 이성(理性)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도 거의 대다수의 청년세대가 리영희를 모르고 리영희의 사상에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2010년 3월 11일에. 


스승이 없는 시대, 우상맹목의 시대

지난 21세기의 첫 10년간, 우리는 확실히 '스승이 없는 시대'를 살았다. 70년대 대학생을 감화 받게 했던 리영희도, 80년대 대학생이 리영희를 경유하여 만난 마르크스도 우리에겐 없다. 91년 사회주의권 붕괴를 찍고 턴한 청년세대의 사상적 좌표는 그간 '모셔왔던' 스승들을 사정없이 패대기를 쳐대더니 결국 지금의 청년세대를 탈이념, 탈정치 그리고 냉소주의를 뼛속 깊숙이 받아들인 'Cool'한 이들로 성장시켰다. 그러는 동안 리영희가 치열하게 마주해왔던 군부독재라는 우상은 자본독재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었지만, 우리는 이전 청년세대와는 다르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 우상을 치열하게 대면하고 파괴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Cool'했기 때문에.

그러했기에 사르트르식으로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으로서 지식인 또는 그람시식으로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지식인은 소위 '꼰대' 취급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는지.(이대근,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133쪽 참조) 어쩌면 우리에게 '지식인'은 특정한 기술(Technique)을 전수해주는, 이를테면 메가스터디 손주은 사장같은 사람이 아닌지.

그렇게 스승이 부재한 가운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 우리는 분명 고통스럽게 억압과 마주해야 할 부담에서 자유로워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탈정치'라는 이름으로 그 부담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 부담이 자리잡고 있던 자리에 지금 무엇이 들어 앉아 있는가? 얼마 전 삼성 총수 일가를 비판한 책에 대한 광고를 거부한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의 고위간부라는 사람들이 'Cool'하게 던진 말들 속에서 나는 그것의 실체를 본다. "삼성은 우리의 파트너", "삼성은 해체의 대상이 아니라 상생의 대상". 이미 우리시대 우상(偶像)이 되어버린 삼성은 그들에게 신문사 경영의 일부가 되었고, 리영희에겐 그것과 맞서기 위해 벼려내야 했던 무기였던 이성(理性)이 그들에겐 삼성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적응의 기술'이 되어버렸다. 이 '적응의 기술'이 시장주의를 통해 자유의 가면을 쓰는 과정을 안수찬 기자는 "진짜 기자의 멸종"이라는 글을 통해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다시, 고통스럽게 '사유'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렇게 억압과 마주해야 할 부담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대신, '생각'을 잃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지만, 우리는 지금 확실히 의심의 여지없이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병권,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15쪽 참조) 우상의 지배 하에서 작동되는 두뇌의 의식작용은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화학적인 생리작용과 다르지 않다. 화학적 생리작용으로만 유지되는 유기체를 우리는 '노예' 또는 '짐승'이라고 부른다.

확실히 이 구절은 아팠다. 너무 아파서 읽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리영희는 사르트르를 인용해 자유의 의미를 절절하게 전했다. 사르트르는 독일 점령 하에 있을 때처럼 자유로웠던 예가 없었다고 했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유라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억압자에 저항함으로써 자유를 느꼈던 그에게는 저항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이대근,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144쪽)

나와 같이 범속한 인물이 저런 자유에 털끝만큼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심지어 앞에서 말한 '진보언론'의 간부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상과 이성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등을 맞대고 붙어 있는, 우리 삶의 두 부분일 따름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그러나 나는 또 아프게 되새김질 한다. 나치 전범재판에 회부된 아이히만을 관찰하면서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에게 사유는 '능력'이 아니라 '의무'이다. 우상이 끊임없이 이성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고 둘 사이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는 조건 속에서, 우리가 그 둘을 분리해내려는 고통스러운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아이히만의 변종일 뿐이다. 아이히만은 가정에 충실했고 성실한 직장인이었다. 다만 너무 성실한 나머지 유태인을 살해하라는 우상의 명령에 대해 '사유'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나의 친구에게 묻는다. 성실하게 일주일에 세 번 토익학원에 다니는 동안, 그리고 유행에 맞춰 성형외과를 찾는 동안, 너는 얼마나 자유로웠냐고. 너는 얼마나 네 안에 자리 잡은 우상에 대해 사유했느냐고. 5.18의 시인 김남주는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라고 했다. 그리고는 "사람들은 맨 날 겉으로는 소리 높여 자유여, 해방이여, 통일이여, 외치면서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라고 꾸짖었다. 시인 앞에 한 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스승 없는 시대를 함께 버텨내온 나의 친구에 대해 생각한다. 그 친구는 얼마 전 만났을 때 김규항의 『예수전』이라는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나도 최근에 그 책을 접했다. 종교와 별 다른 인연을 맺지 않았던 나도 이 책을 통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친구였던 '최초의 사회주의자' 예수의 삶에 깊이 감동했다. 나는 그렇게 우리가 스승 없는 시대에 스승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는 사실에 감사했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친구와 함께 사유하고 싶다. 자유롭기 위하여. 나의 이성과 육체 모두가 진정 자유롭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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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도서관 2010-07-27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동대문도서관 입니다^^
『근대의 책 읽기』 저자 천정환 교수님의 강좌 <독자, 그들의 대한민국 - 근현대 문학과 독자의 문화사>가 9월 7일부터 매주 화요일 7시에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립니다.

강의에 관한 더욱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blog.daum.net/ddmlib/63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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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는 보기 드물게 친절한 철학 선생님이다. 그 동안 대학 새내기쯤을 대상으로 한 철학 입문서로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 정도가 각광을 받아왔지만, 이 책 또한 잘난척하기 좋아하는 얘들 몇을 빼놓고는 그다지 쉽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런데 2006년에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나다>라는 책을 만나고 '요것 참 물건이 나왔구나'싶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이 책을 추천도 많이하고, 그래서 몇몇 얘들은 그걸 가지고 새내기와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를 하기도 했었는데...

그랬던 강 선생께서 이번에 또 하나의 물건을 내놓으셨다. '시를 통한 철학읽기'라고 해야 더 정확할 듯 싶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내가 원래 문학과 그리 친한 편은 아닌데, 시는 더더군다나 인연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예전에 '투쟁 자료집' 만들때 빈 공간 채워 넣으려고 갖다 쓰던 브레히트나 도종환의 몇몇 구절 정도가 좀 인연이 있었을 뿐... 사실 시라는게 나같은 범속한 인간이 읽으면 '그래서 대체 뭐 어쩌라고'라는 반응이 나오는게 대부분이어서 딱히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는 세계였다. 그런데 또 강 선생께서 친히 철학-삶-시의 삼각관계를 자연스럽게 풀어헤쳐주셔서 우리는 또 수줍게 시 속에서 나의 삶과 철학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게 된다.

일단 내가 이 책에서 소개된 책 중에 가장 맘에 든 시는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이다. 원래 김남주 시인의 직설적인 화법과 따가운 질책은 언제나 좋았지만, 이 시는 더욱이나 울림이 크다. 각설하고 감상을~

 



어떤 관료  -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국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이 시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사유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라는 명제를 꺼내드는데, 요즘 내 삶에서 그럴만한 계기는 딱히 없었지만 왠지 이에 공감하는 바가 크다. 구청에서 일하다 보면 내가 조금 귀찮아하는 기색만 보이면 공무원들을 말한다. "이 자식 이거 군대를 보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선 근면함은 무사유의 다른 표현이다. 군대는 무사유 속에서 근면함을 형성시키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지만 언제나 악인이 될 수 있는 무사유의 일상성.

 

 

어쨌든 이 책은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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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 - '정통'맑스주의와 탈현대적 비판을 넘어선 맑스주의 철학의 확장
박영균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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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고 있는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는 08년 말쯤에 산 책인데, 50페이지쯤 읽다 포기해 버렸었는데 그 새 내 머리가 좀 컸는지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도 되면서 그럭저럭 읽고 있다. <진보평론>등에서 그의 논문을 몇 번 보긴 했는데, 이 책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앞으론 별 두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맑스주의 '정통'의 붕괴라는 이론적 조건에서 마주하게 되는 '탈현대적 맑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 및 수용하면서 맑스 사상 속에서 이러저런 방식으로 왜곡되어 왔던 변증법과 유물론을 저자 나름대로 복권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사실 저자는 좌파 이론 진영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Orthodox한 맑스주의를 고수하는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텐데, 그런 포지션의 사람들은 스피노자, 니체 등으로부터 연유하는 탈현대적 맑스주의 비판을 그간 적지 않게 해 왔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이 책은 참 식상한 면이 있다. (박영균의 주장과는 많은 편차가 있긴 하지만) 나름 Orthodox한 맑스주의를 고집한다는 사람들의 글을 읽고 있자면 이 사람들이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좀 짜증나는 구석도 있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이들을 두고 농담조로 던진 한 마디가 생각난다. "걔네들은 메이데이날 공장가서 기도나 올리라 그래라."

 

그러나 적어도 박영균은 이런 비판을 들어야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는 서론에서 "오늘날 많지 않은, 그렇지만 탁월한 탈현대적인 맑스 철학의 모색이 몇몇 논자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이 최종적으로 결여하고 잇는 것은 맑스 철학의 근본적인 지반이다. 그것은 맑스 철학의 정체성이 아니라 탈현대적 기획과 흐름들에 정세적으로 묶여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경우, 맑스는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여러 시체들의 얼굴들을 짜깁기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지적인 공포를 유발한다. 맑스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모를 지적인 공포가 방향을 잃은 담론들의 난무와 지적 진지함에 대한 의욕 상실을 낳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맑스 철학의 '근본'을 옹호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러한 옹호는 맑스주의자로서의 원칙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보여진다. 한편 그는 탈현대적 맑스주의 근저에 있는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 편한대로 넘겨짚지 않고 꼼꼼하게 따져보고 평가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알튀세르의 '철학의 실천'과 그람시의 '실천의 철학'이라는 철학의 두 계기와 스피노자의 유물론과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이라는 두 계기를 설명하는데, 난 이 부분의 한 문장 한 문장을 힘겹게 읽으며 참 공부 제대로 했다. -_-;; 사실 Orthodox한 맑스주의자들의 글에서 이렇게 성실하게 탈현대적 흐름을 분석한 경우는 처음 본다. 그래서 이 책에 좀 고마웠다.

 

그는 끊임없이 맑스와 알튀세르, 맑스와 그람시, 맑스와 스피노자, 맑스와 들뢰즈를 대면시키고 대질심문한다. 그래서 그가 도출한 결론 중에 눈에 띄는 것은 "포스트적 담론들의 과학 비판과 해체는 윤리학적 문제설정이나 윤리적인 실천을 넘어서지 못하고 적대적 실천의 장으로 집중되는 정치를 해체하는 효과를 낳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12p)는 지적이었다. 이 점은 나도 얼마간 고민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요즘 이러저런 문화평론이라는 것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공허감 같은 것을 잘 표현해 준 것 같다. 아래 문장에서는 그가 세운 '원칙'이 잘 드러난다.

 

이제, 던져야 할 질문은 포스트적 담론에서 이야기하듯이 '어떻게 사람들은 파시즘을 자신의 욕망으로 생산하는가'가 아니라 '그렇게 표상하고 욕망을 그런 식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었던 물질적 토대가 무엇인가'이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 토대의 효과가 어떻게 사람들의 욕망을 채취하고 굴절시키며 지배 권력으로 절합시키는가'를 찾아야 한다. (233p)

 

그러나 이 문장 바로 앞에 나오는 "그러므로 우리가 근본 변혁적 실천을 모색한다면 그것은 이 토대 중심성과 그 중심성에 의해서 제시되는 현 지배체제의 외부를 극한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적대성을 내재하고 있는, 그리하여 자본의 외부를 생성하는 운동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계급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그가 세운 원칙의 타당성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토대중심성에 대한 철학적 의문?) 특히 다음의 문장을 읽고 난 이후로 난 갑자기 이 책의 결론이 예상이 되면서 급 실망 모드로 돌아섰다.

 

우리는 부-자, 부-부의 관계맺음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노/자의 관계맺음 없이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관계맺음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부-자, 부-부 관계 또한 이런 본질적인 강제력에 의해 그 차이 또한 변형된다. 차이는 적대의 질서를 따라 절합되고 구획된다. 내가 아무리 선한 아버지라도 아들을 대하는 방식은 자본주의와 봉건제에서 다르다. 부-자 관계에 의해 노/자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자 관계에 의해 부-자 관계는 변형된다. (222p)

 

이런 (내가 보기에는) 황당한 결론을 내기 위해 400페이지 넘는 책을 썼단 말인가? 과연 우리는 부-자, 부-부 관계 없이 살 수 있는가? 난 저자의 결론을 반박하기 위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쓰진 않겠다. 이런 결론을 내기 위해 400페이지를 달려나간 저자에겐 이를 반박하기 위한 실증적, 논리적 반박 모두 무의미하게 들릴것만 같다. 왜냐면 사실 그 자신도 노/자 관계가 왜 우선인지 '증거'를 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탈현대론자들이 주장하는 '차이의 존재론'과는 다른 맑스의 '모순의 변증법'과 '역사 유물론'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차이의 존재론은 차이 그 자체로 모든 운동을 '생성'으로 일반화하지만 모순은 그렇지 않다. 생성운동은 '구별'이 아니라 '대립'에 있다. 대립을 통해서 포착되는 '모순'은 운동이 하나의 강제적인 힘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 존재의 가능성을 제시한다."(223p)라고 말한다. 동의한다. 그러나 이 말 어디에도 그 모순의 중심이 노/자 관계라고 나와 있지 않다.

 

게다가 "맑스가 자본주의에서 해방 주체를 찾고 그 존재를 노동자계급으로 설정한 것은 진정한 운동운 불가피하게 강제되었을 때에만 성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라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는 수동적/소극적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닐까? '불가피하게 강제'되었을 때에만 성립하는 운동을 과연 진정한 운동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이론적 논의 속에는 대중의 자율적 의식화의 가능성, '불가피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운동으로 조직화시킬 가능성에 대해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책의 평론가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읽었기 때문에 저자가 제기한 쟁점에 대해 가타부타 따지고 들어갈 여유 또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왜 그는 모순의 담지자를 존재론적으로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고, 그 관계를 체현한 존재라면 오히려 그 존재를 존재 가능성을 변화시키는 관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순의 중심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중심되는 모순이 어떤 것인지는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도 변화 가능한 것이고, 모순의 과잉 또는 과소 결정되는 지점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차별화는 노/자의 계열화 속으로 절합되며 이주노동자는 노/자의 계열화 안에서 이중적인 차별화로 강제되며 특이성 자체를 변형한다"(232p)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하간 이 책은 나름 '학습의 기쁨'과 함께 실망도 함께 준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이 현 시점에서 Orthodox한 좌파가 보여줄 수 있는 발전된 논의의 최대치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고마움과 씁쓸함을 함께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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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자유를위한정치>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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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리뷰는 책을 하나도 안 읽고 쓰는 거다. 알라딘 신간평가단에서 보낸 준 거라 책상에 잠깐 앉아 쓱 훑어보기만 했다. 이 책은 최근 1-2년 사이에 저자가 언론 상에 기고한 글들을 중심으로 모아놓은 것인데, 사실 나는 그의 글이 언론에 실렸을 때 대부분 읽어봤기 때문이다. 주로 <프레시안>에 실린 글을 읽어봤지만, 이 책을 대충 훑어보니 <한국일보>에 실렸던 글도 대강 맥락은 비슷한 것 같다. 개개의 글들이 다루는 주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야만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그런 책도 아니었다. 

사실 나는 이 글에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가타부타를 따지고 들 생각이 없다. 책을 안 읽긴 했지만, 이미 그의 글을 다른 지면을 통해 대부분 접한 사람으로써 난 손호철의 주장에 대해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 그의 주장에 맞장구 치는 것은 나로써도 시간낭비다. 이미 그 동안 나의 블로그 (http://blog.jinbo.net/rollingstone)를 통해 해 왔던 일이기도 하고... 

난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책을 대체 왜 내나 싶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저자의 주장에 상당히 동의한다. 그럼에도 난 이런 식의 출판 관행이 맘에 들지 않는다. 너무나 손 쉽게 한 정치학자의 이력을 늘려주는 방법 아닌가 싶다. 그간 언론상에 기고한 글들을 별로 고치지도 않고 대충 모아서 책 한권을 뚝딱 만들어내는 것... 솔직히 생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도 이렇게 종이를 낭비하는 건 쫌 아니다. 

필요하다면 언론 기고 글들을 모아 책을 내는게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이라는 형식을 통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돈 주고 사보는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잘려나가는 나무에게 미안해서라도 책의 구성을 내실있게 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완전히 날로 먹기다. 비슷한 내용의 글을 합쳐서 가필을 하거나, 필요없는 문장 같은 건 과감하게 쳐 내야 한다. 그렇게 보자면 이 책에는 군더더기 지방 살들이 너무 많다.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그의 주장에 대한 동의여부를 떠나서 손호철의 글은 너무나 성의없다. 이를테면 '진보신당 첫 국회입성을 축하하며' 같은 글은 딱 8자로 요약된다. "축하축하방가방가" 이게 대체 뭐냐? 이런 글은 그냥 개인 블로그 같은데 쓰고 말아야지 어떻게... 에휴... 이런 글을 실어준 언론사도 참 한심하다. 이 뿐만 아니라 촛불집회, 미네르바 사태에 관련한 글에서도 결론이 참 무성의하다. '무기력할 뿐이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게 대체 뭐하자는 결론인가? 길이 보이는데도 안 보인다고 말해서 투덜대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식인, 학자라는 이름을 걸고 공적으로 글을 쓰는 거라면 좀 더 책임있게 방향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보일 수는 없느냐는 거다. 대충 원고 마감 시한 맞추려고 쓴 글인게 확실한 것들을 책에 모아놓을 이유는 대체 뭐람? 

햑술지 기고글을 모아서 내는 게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토막글'들을 모아 내는 출판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덧붙여 이 책은 그간 손호철의 글을 한번도 접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유용할 수 있지만, 어느정도 읽어봤던 사람이라면 책 살 돈으로 영화 한편 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이 책은 그냥 손호철 글 별로 안 읽어봤을 친구에게 선물(?)로 줘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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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이계삼 지음 / 녹색평론사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곧 있으면 신참 교사가 될 석돌이에게 줄 선물로 산 책인데, 선물 주는 사람이 먼저 읽어보고 소감을 말하면서 건내주는게 예의일 것 같아서 어제 밤 1부만 읽어봤다. 2부의 분량이 더 많기에 서평이랍시고 벌써 몇 마디 떠드는게 좀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1부 내용만으로도 뭔가 저자의 말에 대답하고 싶어지는게 생겨버렸다.

일단 내가 다닌 고등학교 얘기 몇 개부터 하고 시작해야 겠다. 그 학교는 대전 최고 명문 고교였다가 90년대 후반부터 대전 서구, 유성구에 신도심이 활성화되면서 쇠락한 학교이다. 특히나 학교 선생님 중에는 동문들도 꽤 있었는데, 자신들의 잘 나가던 옛날을 생각하면서 찌질하게만 보이는 자신의 제자들을 구박하길 밥먹듯 했다.

그런데 어느날 영어선생이란 놈이 수업시간에 이런 소리를 한다. 자기 반 학생 부모들 중에 대학 졸업한 사람이 2명 밖에 안된다고... 그러니 얘들 수준이 그 모양 아니냐... 저 서구에 XX고, ○○고에 가면 대졸 이상이 한 반에 2/3 이상이다. 내가 이딴 똥통학교에서 얘들을 가르치다니... 어쩌구 저쩌구..

얘들 앞에다두고 이런 저질스러운 소리나 해대는 인간을 선생으로 두고 살았던게 우리네 고딩시절이었다. 내가 보통 악몽을 꾸면 그 중 열에 아홉은 고등학교 시절이 배경이다. 모의고사를 보고서 내 라이벌이 나보다 점수가 더 잘 나올까봐 걱정하고 있다던지.... 그런 꿈 꾸고나면 아침부터 기분이 더럽다. 실제 내 고3시절은 그게 병적인 수준이었고,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자살하지 않은게 다행이란 생각도 '아주 가끔' 한다. ㅋㅋㅋㅋ

내가 학창시절에 전교조에 대한 얘기를 들은 고등학교 때 영어선생(앞의 영어선생과 다른 사람이다)이 했던 소리가 전부다. 그 양반은 한때 전교조 조합원이었는데 탈퇴를 하고 수업시간에 전교조의 '전'자도 못들어 본 얘들한테 전교조 욕을 했다. 전교조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가야 하는 얘들 망치는 집단이라고...

그 선생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은 또 있다. 체력장을 했던 날이었는데, 그 다음시간이 영어였다. 체력장에서 검사해야 할 항목이 워낙 많기 때문에 체육선생님은 기록을 적는 일을 대충 몇명 아이들 뽑아서 시켰다. (구체적으로 어느 대학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체력장 점수를 입시에 반영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기록을 조작하려 했다. 그런데 이 영어선생이란 작자는 대놓고 좋은대학 가고 싶으면 그런 것 쯤은 좀 올려서 적으라고 당당히 말하는 거였다. 내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그건 나쁜일 아니냐고 했더니, 대학가는게 중요하지 그런게 대수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겐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안 좋다. 이런 나에게 이계삼 선생님의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은 내 고교시절을 더욱 서럽게 느끼게 만드는 책이었다.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 줄 수 있는 '전교조 선생님' 한 분만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내가 1학년 말에 문/이과 선택할 때 이과 선택했다가 문과로 바꾸겠다고 했을 때, 그 때 내 담임이 했던 "문과 가봤자 취직할데도 없으니까 이과로 가 임마!"같은 말은 듣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모의고사를 보기 전 날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이 막힐 듯 해서 잠도 못 자고 날밤을 샜을 때, 내 얘기를 한 마디라도 더 들어주려 하는 사람 덕분에 난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을 텐데... 그 때 내 얘기를 들어준 것은 상담실에 배치되어 있던 대학원생 학교사회복지사 뿐이었다. 아래 구절을 읽으면서 그 기억이 아프게 떠올랐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과 관련하여 엄청난 오해와 왜곡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제 교육의 장(場)은 변인들을 조작하여 프로그래밍화한, 이를테면 파블로프가 개를 가두어놓은 실험상자 같은 것이 되었다. 골방에서 친구들과 나누었던 어설픈 인생상담은 점점 비일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교육받은 전문 상담사가 직접 학교를 방문하여 진행하는 상담 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대체해가고 있다. 체험학습 -- 체험도 학습하는 것인가 -- 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전문 지도자가 아이들의 체험을 안내하고 조직화한다. 그리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 전문적인 '평생교육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공적 영역이건 사적 영역이건, 수없이 교육기관을 전전하며 끝없이 무언가를 배운다.

- 27~8pp

내가 학교 상담실을 찾아가서 딱 두번째 만남이 있었을 때, 그 사회복지사는 내게 홀랜드 진로심리검사 용지를 들이밀었다. 내가 미래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긴 했지만, 내가 불안해 했던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그 때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그 사회복지사 뿐이어서 고맙게 생각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난 결국 학교 상담프로그램의 개입 과정에 따라 변화될 '종속변수'에 불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             *             *

내 고딩때 얘기는 대충 끊고, 책에서 인상깊었던 구절과 이에 대한 간단한 생각들을 정리한다. 

1부 글 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좋은 언어'와 관용의 정신>이었다. 제목은 약간 고리타분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이 글은 논술교육에 관한 글이다.

한가지 인상 깊었던 체험은 첨삭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할 무렵에 겪은 일이다. 그때 논제가 대략 '현대문명의 위기에 대한 생태론적인 대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손에 들어온 첫 답안지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 학생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심층샌태주의로 규정하고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론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었는데, 한창 입시준비에 몰두하고 잇을 수험생이 어떻게 머레이 북친과 그 당시 한국에서는 이름조차 낯설었던 호지 여사의 책을 읽었을까, 놀라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장두장 첨삭을 계속하다가 그 감동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어버렸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북친과 호지의 입장을 논거로 주장을 전개하고 있어기 때문이다. 그 학원의 논술강사가 모의고사를 앞두고 수업해준 내용을 천편일률적으로 옮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더 읽다 보니 생태론의 기본적인 가정, 즉 현대사회의 지속불가능성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이나 이해도 없이 SF영화 같은 감각으로 황당한 가설을 늘어놓는 답도 적지 않았다. 나중에는 몹시 짜증이 났고, 이런 답안을 작성한 학생들의 지적 수준마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첨삭을 마치고 답안지를 들고 그 학원 논술실로 가서 답안지를 작성한 학생들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이들은 그학원의 지역 분점인 강남 D학원생들로, 우리나라에서 서울대 진학률이 제일 높은 집단이며, 대부분이 이른바 SKY대학 이상으로 진학한다는 거였다. 상당히 놀라웠다. 돌이켜보면 이미 그때 논술교육의 본질을 아아챌 수 있었음에도 나는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했다.

- 55~6pp


논술고사의 파행은 극히 단순한 사실에서 연유한다. 논술고사의 도입 자체가 극히 반교육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기 대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수능시험이 도입된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내신-수능-대학별 고사가 대입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내신과 수능의 오랜 갈등, 사교육의 팽창과 공교육의 위축, 수능의 난이도 논란, 내신의 변별력 논란 속에서 상위권 대학은 대체로 수능과 내신을 기본 요건으로 하면서 논술 및 면접 고사로 변별력을 찾게 되었다. 이 속에서 손 안대고코 풀련느 격으로 다양한 학생선발 방식을 개발하지 않고 우수한 학생을 손 쉽게 독점하려는 대학의 욕심이 깔여 있고,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을 독점한 상류층과 어떻게든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보려는 차상위계층간의 쟁투와 상호타협이 깔려있다. 요컨대 논술고사는 대학입시제도를 둘러싼 제 요소, 제 세력들 간의 혈전의 역사가 잉태한 기괴한 사생아이다. 논술고사는 오직 상위 30퍼센트 이내 학생들을 줄세우기 위해(변별력을 얻기 위해) 도입된,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상위 30퍼센트 '인적 자원'의 등급을 감별해내기 위한 기제일 뿐이다.

아무리 대학 입학고사라 하지만, 논술은 중등교육에서 이루어지며 중등교육의 성과를 측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논술이 중등교육으로 담아낼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을 담보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변별력' 획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지금 한국 교육의 현실이 이렇다. 내신에서 수능으로, 수능에서 내신으로, 이제는 논술로, 아이들이 대학 입학을 위해 점령해야 할 각개전투의 고지는 계속 늘어난다. 이제 또 무슨 고지가 새로 솟아오를 것인가.

- 62p
  

그러나 진짜 주목해 봐야할 부분은 다음에 있다.

인터넷으로 논술강좌를 들은 한 아이와 대화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강사 선생님이, 토론도 그렇고 논술도 그렇고, 중간 지대는 없고 오직 찬/반 두개밖에 없으니깐, 자신의 속생각과는 다르더라도 일단 어느 한 입장을 정해서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 공격해야 하는 거라고, 어떤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왜'라고 물었을 때 스스로 답변을 갖춰 놓지 못하면 결국 지고 마는 거라고..." 그 아이는 논술과 토론이 몹시 두렵고 공포마저 느껴지는데, 아마도 강사 선생님이 자꾸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 64p

위와 비슷한 경우가 내게도 있다. 예전에 이와 관련한 포스팅을 올린적이 있는데, 바로 100분토론과 관련해서다. 08년 말 미네르바가 체포되고 100분토론에서 이를 다룬 것을 인터넷으로 보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을 지나가던 다른 공익 얘가 뭐보냐고 묻길래 100분토론 본다고 말해줬다. 그러더니 그 놈이 하는 말. "누가 이겼어요?" 나는 좀 당황하긴 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야, 토론에 이기고 지는게 어딨어? 다 서로 다른 의견 주고받는 건데..."  그러나 그 놈은 또 말한다. "에이,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그 놈한테 토론이라는 것은 어떤 합의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대화의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스포츠였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의 내용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란한 말빨과 공격적이고 선정적인 언사로 상대의 말문을 막아버리고 청중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기술'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100분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은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우리사회에 부정적인 효과를 만들어낸 면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부정적인 면을 바탕으로 밥그릇 챙긴 대표적인 인물이 진중권이 아닌가 생각도 들고...
 

우리는 이렇게 대화와 토론 조차도 당장의 승자와 패자를 가름해야만 하는 아주 고약한 사회 속에 살고 있다. 

        *             *             * 

 

아래도 그냥 인상깊었던 구절.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알 수 없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며, 생과 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의 바깥을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를 살면서 '저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 한 개체에게 죽음이란 말하자면, '있음'이 어느 순간 '없음'으로 화(化)하는 것일진대, '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 없이 이 기막한 변화를 우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생에 집착하고 생을 사랑할 수록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나 또한 저렇게 죽어갈 것이라는 공포가, 함께 자라난다. 결국 이것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 -- 신앙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인간은 지난 수천년간, 종교(宗敎) --으뜸가는 가르침 -- 라는 이름으로 이 신앙의 체계를 일구어왔다. 이것은 생과 사의 신비에 맞닥뜨린, 인간 존재의 가장 치열한 정신활동의 결과물이다. 놀랍게도 세상 모든 종교들은 하나같이 '저 세계'는 '이 세계'의 앞뒤에 잇닿아 있지 않다고 가르쳤다. '저 세계'는 바로 '지금, 여기'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생산과 노동, 이 모든 억조창생들과의 관계맺음이 결국 '저 세계의 전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열쇠는, 영원한 삶은 바로 이 현재의 삶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자기가 바로 빵이자 포도주인, 육화된 진리라고 가르쳤다. 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항상 더불어 빵을 떼었고, 그곳이 곧 하늘나라임을 선포했다. 공자는 가장 그리운 모습을 '불빛 아래 둘러앉아 같이 밥을먹는, 대동(大同)의 사회'로 표현했다. 해월 선생은 사람이 하늘이고, 밥이 하늘이므로 사람은 곧 밥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밥 한그릇에 세상의 이치가 다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빵과 밥이 부족했던, 이른바 낮은 생산력의 징표가 아니라, 인간의 숙명임을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 진리에 고개 끄덕인다면, 이제 이런 질문들이 생겨난다. 밥을 위한 노동, 밥을 위한 희생, 밥의 나눔, 거기에 깃드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우정과 사랑, 이것 외에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만약, 사람이 밥을 위해 살지 않고 휴대폰과 컴퓨터와 자동차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어떤 세상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발전된 세상'이라고 굳게 믿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 할 수 있는가?

- 70-1pp

이거 다음 다음 페이지에 어떤 아이가 일기처럼 쓴 글이 인용되어 실려있었는데 대충 내용이 이렇다. 산골마을에 사는 일근이라는 아이가 옆 동네 놀러갔다가 그 동네 춘근이라는 아이랑 싸웠는데 춘근이가 먼저 "야이 씨발놈, 개새끼야, 좆만새끼, 호로자석..." 뭐 이런 욕을 했댄다. 그런데 여기에 대꾸하는 일근이의 욕이라는 것이 고작(??) "야이 참나무야, 대나무야, 밤나무야, 옻나무야..." 이었단다. 이걸 보자니 또 생각난게 있었다. 얼마 전 새로 들어온 공익 얘랑 짱게를 먹으러 갔다가 맘에 안다는 공무원 흉을 같이 보고 있었는데, 그 놈이 갑자기 욕이랍시고 한다는 소리가 "다들 대가리에 뻐큐를 처박아야 돼"였다. 나는 한편으론 처음들어보는 이 프리스타일 욕에 감탄하고, 그 아이의 뛰어난 '창조력'(??)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그 아이의 눈에 일근이 같은 얘가 눈에 띄었다면 그저 밥맛없는 꺼벙이 쯤으로 여겨졌을까?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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