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학 함께 읽기
김도현 지음 / 그린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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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애운동이 우리사회에 어디에,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묻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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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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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생태미학, 우리시대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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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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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무 빈번하게 등장하는 한자어들 때문에 읽는데 애를 먹긴 했지만, 재밌는 소설이다.

여기서 재밌다는 말은 약간의 썩소를 담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조선놈으로 태어난 것을 다시 한번 진정으로 부끄러워 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놈들은 '외교'를 모른다. 21세기 조선놈들은 세계가 다자주의로 재편되고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있다는 객관적 정세를 외면하고 오매불망 태평양 건너 코쟁이들 나라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들의 조상들은 강산이 골백번 바뀌어도 오로지 천자의 나라는 한족의 나라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남한산성>은 그렇게 대가리 회전속도가 거의 소달구지 수준인 조선 사대부들의 추태를 담은 소설이다.

청나라 칸이 한반도의 정 가운데까지 밀고 들어와 성곽을 맞대로 조선 왕을 죽일까 살릴까 저울질 하고 있는 마당에 조선 왕과 사대부들은 명의 황제를 향해 망궐례(望闕禮; 임금을 공경하고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한 의식으로, 임금을 직접 배알하지 못하는 지방 관리들이 행했다. 임금이 정월 초하루나 동지, 성절(聖節, 중국 황제의 생일), 천추절(千秋節, 중국 황태자의 생일)에 왕세자와 조정의 신료들을 거느리고 황제가 있는 북경 쪽을 향하여 예를 올리던 의식도 망궐례라고 한다. 여기서는 후자를 말함)를 올린다. 대가리가 안굴러가면 팔다리가 고생이라고, 임금과 사대부가 그 지랄을 해대는 통에 고생은 남한산성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다 뒤집어 쓴다. 급기야 나중에 가서는 군졸들이 싸우지도 않을 거면서 성문 쳐닫고 뻣대지말고 걍 나가서 항복하자고 성화를 낸다. 물론 지체높으신 사대부양반들은 천자에 대한 예를 갖춘답시고 반대를 한다. 그리고 아우성쳐대는 군졸들을 한 사대부 양반께서 칼을 빼드신다. 허허. 그러나 이미 달관의 경지에 오른 우리 군졸들께서는 전혀 기가 죽지 않는다. "그 칼로 나가서 적과 싸우시지요?" 그러자 사대부 왈, "사대부가 어찌 전쟁의 일을 알겠느냐?"

밖에 나가선 찍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안에서만 괜히 뒷짐지고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대는게 꼭 오늘의 뭐시기들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이 양반들의 탁상공론의 추태는 가히 진기명기감이다. 초소를 지키고 있는 군졸들이 겨울날씨에 동상에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일어, 빈집 초가지붕을 뜯어 볏짚으로 군졸들이 쓸 깔개를 만들어 올렸다. 그런 상황에서 영의정이라는 양반이 한다는 소리가, "싸움을 하고자 한다면 말이 튼실해야 할 텐데 말 먹이 할 것이 없습니다. 군졸들이야 사람이니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 하나 말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부디 깔개를 거두시어 말먹이 할 죽을 만드소서" 영의정의 이런 발언에 예조판서인가가 한 마디로 일갈한다. "줬다 뺏으면 군졸들이 삐진다."

이렇게 한심한 꼴을 하고 있으니 적의 우두머리인 청나라 칸이 조선의 임금과 사대부를 걱정해주기에 이른다. 다음은 청나라 칸이 조선 왕에게 보낸 문서.(본문 284-5쪽) 그 걱정해주는 맘씨가 하해와 같다. 글솜씨도 칸 자신의 말처럼 군더더기 없이 쭉쭉 뻗어나가는 것이 너무 빼어나 옮겨적지 않을 수가 없었다. ㅠ.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나 환란을 자초하니, 너의 아둔함조차도 나의 부덕일진대, 나는 그것을 괴로워하며 여러 강을 건너 멀리 내려와 너에게 다다랐다.

나의 선대 황제 이래로 너희 군신이 준절하고 고매한 말로 나를 능멸하고 방자한 침월侵越로 나를 적대함이 자심하였다. 이제 내가 군사를 이끌고 너의 담 밑에 당도하였는데, 네가 돌구멍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싸우려 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몸뚱이는 다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을 굴속으로 처박은 형국으로 천하를 외면하고 삶을 훔치려 하나, 내가 너를 놓아주겠느냐. 땅 위에 삶을 세울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또 구걸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을 훔칠 수는 없고 거저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너는 명을 아비로 섬겨, 나의 화포 앞에서 너의 아비에게 보이는 춤을 추더구나. 네가 지금 거꾸로 매달린 위난을 당해도 너의 아비가 너의 춤을 어여삐 여기지 않고 너를 구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냐.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소게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너는 지키기를 원하느냐. 너의 지킴이 끝날 때까지 내가 너의 성을 가두어주겠다.

너는 내가 군사를 돌이켜 빈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느냐. 삶은 거저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말했다.

너는 그 돌구멍 속에 한 세상을 차려서 누리기를 원하느냐. 너의 백성은 내가  기른다 해도, 거기서 너의 세상이 차려지겠느냐.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너의 도모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주겠다. 너는 두려워 말고 말하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러나 조선 왕은 끝까지 돌구멍 속에 대가리 처박고 있다가 궁댕이로 성문을 열고 나가서는 칸에게 똥침을 받고 만다.

아, 이래서 세상은 대가리를 써가면서 살아야 하는거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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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두비 - Bandhobi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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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작년과 올해, 두편의 이주노동자 문제와 관련된 소설을 읽게 되었다. 하나는 박범신의 <나마스테>, 또 하나는 김려령의 <완득이>. <나마스테>가 한국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이주노동자와 그를 포함한 이주노동자 공동체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비극적인 시련을 과연 작가가 표현해 내는 것 이상의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슬프게 표현해 냈다면, <완득이>는 이주노동자 어머니를 둔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통해 그것이 비극이 아닌 경쾌한 삶의 에너지, 그리고 내 안에 오롯이 박혀있는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임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나마스테>와 <완득이> 모두 훌륭한 작품이지만, 나는 이 구리고 구린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불쌍하고 때론 불결한 이미지로 범벅이 된 이주노동자의 삶을 경쾌한 목소리로 전달해 준 <완득이>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에 나는 <완득이>에 필적할 만한 영화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이 영화는 임금체불에 시달리는 이주노동자와 거침없는 행동과 말투로 당당한 포스를 자아내는 10대 소녀의 아슬아슬한 러브스토리(??)를 통해 한국사회의 치부를 여과없이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그려내는 한국사회는 한 일주일은 머리 안 감은 사람처럼 비듬 투성이이다. 아닌척 하고 앞머리에만 대충 왁스를 범벅하고 돌아다니는, 이 비듬으로 떡이 된 한국사회의 뒷통수는 <반두비>에 의해 하나둘씩 경쾌하게 까발려진다.

"저 사람이 끼어들어서..."

카림이 컵라면을 먹고 있던 편의점에서 우연히 술에 취한 중년 남성이 로또를 사러 왔다. 그러나 편의점 직원은 8시가 넘었기 때문에 안된다고 한다. 그러자 중년 남성은 "너 지금 내가 명박이 믿고 뉴타운 투자했다가 쪽박찬 놈이라고 무시하는거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편의점 직원에게 시비를 건다. 이에 편의점 직원 왈 "그걸 왜 시급 3500원짜리한테 따지세요? 명박이 한테 가서 따지지!" 그렇게 시비가 붙은 둘은 결국 멱살잡이를 하는데, 이를 보다 못한 카림은 둘의 싸움을 말린다. 그런데 이 둘은 그 사이에 눈빛이 통했는지,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갑자기 연대를 형성해 싸움의 책임을 카림에게 덮어씌운다. 

뉴타운으로 쪽빡차고 로또에 하룻밤 희망을 걸다가 그게 여의치 않자 시급 3500원짜리한테 분풀이를 하고, 그러다 경찰서까지 끌려가자 엉뚱한 사람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게 바로 '내국인'들의 모습이다. 여기서 카림을 둘러싼 상황은 애니메이션 영화 <마다가스카>에서 동물원을 뛰쳐나온 동물들이 친구였던 사자가 야생성을 되찾아 점점 자신들을 고깃덩어리로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 해 일종의 '제물'로 바닷고기를 회를 떠서 사자에게 갖다 바치던 상황과 겹쳐진다. <마다가스카>에는 온갖 금수(禽獸)들이 등장하지만 오로지 바닷고기들만이 눈빛이 없고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나온다. 중년 남성과 편의점 직원의 눈에 비친 카림 또한 마찬가지다. 실업자든 시급 3500원 짜리든간에 '한국'이라는 정상국가의 구성원이라는 계급적 지위를 잃고 싶지 않은 이들은 이주노동자라는 무표정의 제물을 경찰이라는 국가기구에 상납한다. 그리곤 중년 남성은 이렇게 내뱉는다. "이딴 새끼 그냥 지네나라로 보내 버려요. 괜히 여기서 우리 일자리나 뺏지 말고." 한번도 카림이 했던 3D업종에서 일하겠단 생각을 한 번도 안해 봤을 법한 양반이. 아마 이 중년 남성도 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을 찍고,  08년엔 촛불을 들고 시청광장에 나와 "이명박 개새끼"를 외쳤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 지금은 "재수없는 깜댕이"를 읊조리고 있다.

"자지 하나 달고 들어와서 빌붙는 주제에..."

민서의 절친이 된 카림은 민서의 친구들과 영어학원 원어민 강사와의 만남에도 초대된다. 그 만남에서 카림은 내내 굳은 표정인데 반해, 원어민 강사는 김치가 햄버거보다 맛있다느니, 한국사람들 너무 좋다느니 수다를 떨고 있다. 카림의 어두운 표정이 불만이었던 민서는 돌아오는 길에 카림에게 화를 내며 말한다. "후진국에서 와서 그래." 하지만 카림은 그 잘난 선진국에서 온 원어민 강사가 한국 여자들을 두고 뭐라고 했는지 상기시킨다. "한국여자들 다루기 쉽데. 그게 무슨 말이겠어? 한국여자들 창녀같다고 말한거야." 카림과 원어민 강사의 영어대화를 못 알아듣고 내내 웃음만 짓던 민서가 이제서야 그 뜻을 알고 빡돈다. 그리고 학원에서 만난 원어민 강사의 '자지'를 휘어잡고는 말한다. "너 어제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봐. 한국여자들 다루기가 쉽다고?"

남성의 상징(??)인 이 '자지'는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코드로 자리잡고 있다. 주유소 알바에서 짤린 민서는 마사지 업소에서 남성의 '자지'를 만져주는 일을 한다. 남자들 세계에선 그것이 '남근의 상징'일지 몰라도 민서에게는 그저 돈벌이에 쓰이는 도구일 뿐이다. 게다가 업소에 출입하는 남성들은 그런 성적 서비스를 받는 것에 금전적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이는 곧 그 물건이 그냥 '물건'일 뿐이라는 거다. 원어민 강사의 자지를 휘어잡고 "다시 한번 말해봐"라며 윽박을 지르고, 카림을 출입국사무소에 신고한 민서의 '아빠 지망생' 기홍에게 "자지하나 달고 들어와서 빌붙는 주제에..."라는 일격을 가한다. 카림의 1년치 월급을 떼먹은 사장집에 찾아것는 "만수야, 너 언제 인간될래?"라고 말하며 집안을 때려부순다. 자지하나 달고 세상을 호령하는 남성들이 여성, 그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 없어보이는 여고생에게 시종일관 엿을 먹는 거다.

이 영화의 핵심은 '여성'의 세계에서 최하층인 여고생이 '남성'의 세계에서 최하층인 이주노동자와 '반두비'로서 연대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서가 다른 남성들과의 관계에선 늘 공격의 타겟이 되었던 '자지'는 카림과의 관계에서만은 친밀함의 코드로 상징화된다. 이 영화에 '19금' 딱지를 붙이고 '원조교제를 조장한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인간들이 볼 때에는 불순한 장면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어떤 사람들은 카림이 순진한 여고생 꼬득여서 성관계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담긴 장면이라고 하지만, 그런 말 하는 인간들은 영화 안보고 지껄이는게 분명하다. 카림은 분명 민서의 손길을 뿌리쳤고, 집에 돌아와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물론 나중엔 둘 사이의 관계가 더 깊어져 바닷가에 가서 키스를 나누기도 한다. 근데 그게 뭐 어때서? 남녀가 사랑한다는데 누가 말릴꺼야? 20살 가까이 나이차이 나는 사람들끼리도 잘 만 결혼하는 세상에 여고생과 29살 청년의 사랑이면 예쁘게 봐줄 수도 있는 거지... 혹여나 무슬림 남자들은 여성들을 명예살인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인간들이 있다면 난 이영애씨처럼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나 잘하세요."

적어도 이런 말은 그 무슬림 나라에 가서 섹스관광 즐기는 남정내들이 벅지글거리는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는 아닌거다.

촛불집회, 그리고 한국사회의 풍경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2008년 한국사회를 집약하는 상징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 시작부터 학교 정문 바로 옆을 비추면서 서울시 교육감 선거 벽보가 보이고, 민서가 던져놓는 가방엔 촛불소녀 뱃지가 달려있다. 신만수 사장집에 쳐들어간 민서는 테이블에 놓인 조선일보를 집어들고 흔들며 "이 따위 신문이나 읽고 있으니까 니가 쓰레기처럼 살지"라고 말한다. 심지어 마사지 업소를 그만둔 민서는 대문짝만한 광우병 소 반대 현수막이 걸린 서점에서 알바를 한다. (눈치 챈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서점은 바로 서울대 앞 고시촌에 있는 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이다.)

그런 역동적인 2008년의 모습을 담아낸 영화를 보면서 씁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온 국민이 한 목소리로 '광우병 반대'를 외쳤던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이주노동자는 타자로 남아있고, 내국인들이 쳐 놓은 욕망의 울타리에 이주노동자는 '출입금지'를 선고받았다는 점 또한 영화는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편의점에서 명박이 탓하던 중년남성과 민서가 하나가 아니듯이 2008년 촛불도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가 아닌것을 하나라고 외치는 사이 우리는 카림을 울타리 밖으로 또 추방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점이야 말로 촛불에 동의했건 안했건 간에 '내국인'들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아했던 한국사회의 지저분한 뒷통수가 아닐까? <반두비>는 그런 내국인들의 얼굴 앞뒤로 거울 하나씩을 갖다놓고 "자, 니 뒷통수좀 봐. 얼마나 더러운지..."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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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반다나 시바 지음, 한재각 외 옮김 / 당대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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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이 나에게 뭐에 관심이 많냐고 물어보면 서슴없이 '생태주의'라고 말한다. 그래, 나는 생태주의자다. 그 전까지 나는 '어렴풋이' 맑스주의자였고, '희미하게' 알튀세르주의자(??) 였는데, --왜냐면 사실 나는 이 사람들이 '직접' 쓴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복잡하고 꼬불꼬불한 해설서들만 읽었을 뿐... -- 이제는 자신있고 분명하게 나를 ~~주의자 라고 소개할 수 있다. 나는 '생태주의자'라고!!

 

그렇다고 내가 '생태'라는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게 오래된 일도 아니다. 작년 금융위기와 함께 불어닥친 식량위기, 먹거리위기 등을 접하면서 생태위기를 인식할 수 있는 길들이 조금씩 엿보이기 시작했고, 그런 길들을 조금씩 따라가다보니 생태주의라는 신비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생태주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니 맑스주의도, 알튀세르주의도, 나아가 페미니즘도 나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생태주의는 나에게 '빛'과 같은 존재다. ㅋㅋㅋㅋ

 

 

이런 생각에 쐐기를 박아 준 책이 바로 반다나 시바의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이다.

 

내가 기존에 읽었던 생태주의에 관련된 책들이 생태계 파괴에 자본주의라는 구체적인 생산체제가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분석했다. 그런데 시바의 이 책은 한 단계 더 들어간다. 이런 생태파괴를 가능했던 자연과학이 밑바탕에 깔고 있던 철학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이다. 바로 근대과학의 '환원주의'말이다. 생명공학은 그런 환원주의가 낳은 이 시대의 '괴물'이다.

 

이런 논의 속에서 그녀는 최근의 생명공학이 여성의 모성에 대한 권리를 파괴하는 사례들을 들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에코 페미니즘'에 대한 주장을 펼쳐낸다. 생태주의를 매개로 근대과학비판, 페미니즘, 자본주의 농업 비판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정말 내공이 장난 아니다!!!

 

 

이 정도 찌질한 서평으로는 이 책의 위대함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빨리 내공을 쌓아서 더 잘 표현해 봐야지... 이제 본격적으로 생명공학 비판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다음 도전 상대는 리처드 르원틴의 <DNA 독트린>이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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