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역사 강의 - 유토피아 사회주의에서 아시아 공산주의까지 새움 총서 1
한형식 지음 / 그린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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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이 글은 책 자체에 대한 평이기도 하고, 백승욱 교수의 서평에 대한 단상이기도 하다.


일단 백 교수의 지적에 대해서는 일단 일리있는 지적이란 생각이 든다. 백교수가 지적한 문혁과 관련된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는 것들이긴 하지만) 오류가 있다면 응당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겠고,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당'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부재하다는 것도 나도 책을 읽으면서 살짝 그리 느꼈던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는 독자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백 교수가 지적한 얼마간 학술적인(물론 그것이 불가결하게 실천과 연결되는 것이긴 하지만) 지적들은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그와 전혀 다른 뉘앙스의 언론 서평들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참세상의 최인기, 오마이뉴스의 임승수의 서평만 봐도 책에 대한 호평일색인데, 이게 맑스주의를 바라보는 이들의 관점이 백 교수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좀 다른 문제도 있는 것 같다. 내 관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내용상의 부족함을 살짝 눈감아 준다고 본다면 매우 훌륭한 대학 1-2학년용 세미나 교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책의 서술과 형식이 뛰어나기 때문인데, 부족한 식견이나마 맑스주의 개설서 중에 이렇게 쉽게 쓰여진 책은 사실 잘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맑스주의 입문서로 그나마 대학 저학년 사이에서 많이 읽히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마르크스의 사상]도 이만큼 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알렉스의 책이 한형식의 책보다 풍부하고 깊이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형식의 책은 (변호론적 입장이긴 하지만) 맑스주의가 남겨놓은 오류에 대한 나름의 해명을 시도하지만, 알렉스의 책은 아예 그 문제를 부정한다. 이렇게 무턱대고 '맑스가 짱이에요!'를 외쳐대는 책이 대학 신입생들에게 먹힐리 없으니 이 책 읽지 말자고 한다해도 딱히 다른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로 맑스를 해석한 온갖 2차 문헌들 또는 알튀세르가 해석한 맑스에 대한 또다른 2차, 3차 문헌들을 짬뽕해서 보는 방식으로 대체 하곤 했는데, 내 경험에 기초해 평가해보자면 그런 식이라면 아예 안하는게 낫다. 세미나 간사를 맡은 사람조차도 제대로 읽어오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요즘 대학생들의 무식함을 비난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도 없다. 최소한 입문서를 표방하고 나오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좀 더 세속의 언어에 가깝게 쓰여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굳이 비교하자면 내가 [맑스주의 역사 강의]를 읽고 느낀 반가움은 예전에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나다]를 읽고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것이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강신주의 책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알튀세르를 소개하면서 오직 '클리나멘'이라는 소재를 붙들고 '우발성의 유물론'만을 강조하며 에피쿠로스-맑스-니체-들뢰즈 등의 계보에 집어넣는 게 올바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책 후반에 나오는 마음의 수양 등에 관련한 부분은 대체 어떻게 감당해 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약간 뜬금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순도 100%의 책을 찾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처음 접했던 2006년에 여기저기에 세미나 교재로 써먹어 볼 것을 권하고 다녔다.(내가 하도 광고하고 다녀서 실제로 교재를 바꾼 이들도 있었다) 대개 학회에서 철학 세미나 할 때 많이 읽힌다는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보다는 실용성이 있어보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앞으로 누군가가 나에게 맑스주의 세미나 교재로 뭐가 좋겠냐고 묻는다면 (약간의 망설임은 있겠지만) 나는 한형식의 [맑스주의 역사 강의]를 권하겠다. 망설임 속에서도 굳이 이 책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자면, 이 책 만큼 맑스주의를 둘러싼 세간의 오해를 성실하게 해명하고 이겨내려는 책이 없기 때문이다. 스탈린에 대한 악마화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세속의 시선과 눈높이를 맞춰가며 그 시선의 맹목을 깨려는 노력을 이 책 만큼 성실하게 하는 경우가 있던가?


굳이 예를 들자면 이런거다. 예전에 학교에서 페미니즘 세미나를 할 때 콜론타이의 <공산주의와 가족>이란 텍스트를 봤다. 그런데 얘들이 텍스트 자체에 대한 이해는 제껴두고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갑자기 북한이 어쩌니, 김일성이 어쩌니 이런 얘기를 하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오로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레드 컴플렉스에서 벗어납시다'라는 것 말고 뭐가 있었나? 이 책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맑스주의적 관점에서의 논박이 가능하다는 거다.


이 책은 어차피 '맑스주의의 쇄신'을 염두해 두고 쓰여진 책이 아닌 것 같다. 그걸 감안하고 보면 책의 의도는 성공한 거다. 여전히 맑스주의는 현실 비판에 있어서 가장 유효한 도구이지만 그 도구를 사용함에 있어 오직 '본연의 맑스로 돌아가자'는 선언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맑스주의는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모습을 변모시켜 왔음을 확인했다는 선에서 보자면 충분히 성공이라는 거다. 사실 이 정도 노력을 했는데도 백 교수의 호된 비판을 받는 것은 저자로서는 좀 억울한 면이 있을 것 같다. 백 교수는 그린비 출판사와의 문제 때문에 이 책을 비판한 듯 한데, 내가 볼 땐 출판사 문제만 아니라면 비판의 화살은 원숭이 따위를 끌어들여 맑스를 설명하려는 임승수에게 맞춰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이 책이 미흡한 점이 있는 건 사실이니 나중에 개정판이 나올 경우를 대비해 몇 가지 독자로서 부탁만 하고 끝내보련다. 첫째, 책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아시아 공산주의 얘기는 차라리 빼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책의 분량 때문에 소략하는 방식으로 줄인 것 같은데, 좀 억지스럽게 동남아 지역의 공산당 문제를 하나하나 다 설명하려다 보니 전체적인 균형만 어지럽힌 느낌이다. 그냥 아시아 공산주의 문제 자체가 아직 해명되지 못한 부분이 많고, 더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새움의 다음 세미나에서 더 자세히 얘기하겠다 정도만 얘기하고 끝내는게 낫지 않았나 싶다.

둘째, 내가 봐도 제2인터 논쟁에 대한 서술은 진부한 감이 있다. 그 뒷부분의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라서 재밌게 읽긴 했는데, 그나마 좀 아는 사람이 읽으면 진부하게 느낄 것 같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이 진부함이라는 게 단지 내용의 진부함이라기 보다는 해석의 진부함이기 때문에 보완이 시급한 것 같다. 제2인터에서 개량이냐 혁명이냐 하는 논쟁을 소개하는 부분에 할애된 분량에 비해서 충실도는 좀 떨어지는 것 같다.

셋째, 책의 뒷날개를 보면 새움총서를 소개하면서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강요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쓸데없고 사실과도 맞지 않는 것 같다. 책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저자는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군데군데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에 기초한 해석이 보인다. 맑스주의 자체가 원래 당파적인 입장에 기초한 것이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아니 당연한 거라 생각한다. 이 당연한 것을 굳이 중립적인 입장에 선 것 같은 포지션을 취하며 숨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입문서의 형식을 띄면서 갖는 이 책의 장점은 알겠는데, '국정 교과서'를 쓸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노력은 안 하는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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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리모 레비’ 읽기 - 우리는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는가?

 

쁘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서경식,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창비
 


 

쁘리모 레비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서경식과 김상봉의 대담집 『만남』을 통해서였다. 재일조선인 2세이자 자기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뿌리와 모국어 상실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서경식과, 서로주체성의 철학자 김상봉. 이 두 학자의 고뇌 가운데에는 쁘리모 레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기 삶과 학문 속에서 이 세계의 총체성을 온 몸으로 고뇌하는 이 두 사람에게 쁘리모 레비는 대체 어떤 의미란 말인가? 스스로 ‘인간’이라 여겨왔던 내가 아직까지도 온전히 보고 받지 못했던 인간의 어떤 모습을 쁘리모 레비가 폭로했기에 그들은 ‘쁘리모 레비’라는 화두를 끌어 안고 있는 것일까?

쁘리모 레비가 전하는 경험과는 좀 다르지만 내가 겪은 얘기부터 시작해 보자면, 고등학교 때 우연한 기회에 충북 음성에 있는 꽃동네라는 장애인 시설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사실 봉사활동이라기보다는 무급노동을 하고 왔다는 느낌이 더 강하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과 함께 뭘 같이 한 것도 아니고, 공장 같은 분위기의 세탁실에서 나오는 세탁물을 카트에 실어 나르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같이 갔던 다른 이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지나가다 창문 너머로 시설 장애인과 가끔 눈을 마주치는 정도였던 것 같은데, 그 후 10년여가 지난 오늘에 와서 그 창문을 사이에 두고 그 익명의 장애인과 내가 나누었던 눈빛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의 동공에 비치고 시신경을 타고, 마지막엔 내 뇌리에 박힌 그는 그 짧은 순간 나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나는 정말 그를 바라봤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동공이 그리로 향해 있던 순간에 신경세포의 운동으로 그의 이미지를 잠시 뇌 속에 담아둔 것일까? 그 봉사활동을 가면서 잠시라도 스쳤던 모든 이들은 굳이 자기소개를 하지 않아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에게 인지시키고 있었다. 참가자들을 인솔하던 사람은 근로복지공단 직원 일테고, 여러 참가자들은 대전 어디쯤에서 온 내 또래의 산재 노동자 자녀들이다. 우리 스스로가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자신의 ‘사회적 근거’를 드러낼 하나 이상의 표식이 있다. 이것을 통해서만 나는 타인을 하나의 ‘존재’로서 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잠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되었)던 그 장애인과 나는 서로 어떤 표식을 나누었던걸까? 혹시 나에게 잠시 세탁물 카트를 잠시 세워두고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나는 그날 만났던 다른 친구들에게처럼 다니는 학교는 어딘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동생 또는 형은 있는지를 물어 볼 수 있었을까? 내가 마음을 좀 열고 입을 연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왠지 그 대화 속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을 것 같다. 장애인 수용 시설이라는 벽의 존재는 내 마음과 상관없이 그를 처음부터 뿌리 없는 존재처럼 여기도록 만들고 있었다. 꽃동네 시설 생활 장애인 누구누구라는 호명은 그런 인상을 지워내기엔 부족하다고 생각되었다.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 겪었던 1년 동안의 경험을 전한 쁘리모 레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 장애인과 내가 나눴던 눈빛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레비가 수용소에서 마주쳤던 독일인들의 시선이 바로 내가 그 장애인을 향해 던졌던 그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유태인이 던지는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인간으로서 레비는 절망했던 것이다. 아마 수용소에서 근무하던 독일인들에게 유태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말라는 규칙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고, 유태인의 눈이 아니라 그 뒤의 벽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던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이자, 독을 풀어 페스트를 퍼뜨린 ‘범죄자’로 역사에 낙인 찍힌 ‘불결한’ 유태인들을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독일인들에겐 없었던 것이다.
 

레비의 글은 증언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실제로는 질문(또는 요구)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진술은 여지없는 질문이자 요구이다.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책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멀리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없었으며, 접근할 수도 없었다. 나치스 체제는 용의주도하게 노예와 주인이 최소한의 접촉만 하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도 주인공인 필자와 SS와의 만남은 딱 한 번만 묘사되며 그것도 나치스 체제가 붕괴되고 수용소가 해체되던 그 마지막 며칠 사이에 일어났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쁘리모 레비, 「독자들의 물음에 답한다」中)
 

이런 고통스러운 고백 속에서 레비는 ‘이것이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는가’라고 절규하며 좌절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그는 책 속에서 유태인을 박해했던 이들에 대해 온갖 저주를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을 쓸 때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선 언어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들을 사용하고자 했다. 나는 내 언어가 객관적일수록,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을수록 신뢰를 주고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정당한 증언이 제 기능을 할 것이며 바로 그 때 심판의 장이 마련될 것이다. 심판관은 바로 여러분이다.”(같은 글)
 

레비의 마지막 발언, ‘심판관은 바로 여러분이다’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독자 개개인이 나름대로 객관적인 판단과 평가를 해보라는, 저자의 여유를 내비치는 말도 아니고 우리에게 선뜻 심판관의 자격을 부여해주는 선의의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 스스로 심판관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라는 ‘요구’라고 생각한다. 2차세계대전 이후 전범재판이 한국전쟁의 발발과 같은 급작스러운 사태로 인해 유야무야 흘러가고,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경제재건’이라는 미명하에 가해자들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을 보면서 레비는 분노 속에서 다시금 온전한 심판이 이뤄지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판관이 되기보다는, 태연히 심판관의 가면만을 훔쳐 쓰고 뻔뻔스럽게 공범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전후 수많은 독일 국민들은 아우슈비츠, 반유대주의와 같은 단어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이제 과거는 잊자고, 그런 기억들은 새로운 출발대 앞에 선 우리의 발목만을 잡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몇몇 사람들은 부정과의 투쟁에서 고통 받고 죽어간 수없는 독일인이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내며 이 비극을 ‘독일인의 죄’로 이해하길 꺼려했다. 한나 아렌트도 『파리아로서의 유대인』에서 (독일인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수치스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많은 이들은 아렌트가 했던 이런 류의 말에 기대어 죄를 저지른 독일인과 자신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으려 했다. 그러나 서경식이 말하듯이 아렌트의 이 말은 누가 어떤 입장에서 말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망명 유대인인 아렌트가 “인간임을 수치스럽게 느낀다”고 말할 때, 만약 그녀 앞에서 어떤 독일인이 “그렇다, 당신 말 그대로다”라며 어깨 위의 짐을 벗고 떳떳해한다면, 그 광경은 그로테스크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는 개인으로서 ‘죄’가 없는 경우에도 자신이 독일인임을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야 비로소 피해자와 가해자가 동일한 평면 위에서 서로 마주한 채 ‘인간’ 공통의 책임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서경식, 212쪽)
 

서경식이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역(易)유토피아를 지상에 불러온 우리들의 ‘전통, 관습, 역사, 언어, 문화의 총체’를 우리 스스로가 피 흘릴 정도의 노력으로 해부하고 개조해가야 한다. 내가 그의 말처럼 ‘독일인’이라 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역(易)유토피아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비는 이탈리아 국민으로 태어나 이탈리아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왔으나, 어느 순간 사회의 ‘불순물’로 색출되어 영구 제거 대상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자기 내부에 외부자를 만들어 고립시키고 절멸하고자하는 욕구는 지금도 여전하다. 꽃동네에서 눈을 마주쳤던 나와 익명의 장애인도 그런 장벽 앞에서 머뭇거렸던 것이다. 그 머뭇거림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나는 스스로 ‘한국인(또는 비장애인) 전체가 그를 이름 없는 존재로 몰아넣은 것도 아니고, 나는 그런 짓을 했던 이들과는 다르다’고 스스로를 위안해 왔던 것이다. 그런 무력한 눈빛의 관계 속에선 그도 나도 인‘간’(間)일 수 없었다. 
 

이 지점에서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절규 어린 질문에 머물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내려 분투한다. 파시즘이 레비를 이탈리아라는 국민성 외부로 쫓아내고 절멸시키려 했음에도, 그는 역설적으로 ‘야만적인 파시즘’에 대한 ‘문명적인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강화한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외국인 동료에게 단테의 [신곡]을 들려주다가 어떤 구절에서 기억이 떠오르질 않는다. 여기서 그는 오늘 이 구절을 그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수용소에서는 목숨과도 같은 죽 한 그릇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수용소의 다른 이들을 통해서도 더 이상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보루’를 확인한다. 수용소에서 만난 슈타인라우프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레비, 57-8쪽)
 

그의 이런 시도와 발견은 기어이 다시 ‘국민’이라는 동일성의 내부자가 되겠다는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강제수용소의 지옥조차 소멸시킬 수 없었던 인간성에 대한 증언을 이탈리아인의 방식으로 해 낸 것이며, 이를 통해 근대의 보편적 인간상이자 유일하게 인권의 담지체가 된 ‘국민’ 범주 외부에서 인간의 척도를 다시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서경식, 156쪽 및 162쪽 참조) 마침내 그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절규에서 ‘바로 이것이 인간이다’라는 외침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여전히 ‘문명과 야만’이라는 과학주의적 합리성의 이분법의 한계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한계의 극한에서 사고하고자 하는 위대한 시도의 일면을 확인하게 되는 지점이다.
 

쁘리모 레비의 삶과 고민을 담은 책을 읽고 나니 김상봉이 서경식과의 대화 속에서 왜 그렇게 레비에 대한 질문을 던졌는지 알 것 같다. 그것은 단지 대화의 상대가 레비의 고민을 따라 인간의 척도를 고민하며 그의 묘지에 까지 다녀온 레비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이토록 극한의 자기상실을 경험한 레비가 던진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결국 그가 내놓은 ‘서로주체성’이라는 철학적 화두에도 온전한 답을 내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이라는 동일성에 스스로를 가두고 우리안의 외부자를 ‘타자’라는 변두리로 내모는 현실 속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진정한 서로주체성의 형성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심판관이 될 자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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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레디앙에 20대와 진보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양승훈의 블로그(http://flyinghendrix.net/684)에 가보니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저항’에 어울리는 가요는 ‘록’보다는 ‘힙합’이고, 안치환이나 윤도현 같은 목소리를 참을 수 없다고 한다. 모종의 ‘진정성’을 요구하는 노래 형식과 목소리를 그는 거부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노동운동이 가지고 있던 남성 노동자 중심의 계급성을 진정성과 동일시하는 정서가 기존의 민중가요 속에 녹아들어 갔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나의 취향은 그와 정 반대다. 남성 노동자 중심의 계급성을 요구하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다이나믹 듀오의 노래보다 안치환과 윤도현의 노래가, 또 그보다는 정태춘과 윤선애의 노래가 레비처럼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절규,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이다’라는 외침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저항의 형식과 재기발랄함, 전복성에서는 그가 좋아하는 그루브와 힙합이 더 나을 수 있지만, 대개 그런 노래들에는 인간의 자기상실에 대한 슬픔과 연민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적어도 저항의 노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아파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노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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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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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도 어느샌가 80년대를 배경으로한 소설들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진한 회한이나 상처들이 있어서 그 상처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는 소설들에 환멸을 느낄만한 처지는 아니지만, 그런 소설을 읽을 때면 그 시대를 모사(模寫)하려고 아둥바둥 거렸던 나의 20대 초반의 시절이 너무 우습게만 보여서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었다. 요즘은 잘 안 읽지만 공지영의 소설이 좀 그랬고, 작년 쯤에 읽었던 임철우의 [봄날]도 그랬다. 한참을 읽다가 너무 몰입하다 보면, '이거 너무 자기애에 빠지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떨치려다보면 너무 냉정하게 거리를 두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80년대를 살아냈던 이들이 느꼈을 비장함, 숭고 등등의 것들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오직 쿨하게 내 자신을 포장하기에 바쁜 21세기형 인간일 뿐인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런 이야기들과 마주친 상황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난처함일 것이다. 결국 이런 난처함의 결론은 당장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과 나를 이런 죄책감으로 인도했던 어떤 당위에 대한 인정 뿐이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내 분수를 따져볼 기회같은 건 당분간 유보되는 것이다.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일단 나에게 그런 초월적 죄책감을 짊어지게 하지 않아서 참, 고마웠다. 요즘들어 내 '그릇'이 아주 형편없이 작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만약 이런 80년대 후일담 소설이 나에게 뭔가 '역사의 무게' 같은 것을 짊어지게 하려 나섰다면 난 분명 절반도 읽지 않고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건 내가 실제로 그런 무게를 거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그럴 수도 있지만), 내 그릇이 그걸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아 금방 넘쳐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광주가 고향인 동갑내기 스물살배기들이 서로의 삶을 어르고 달래고 보듬고 안아주는 '예쁜 이야기'이다. 거기엔 의도적인 비장함이나 숭고미가 없다. '혁명적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공장으로 들어간 영금이가 있긴 하지만, 그의 이야기도 그리 호들갑스럽진 않고 담담하다. 비장함이 없는 대신, 아픔이 있다. 그런데 이 아픔은 나 자신의 고통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 때문에 아프다. 광주시내에 군인들이 들어온 날,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섰다가 군인들의 손에 친구 경애를 잃은 수경이는 몇날 며칠을 방안에 홀로 앉아 가슴앓이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

그 얘길 듣고 있던 해금이는 화내서 미안하고, 웃어서 미안하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더 할 수 없이 예쁘고 또 그래서 슬픈, 날 것 그대로의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우리 식구'들은 그들의 그런 마음을 이상하다고 한다. 이틀동안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이(利)유(由)'없이 사랑하고, 이유없이 아껴주고, 이유없이 웃어주고, 이유없이 슬퍼하는 이들의 예쁜 마음을 꼭 안아주고 싶었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만영은 가출해서 만난 남자와의 하룻밤으로 애를 가지게 된 승희를 이유없이 사랑한다. 고속버스 안내양을 하는 승희를 대신해 아동 보호소에 맡긴 아이를 자기가 아빠인양 돌봐주기도 한다. 고모부의 목재소에서 일하는 '환'이라는 아이를 아픔을 알게 되면서 해금은 밑도 끝도 없이 그를 보듬어 주려 한다. 그들의 이런 '이유없음'은 어떤 관계에서든 그 관계의 이(利)유(由)를 만들어야만 하는 나와 우리시대의 사랑과 우정을 초라하게 만든다.

나의 삶과 운동이 이들의 사랑을 닮아갈 수 있을까? 이들의 사랑을 닮아가는 일은 비장함으로 무장하여 어떤 초월적 숭고에 다다르려 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나에겐 그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 가슴도 아직은 뜨겁고 나에게도 그들처럼 '예뻤던 때'가 있었기에, 이미 나는 그들을 조금은 닮아있다고, 감히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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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2
조향미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좋은 시만 골라서 옮겨적으려고 목차에 체크했는데, 전부 다 옮겨 적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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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부터 해오던 동양사상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면서 두 권의 책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하나는 신영복의 '강의'이고, 또 하나는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다.  

 신영복의 책은 이 정도는 읽고 시작해야 뭔가 ABC부터 제대로 익히고 간다는 생각으로 읽었는데, 초반에 나오는 주역 파트의 내용이 마치 부적 해독 하는 것 같아서 머리가 지끈 거리다가 어찌저찌 그냥 동양사상에 혀끝만 대 보다가 끝냈다.  

강신주, '노장사상'에 대한 문제제기

반면에 강신주의 책은 좀 도발적으로 읽혔다. 원래 국가주의 사상가인 공자, 맹자를 읽을 생각은 없었기에 장자부터 시작한 건데, 강신주는 이 책에서 흔히 노장사상이란 이름으로 노자와 함께 묶여 사상사의 한 축에 자리하고 있는 장자의 위치를 완전히 다르게 포지셔닝 하고자 했다. 쉽게 말하면 노자와 장자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도발적인 쟁점을 가지고 시작하는게 오히려 나 같은 초심자에게는 더 반가운 일이었다. 신영복의 '강의'처럼 교과서적으로 이 사람 저 사람 훑는 것 보다, 어디에 포커스를 두고 고민해야 할 지 분명한 지점을 지적해주니, 첫 발을 떼기도 좋은 법이다. (물론 적절치 못한 쟁점에 초점을 두는 안내자를 만난다면 그냥 교과서같은 책을 보는게 낫겠지만 말이다.) 

며칠 전에 두번째로 읽으니 노자와 장자 사이의 쟁점이 이제야 좀 눈에 들어오는데, 강신주에 따르면 노자가 말하는 道는 사실상 국가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이라는 것이다. 그 유명한 <<道可道 非常道 /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도덕경의 이 유명한 구절은, 道를 현실을 초월한 존재적 위치에 두고자 하는 노자 사상의 형이상학적 근거라고 한다. 이와 함께 도덕경의 문장들이 한시적 어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등을 비추어 그것은 민중의 사상이라기 보다는 지배계급의 현실 순응주의를 반영한 사상이라고 말한다.  

반면 장자의 사상은 <소요유>에 나오는 大鵬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승인이 아니라 초월적 시야를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이를 통해 끊임없이 타자성을 확보하려는 '소통의 철학'이라고 한다. 한낱 물고기가 대붕이 되어 구만리 창공을 날아가는 것은, (매미와 텃새 따위가 비웃을 지언정) 자기 존재성의 틀을 넘어 타자와 소통하려는 노력의 소산인 것이다. 대붕이 구만리 창공을 날아 도달하려 했던 '남쪽'이 바로 그 타자적 공간이며, 이는 道를 초월적 자리로 보내버렸던 노자와는 다르게 '道는 걸어가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 장자 철학의 핵심이 된다.

기세춘, 淸談으로 왜곡된 노장사상을 텍스트로부터 살려내기

이 쯤 되면 노자-장자의 근본주의적 비판, 무정부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장자와 노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완전히 해석적 쟁점으로 옮아가 버린다. 그래서 나에겐 영 부담스러운 주제가 되어버리는데,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동양사상의 논의 지형 상, 출발이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중국의 관료제를 뒷받침하는 사상으로 유지되어 온 공맹사상이 아닌 이상, 그외의 사상들은 원전이 상당부분 남아있지 않거나 남아있어도 주석가들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어 온 바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노장사상과 같은 비주류 철학들을 이해할 길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내가 수강 중인 기세춘 선생의 노장사상 강의를 통해, 강신주의 주장들을 어설프게 나마 검토해 볼 여지들이 생기는 것 같다. 기세춘 선생은 강의 초반부터 이렇게 독설을 날리고 시작한다. 

   
 

 공자의 經學은 수천년 동안 종교적 정치적 필요에 의해 왜곡 윤색되었습니다. 한나라 때는 동중서에 의해 음양오행과 미신을 붙인 緯學이 되었고, 남북조시대는 하안 왕필에 의해 노자를 끌어다 붙인 玄學 또는 道學이 되었고, 송나라 때는 주희에 의해 佛老를 결합하여 理學이 되었고, 명나라 대는 禪宗을 덧붙여 心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노자의 사상이 엉뚱하게 공자 사상의 국가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온갖 세상의 달콤한 말들로만 윤색된 淸談이 되고 말았다는 것) 중세 유럽에서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듯이 말이다. 심지어 최근 중국공산당에서 자본주의로의 급속한 편입을 서두르며 내세운 구호인 '조화사회' 건설을 위해 끌어들인 것이 또 노자라는 것이다. 이를 위한 이데올로기 선전을 하기 위해 <도덕경 국제포럼>이라는 행사를 열어(2007.4.20) 1만 3천여명이 운집해 도덕경을 암송하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벌여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단다. 

아마도 강신주는 이를 근거로 노자 사상이 국가주의 철학이라는 것을 강조하겠지만, 반대로 기세춘 선생은 이것은 중국공산당이 "자본주의를 수용하려고 중국인민이 좋아하는 도덕경을 끌어들여 견강부회하려는 정치공작"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노자 사상이 본래부터 민중 사상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의 확실한 증거는 한말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과 장수가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로 삼았던 사상이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노자는 어차피 실존인물도 아니고 노자의 저서라고 알려진 것들은 대부분 구전되어온 민중의 설화 등을 후대에 집대성한 집단 창작물이기 때문에 강신주가 말하는 것처럼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혹 노자의 저서 속에서 그런 냄새가 난다면, 이는 노자의 주석가로서 오랫동안 권위를 누려온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의 사상일 뿐 노자의 사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세춘 선생은 청대 고증학의 창시자인 고염무가 노자를 왜곡 변질시킨 하안과 왕필의 죄악을 폭군 걸주보다 심하다고 비난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왜곡의 역사로 점철된 노자와 장자를 버리고, 본래 텍스트에 대한 성실한 독해를 통해 본래의 노장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그는 노자를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최근의 경향에 대해서도, 그건 '재해석'일 뿐 '해석'이 아니며, 또한 이렇게 재해석된 사상은 노자의 사상이 아니라 그냥 프로이트의 사상이고, 데리다의 사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노자강의] 서문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까? 

사실 기세춘 선생의 강의에서 타겟으로 삼는 이는 도올 같은 이다. 강신주 얘기는 한마디도 안 나왔고 내가 질문을 하고 답변하는 과정에서 몇 마디 하셨을 뿐이다. 위 내용은 그냥 내 기준에서 '정리'해 본 것 뿐이다. 

어쨌든 다시 나의 학습의 문제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다면 노자와 장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다가온다. 사실 강신주의 장자 독해는 최근의 철학적 '유행'(?)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깔끔한 안내자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장자 사상으로의 안내인지, 아니면 또다른 철학적 배경으로의 안내인지는 의문이 든다. 실제 그는 장자를 설명하면서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알튀세르, 들뢰즈 등 소위 에피쿠로스의 '우발성의 철학'의 계보에 있는 서양철학자들을 많이 인용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떤 순간에는 이들을 통해 장자를 설명하는 건지, 장자를 통해 이들을 설명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중심이 흐트러지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 아마 기세춘 선생은 '그건 그냥 에피쿠로스의 사상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실 텐데, 그 점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또 하나 강신주가 노자를 비판하는 핵심적이고 거의 유일한 이유는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가주의자 왕필이 그를 받아들이는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국가주의'로 논의를 몰고가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다. 우발성과 마주침의 유물론이 갖는 긍정성 못지 않게, 진리와 근원의 선재성에 대한 물음 역시 인간에게 근원적인 물음이다. 이것이 세속적인 욕망과의 결합속에서 국가주의나 권력에 대한 순응주의로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처음부터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그것으로의 다가감을 꿈꿨던 모든 역사상의 종교들은 처음부터 국가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그건 종교의 역사와도 별로 맞지 않는 얘기인 것 같다. (작년에 김상봉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등의 책을 읽고 나서부터 나는 유신론자, 아니 그보다는 범신론자 쪽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어쨌든 결론은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은 참 친절한 모험 안내서였지만, 앞으로 내 학습의 안내서가 되기에는 좀 부적절한 것 같다. 당분간 기세춘 선생의 [노자강의]와 [장자] 완역본을 따라서 학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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