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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리모 레비’ 읽기 - 우리는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는가?

 

쁘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서경식,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창비
 


 

쁘리모 레비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서경식과 김상봉의 대담집 『만남』을 통해서였다. 재일조선인 2세이자 자기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뿌리와 모국어 상실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서경식과, 서로주체성의 철학자 김상봉. 이 두 학자의 고뇌 가운데에는 쁘리모 레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기 삶과 학문 속에서 이 세계의 총체성을 온 몸으로 고뇌하는 이 두 사람에게 쁘리모 레비는 대체 어떤 의미란 말인가? 스스로 ‘인간’이라 여겨왔던 내가 아직까지도 온전히 보고 받지 못했던 인간의 어떤 모습을 쁘리모 레비가 폭로했기에 그들은 ‘쁘리모 레비’라는 화두를 끌어 안고 있는 것일까?

쁘리모 레비가 전하는 경험과는 좀 다르지만 내가 겪은 얘기부터 시작해 보자면, 고등학교 때 우연한 기회에 충북 음성에 있는 꽃동네라는 장애인 시설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사실 봉사활동이라기보다는 무급노동을 하고 왔다는 느낌이 더 강하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과 함께 뭘 같이 한 것도 아니고, 공장 같은 분위기의 세탁실에서 나오는 세탁물을 카트에 실어 나르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같이 갔던 다른 이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지나가다 창문 너머로 시설 장애인과 가끔 눈을 마주치는 정도였던 것 같은데, 그 후 10년여가 지난 오늘에 와서 그 창문을 사이에 두고 그 익명의 장애인과 내가 나누었던 눈빛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의 동공에 비치고 시신경을 타고, 마지막엔 내 뇌리에 박힌 그는 그 짧은 순간 나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나는 정말 그를 바라봤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동공이 그리로 향해 있던 순간에 신경세포의 운동으로 그의 이미지를 잠시 뇌 속에 담아둔 것일까? 그 봉사활동을 가면서 잠시라도 스쳤던 모든 이들은 굳이 자기소개를 하지 않아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에게 인지시키고 있었다. 참가자들을 인솔하던 사람은 근로복지공단 직원 일테고, 여러 참가자들은 대전 어디쯤에서 온 내 또래의 산재 노동자 자녀들이다. 우리 스스로가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자신의 ‘사회적 근거’를 드러낼 하나 이상의 표식이 있다. 이것을 통해서만 나는 타인을 하나의 ‘존재’로서 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잠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되었)던 그 장애인과 나는 서로 어떤 표식을 나누었던걸까? 혹시 나에게 잠시 세탁물 카트를 잠시 세워두고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나는 그날 만났던 다른 친구들에게처럼 다니는 학교는 어딘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동생 또는 형은 있는지를 물어 볼 수 있었을까? 내가 마음을 좀 열고 입을 연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왠지 그 대화 속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을 것 같다. 장애인 수용 시설이라는 벽의 존재는 내 마음과 상관없이 그를 처음부터 뿌리 없는 존재처럼 여기도록 만들고 있었다. 꽃동네 시설 생활 장애인 누구누구라는 호명은 그런 인상을 지워내기엔 부족하다고 생각되었다.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 겪었던 1년 동안의 경험을 전한 쁘리모 레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 장애인과 내가 나눴던 눈빛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레비가 수용소에서 마주쳤던 독일인들의 시선이 바로 내가 그 장애인을 향해 던졌던 그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유태인이 던지는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인간으로서 레비는 절망했던 것이다. 아마 수용소에서 근무하던 독일인들에게 유태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말라는 규칙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고, 유태인의 눈이 아니라 그 뒤의 벽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던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이자, 독을 풀어 페스트를 퍼뜨린 ‘범죄자’로 역사에 낙인 찍힌 ‘불결한’ 유태인들을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독일인들에겐 없었던 것이다.
 

레비의 글은 증언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실제로는 질문(또는 요구)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진술은 여지없는 질문이자 요구이다.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책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멀리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없었으며, 접근할 수도 없었다. 나치스 체제는 용의주도하게 노예와 주인이 최소한의 접촉만 하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도 주인공인 필자와 SS와의 만남은 딱 한 번만 묘사되며 그것도 나치스 체제가 붕괴되고 수용소가 해체되던 그 마지막 며칠 사이에 일어났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쁘리모 레비, 「독자들의 물음에 답한다」中)
 

이런 고통스러운 고백 속에서 레비는 ‘이것이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는가’라고 절규하며 좌절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그는 책 속에서 유태인을 박해했던 이들에 대해 온갖 저주를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을 쓸 때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선 언어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들을 사용하고자 했다. 나는 내 언어가 객관적일수록,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을수록 신뢰를 주고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정당한 증언이 제 기능을 할 것이며 바로 그 때 심판의 장이 마련될 것이다. 심판관은 바로 여러분이다.”(같은 글)
 

레비의 마지막 발언, ‘심판관은 바로 여러분이다’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독자 개개인이 나름대로 객관적인 판단과 평가를 해보라는, 저자의 여유를 내비치는 말도 아니고 우리에게 선뜻 심판관의 자격을 부여해주는 선의의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 스스로 심판관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라는 ‘요구’라고 생각한다. 2차세계대전 이후 전범재판이 한국전쟁의 발발과 같은 급작스러운 사태로 인해 유야무야 흘러가고,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경제재건’이라는 미명하에 가해자들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을 보면서 레비는 분노 속에서 다시금 온전한 심판이 이뤄지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판관이 되기보다는, 태연히 심판관의 가면만을 훔쳐 쓰고 뻔뻔스럽게 공범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전후 수많은 독일 국민들은 아우슈비츠, 반유대주의와 같은 단어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이제 과거는 잊자고, 그런 기억들은 새로운 출발대 앞에 선 우리의 발목만을 잡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몇몇 사람들은 부정과의 투쟁에서 고통 받고 죽어간 수없는 독일인이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내며 이 비극을 ‘독일인의 죄’로 이해하길 꺼려했다. 한나 아렌트도 『파리아로서의 유대인』에서 (독일인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수치스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많은 이들은 아렌트가 했던 이런 류의 말에 기대어 죄를 저지른 독일인과 자신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으려 했다. 그러나 서경식이 말하듯이 아렌트의 이 말은 누가 어떤 입장에서 말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망명 유대인인 아렌트가 “인간임을 수치스럽게 느낀다”고 말할 때, 만약 그녀 앞에서 어떤 독일인이 “그렇다, 당신 말 그대로다”라며 어깨 위의 짐을 벗고 떳떳해한다면, 그 광경은 그로테스크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는 개인으로서 ‘죄’가 없는 경우에도 자신이 독일인임을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야 비로소 피해자와 가해자가 동일한 평면 위에서 서로 마주한 채 ‘인간’ 공통의 책임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서경식, 212쪽)
 

서경식이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역(易)유토피아를 지상에 불러온 우리들의 ‘전통, 관습, 역사, 언어, 문화의 총체’를 우리 스스로가 피 흘릴 정도의 노력으로 해부하고 개조해가야 한다. 내가 그의 말처럼 ‘독일인’이라 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역(易)유토피아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비는 이탈리아 국민으로 태어나 이탈리아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왔으나, 어느 순간 사회의 ‘불순물’로 색출되어 영구 제거 대상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자기 내부에 외부자를 만들어 고립시키고 절멸하고자하는 욕구는 지금도 여전하다. 꽃동네에서 눈을 마주쳤던 나와 익명의 장애인도 그런 장벽 앞에서 머뭇거렸던 것이다. 그 머뭇거림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나는 스스로 ‘한국인(또는 비장애인) 전체가 그를 이름 없는 존재로 몰아넣은 것도 아니고, 나는 그런 짓을 했던 이들과는 다르다’고 스스로를 위안해 왔던 것이다. 그런 무력한 눈빛의 관계 속에선 그도 나도 인‘간’(間)일 수 없었다. 
 

이 지점에서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절규 어린 질문에 머물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내려 분투한다. 파시즘이 레비를 이탈리아라는 국민성 외부로 쫓아내고 절멸시키려 했음에도, 그는 역설적으로 ‘야만적인 파시즘’에 대한 ‘문명적인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강화한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외국인 동료에게 단테의 [신곡]을 들려주다가 어떤 구절에서 기억이 떠오르질 않는다. 여기서 그는 오늘 이 구절을 그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수용소에서는 목숨과도 같은 죽 한 그릇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수용소의 다른 이들을 통해서도 더 이상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보루’를 확인한다. 수용소에서 만난 슈타인라우프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레비, 57-8쪽)
 

그의 이런 시도와 발견은 기어이 다시 ‘국민’이라는 동일성의 내부자가 되겠다는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강제수용소의 지옥조차 소멸시킬 수 없었던 인간성에 대한 증언을 이탈리아인의 방식으로 해 낸 것이며, 이를 통해 근대의 보편적 인간상이자 유일하게 인권의 담지체가 된 ‘국민’ 범주 외부에서 인간의 척도를 다시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서경식, 156쪽 및 162쪽 참조) 마침내 그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절규에서 ‘바로 이것이 인간이다’라는 외침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여전히 ‘문명과 야만’이라는 과학주의적 합리성의 이분법의 한계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한계의 극한에서 사고하고자 하는 위대한 시도의 일면을 확인하게 되는 지점이다.
 

쁘리모 레비의 삶과 고민을 담은 책을 읽고 나니 김상봉이 서경식과의 대화 속에서 왜 그렇게 레비에 대한 질문을 던졌는지 알 것 같다. 그것은 단지 대화의 상대가 레비의 고민을 따라 인간의 척도를 고민하며 그의 묘지에 까지 다녀온 레비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이토록 극한의 자기상실을 경험한 레비가 던진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결국 그가 내놓은 ‘서로주체성’이라는 철학적 화두에도 온전한 답을 내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이라는 동일성에 스스로를 가두고 우리안의 외부자를 ‘타자’라는 변두리로 내모는 현실 속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진정한 서로주체성의 형성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심판관이 될 자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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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레디앙에 20대와 진보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양승훈의 블로그(http://flyinghendrix.net/684)에 가보니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저항’에 어울리는 가요는 ‘록’보다는 ‘힙합’이고, 안치환이나 윤도현 같은 목소리를 참을 수 없다고 한다. 모종의 ‘진정성’을 요구하는 노래 형식과 목소리를 그는 거부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노동운동이 가지고 있던 남성 노동자 중심의 계급성을 진정성과 동일시하는 정서가 기존의 민중가요 속에 녹아들어 갔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나의 취향은 그와 정 반대다. 남성 노동자 중심의 계급성을 요구하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다이나믹 듀오의 노래보다 안치환과 윤도현의 노래가, 또 그보다는 정태춘과 윤선애의 노래가 레비처럼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절규,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이다’라는 외침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저항의 형식과 재기발랄함, 전복성에서는 그가 좋아하는 그루브와 힙합이 더 나을 수 있지만, 대개 그런 노래들에는 인간의 자기상실에 대한 슬픔과 연민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적어도 저항의 노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아파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노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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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부터 해오던 동양사상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면서 두 권의 책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하나는 신영복의 '강의'이고, 또 하나는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다.  

 신영복의 책은 이 정도는 읽고 시작해야 뭔가 ABC부터 제대로 익히고 간다는 생각으로 읽었는데, 초반에 나오는 주역 파트의 내용이 마치 부적 해독 하는 것 같아서 머리가 지끈 거리다가 어찌저찌 그냥 동양사상에 혀끝만 대 보다가 끝냈다.  

강신주, '노장사상'에 대한 문제제기

반면에 강신주의 책은 좀 도발적으로 읽혔다. 원래 국가주의 사상가인 공자, 맹자를 읽을 생각은 없었기에 장자부터 시작한 건데, 강신주는 이 책에서 흔히 노장사상이란 이름으로 노자와 함께 묶여 사상사의 한 축에 자리하고 있는 장자의 위치를 완전히 다르게 포지셔닝 하고자 했다. 쉽게 말하면 노자와 장자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도발적인 쟁점을 가지고 시작하는게 오히려 나 같은 초심자에게는 더 반가운 일이었다. 신영복의 '강의'처럼 교과서적으로 이 사람 저 사람 훑는 것 보다, 어디에 포커스를 두고 고민해야 할 지 분명한 지점을 지적해주니, 첫 발을 떼기도 좋은 법이다. (물론 적절치 못한 쟁점에 초점을 두는 안내자를 만난다면 그냥 교과서같은 책을 보는게 낫겠지만 말이다.) 

며칠 전에 두번째로 읽으니 노자와 장자 사이의 쟁점이 이제야 좀 눈에 들어오는데, 강신주에 따르면 노자가 말하는 道는 사실상 국가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이라는 것이다. 그 유명한 <<道可道 非常道 /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도덕경의 이 유명한 구절은, 道를 현실을 초월한 존재적 위치에 두고자 하는 노자 사상의 형이상학적 근거라고 한다. 이와 함께 도덕경의 문장들이 한시적 어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등을 비추어 그것은 민중의 사상이라기 보다는 지배계급의 현실 순응주의를 반영한 사상이라고 말한다.  

반면 장자의 사상은 <소요유>에 나오는 大鵬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승인이 아니라 초월적 시야를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이를 통해 끊임없이 타자성을 확보하려는 '소통의 철학'이라고 한다. 한낱 물고기가 대붕이 되어 구만리 창공을 날아가는 것은, (매미와 텃새 따위가 비웃을 지언정) 자기 존재성의 틀을 넘어 타자와 소통하려는 노력의 소산인 것이다. 대붕이 구만리 창공을 날아 도달하려 했던 '남쪽'이 바로 그 타자적 공간이며, 이는 道를 초월적 자리로 보내버렸던 노자와는 다르게 '道는 걸어가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 장자 철학의 핵심이 된다.

기세춘, 淸談으로 왜곡된 노장사상을 텍스트로부터 살려내기

이 쯤 되면 노자-장자의 근본주의적 비판, 무정부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장자와 노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완전히 해석적 쟁점으로 옮아가 버린다. 그래서 나에겐 영 부담스러운 주제가 되어버리는데,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동양사상의 논의 지형 상, 출발이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중국의 관료제를 뒷받침하는 사상으로 유지되어 온 공맹사상이 아닌 이상, 그외의 사상들은 원전이 상당부분 남아있지 않거나 남아있어도 주석가들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어 온 바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노장사상과 같은 비주류 철학들을 이해할 길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내가 수강 중인 기세춘 선생의 노장사상 강의를 통해, 강신주의 주장들을 어설프게 나마 검토해 볼 여지들이 생기는 것 같다. 기세춘 선생은 강의 초반부터 이렇게 독설을 날리고 시작한다. 

   
 

 공자의 經學은 수천년 동안 종교적 정치적 필요에 의해 왜곡 윤색되었습니다. 한나라 때는 동중서에 의해 음양오행과 미신을 붙인 緯學이 되었고, 남북조시대는 하안 왕필에 의해 노자를 끌어다 붙인 玄學 또는 道學이 되었고, 송나라 때는 주희에 의해 佛老를 결합하여 理學이 되었고, 명나라 대는 禪宗을 덧붙여 心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노자의 사상이 엉뚱하게 공자 사상의 국가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온갖 세상의 달콤한 말들로만 윤색된 淸談이 되고 말았다는 것) 중세 유럽에서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듯이 말이다. 심지어 최근 중국공산당에서 자본주의로의 급속한 편입을 서두르며 내세운 구호인 '조화사회' 건설을 위해 끌어들인 것이 또 노자라는 것이다. 이를 위한 이데올로기 선전을 하기 위해 <도덕경 국제포럼>이라는 행사를 열어(2007.4.20) 1만 3천여명이 운집해 도덕경을 암송하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벌여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단다. 

아마도 강신주는 이를 근거로 노자 사상이 국가주의 철학이라는 것을 강조하겠지만, 반대로 기세춘 선생은 이것은 중국공산당이 "자본주의를 수용하려고 중국인민이 좋아하는 도덕경을 끌어들여 견강부회하려는 정치공작"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노자 사상이 본래부터 민중 사상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의 확실한 증거는 한말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과 장수가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로 삼았던 사상이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노자는 어차피 실존인물도 아니고 노자의 저서라고 알려진 것들은 대부분 구전되어온 민중의 설화 등을 후대에 집대성한 집단 창작물이기 때문에 강신주가 말하는 것처럼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혹 노자의 저서 속에서 그런 냄새가 난다면, 이는 노자의 주석가로서 오랫동안 권위를 누려온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의 사상일 뿐 노자의 사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세춘 선생은 청대 고증학의 창시자인 고염무가 노자를 왜곡 변질시킨 하안과 왕필의 죄악을 폭군 걸주보다 심하다고 비난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왜곡의 역사로 점철된 노자와 장자를 버리고, 본래 텍스트에 대한 성실한 독해를 통해 본래의 노장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그는 노자를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최근의 경향에 대해서도, 그건 '재해석'일 뿐 '해석'이 아니며, 또한 이렇게 재해석된 사상은 노자의 사상이 아니라 그냥 프로이트의 사상이고, 데리다의 사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노자강의] 서문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까? 

사실 기세춘 선생의 강의에서 타겟으로 삼는 이는 도올 같은 이다. 강신주 얘기는 한마디도 안 나왔고 내가 질문을 하고 답변하는 과정에서 몇 마디 하셨을 뿐이다. 위 내용은 그냥 내 기준에서 '정리'해 본 것 뿐이다. 

어쨌든 다시 나의 학습의 문제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다면 노자와 장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다가온다. 사실 강신주의 장자 독해는 최근의 철학적 '유행'(?)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깔끔한 안내자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장자 사상으로의 안내인지, 아니면 또다른 철학적 배경으로의 안내인지는 의문이 든다. 실제 그는 장자를 설명하면서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알튀세르, 들뢰즈 등 소위 에피쿠로스의 '우발성의 철학'의 계보에 있는 서양철학자들을 많이 인용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떤 순간에는 이들을 통해 장자를 설명하는 건지, 장자를 통해 이들을 설명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중심이 흐트러지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 아마 기세춘 선생은 '그건 그냥 에피쿠로스의 사상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실 텐데, 그 점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또 하나 강신주가 노자를 비판하는 핵심적이고 거의 유일한 이유는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가주의자 왕필이 그를 받아들이는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국가주의'로 논의를 몰고가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다. 우발성과 마주침의 유물론이 갖는 긍정성 못지 않게, 진리와 근원의 선재성에 대한 물음 역시 인간에게 근원적인 물음이다. 이것이 세속적인 욕망과의 결합속에서 국가주의나 권력에 대한 순응주의로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처음부터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그것으로의 다가감을 꿈꿨던 모든 역사상의 종교들은 처음부터 국가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그건 종교의 역사와도 별로 맞지 않는 얘기인 것 같다. (작년에 김상봉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등의 책을 읽고 나서부터 나는 유신론자, 아니 그보다는 범신론자 쪽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어쨌든 결론은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은 참 친절한 모험 안내서였지만, 앞으로 내 학습의 안내서가 되기에는 좀 부적절한 것 같다. 당분간 기세춘 선생의 [노자강의]와 [장자] 완역본을 따라서 학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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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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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워낭소리>를 봤다. 워낙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아서 거의 완벽한 스포일링을 당하고 간 상태였지만, 영화의 여운이 아직까지 남는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처럼 봉화의 아름다운 풍경들에 감탄하고, 할아버지와 소의 애틋한 사랑에 동감한 것은 아니다. 물론 소가 죽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슬픔에 잠겨 있는 장면에서 나 또한 눈시울을 적셨지만, 지금까지 내 마음 한켠을 붙들고 흔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등뼈가 앙상하게 보일 정도로 다 늙어서 일만하는 소가 뭐가 부럽냐고? 그러나 내가 부러운 것은 소의 '살아생전'이 아니라 죽어서 '흙'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소는 죽고 산 언저리에 묻혔다. 그리고 그 위엔 풀이 자라났다. 그리고 수 십년이 지나면 소의 육체도 미생물들을 만나 변형되면서 풀이 되고, 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어서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매일 같이 이산화탄소를 내뿜어대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육중한 도시에는 내가 흙이 되고 풀이 되고 꽃이 될 수 있는 조그만 땅 뙤기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저 먼 중동 땅에서 왔을 법한 석유 찌꺼기들만이 온 도시를 뒤덮고 오직 흙 한줌의 숨통조차도 조여매고 있다.
 

괜히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불교에선 전생과 내세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죽어서 흙이 될 수 없고, 풀이나 꽃이 될 수 없는 이 도시중심적 사회에서도 전생과 내세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석가모니가 생각한 전생과 내세는 단순한 정신 또는 영혼의 순환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분리라는 관념은 철저히 서양 근대의 사고방식이 아닌가!) 육체와 자연의 순환까지 포함하는 언어였을 것이다. 어차피 하얀 가루가 되어 조그마한 항아리 안에 담겨질 육체라면 내세도 기약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물론 어차피 벌써부터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2.
 

 

예전에 <<블루골드>>(모드 발로 & 토니 클라크 저, 개마고원, 2006)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물 사유화의 문제를 다룬 꽤 두꺼운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물 사유화를 추진하는 초국적 기업들을 '현대판 봉이 김선달'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2%, 아니 20% 정도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선달은 대동강물은 멀쩡히 놔두고 양반댁에 물을 길어다 날라주는 짐꾼들에게 동전 몇 닢 받는 걸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여 대동강 물을 4천냥을 받고 한양 상인에게 판 정도였지만, 21세기의 봉이 김선달들은 아예 육지에 있는 물을 고갈시켜서 그 희소성을 증대시키는 악질적인 방식을 택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눈여겨 볼 것은 육지에서 담수(淡水)를 보관할 토양을 없애버린다는 점이다. 도시화로 인해 농업을 위한 경작지는 점점 파헤쳐지고, 그 위에 곧게 뻗은 길과 높은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그 위는 전부 시멘트와 석유 찌꺼기일 뿐인 아스팔트가 덮어버린다. 그리고 도시 생활에 적합한 하수도 시설이 갖춰진다. 그런데 예전엔 비가 오면 빗물을 토양이 잡아두어 지하로 흐르면 그 물이 저수지 등으로 흘러 사람들이 쓸 수 있었는데, 시멘트와 아스팔트는 빗물을 전부 하수도로 내다 버린다. 하수도로 흘러간 물은 대부분 강을 거쳐 바다로 직행한다. 이런 토양의 손실, 그리고 온갖 오염의 원인으로 인해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담수는 점차로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그나마 있는 물의 사용도 온갖 댐 건설, 관개시설 정비를 통해 전적으로 공업적 시설을 비롯한 자본의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된다. 그렇게 해 놓고 사람들이 몸을 씻고, 목을 축이고, 음식을 만들어 먹을 물은 비싼 값에 사서 쓰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봉이 김선달은 초국적 기업들로 집단화 되어 있으며, 좀 더 뻔뻔하고 노골적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 문제의 열쇠는 '흙'에 달려 있다.

 

3.
 

 

그리고 최근에 읽은 <<이윤에 굶주린 자들>>(프레드 맥도프 외, 울력, 2006)에서는 토양의 획득과 이용이 오로지 초국적 '농식품복합체'(agribusiness)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토양에 대해 자본의 논리가 들어서게 된 것은 세간의 이해와는 다르게 그리 최근의 현상만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 책의 첫 번째 글인 엘런 우드의 '농업 자본주의의 발생'에서는 이런 점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농업 문제를 논의의 바깥으로 밀어낸 기존의 인식에 대해 반성을 요구한다.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이 산업혁명의 신화에 반대해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상업'에서 찾으려 했다면, 오히려 그는 그 반대편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그는 노동을 통해 재산소유권이 형성된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진 로크의 이론은 꼼꼼히 살펴보면 논점이 노동 자체가 아니라 생산적이면서 이윤을 낳는 토지 이용인 '토지 개량'이 소유권을 형성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고 말한다. 토지를 개량하는 적극적인 지주(↔봉건적 지주)는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이 아닌, 자신의 토지와 다른 사람의 노동을 생산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소유권을 확립한다. 개량되지 않은 토지, 임대되지 않아서 이윤을 낳지 못하는 땅은 '황무지'였고, 이러한 토지를 전유하는 것은 개량하는 사람들의 권리이고, 심지어 의무이기도 했다. 영국에서의 토지 개량에 대한 이런 관점은 식민지 뿐만 아니라 본국에서도 토지 강탈을 정당화 했고, 이는 인클로저와 같은 토지 소유권의 재정립 가져왔다.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의존해 왔던 공유적 관습적 토지 이용권이 소멸되는 현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대량의 비농업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생산성을 갖는 농업 부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계 최초의 산업 자본주의가 출현 할 수 있었을까? 영국의 농업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임금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하는 무산대중이 존재했을까?

자본주의적으로 개량된 농업은 이제 도시의 무산 대중에게 공급될 식량 생산이나 목양, 원예, 과일 등 고부가가치 농업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 중심에 농업생태체계의 신진대사를 교란시키는 단종경작(monoculture)이 자리잡고 있다. 존 포스터와 프레드 맥도프는 독일의 토양화학자 리비히와 마르크스의 논의를 빌려와 단종경작이 중심이 된 영국의 집약적 농업이 농촌에서 도시로 식량과 섬유의 원거리 수송을 필연화하는 반면, 질소, 인 칼륨 등의 영양물질을 재생시키기 위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주변부의 농촌은 토양의 영양분을 박탈당하고, 중심부의 도시는 쓰레기와 공해로 환경이 훼손된다. (거름이 되지 못해 길거리에 뿌려진 똥 때문에 하이힐이라는 뛰어난(!!) 패션 상품을 만들어낸 프랑스 파리를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의 중심부가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농업은 또 한번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 시기에 탈곡기, 수확기 트랙터 등의 기계가 발명되고, 질소비료, 살충제, 제초제 등 화학적 투입물이 대량 생산된 것을 배경으로 농업과 공업의 '수직적 통합'이 단행된다.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에서 수행하는 영농에서부터 생산물의 수송, 가공,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초국적 농식품복합체를 정점으로 한 수직적 배치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수직적 통합을 잘 설명해 준다.

 


"계약 영농의 본질을 잘 보여 주는 사례는 특히 계약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육계broilers(식육용으로 사육되는 닭)생산에서 볼 수 있다.(... ...)
육계 생산은 타이슨(혹은 유사한 다른 지방 기업들)과 4년 계약을 맺고 생산되는데, 이 계약에 따라 타이슨이 사육할 병아리, 사료, 그리고 수의학 서비스의 독점 공급자가 된다. 타이슨은 공급되는 병아리의 유형, 공급량과 공급 빈도의 유일한 결정자이다. 타이슨은 7주 후에 자신들이 정한 날짜와 시간에 다 자란 닭을 수집한다. 타이슨은 사육되는 닭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공급하고 닭을 싣고 갈 트럭을 제공한다. 농민은 노동, 사육장, 사육장이 세워지는 토지를 제공한다. 사육에 필요한 투입재와 사육 방식에 대한 엄밀한 통제는 전적으로 타이슨의 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생산자(농민)는 사료, 수의약품, 제초제, 농약, 살충제, 쥐약 등 회사에 의해 공급되거나 그 회사의 문건에 의해 승인된 것 이외의 다른 어떤 물품도 사용하지 않아야 하고, 그에 서명해야 한다." 더구나 농민은 회사의 "육계 사육 지침"을 준수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농민들은 "집중 관리" 대상이 되어 타이슨의 "육계 관리 및 기술 자문관"의 직접 감독을 받게 된다."


- 167-8pp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토지는 농민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농민은 '토지 소유자'이다. 즉 요즘엔 옛날처럼 소작농이 없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지주인가? 그렇지도 않다. 지주치고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게 너무 없다. 농업에 투입되는 비료 및 사료, 농약, 농기계, 생명공학 등의 대부분의 투입물를 외부에서 조달해야 한다. 이 과정은 전적으로 시장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며, 생산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농의 출발점이 되는 종자에 대한 정보와 기술은 생명공학기술을 독점한 초국적 종자기업(몬산토, 노바티스, 듀퐁 등. 이들은 미국에서 제약회사 다음으로 높은 이윤율을 내고 있는 기업들이다.)은 종자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끊임없이 강화하려 한다. 그래서 생명공학적으로 조작된 종자를 도입하는 농민은 작물에서 생산된 다음 세대의 종자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계약을 종자 생산자와 맺어야 한다. 이를 어기고 농민이 농사를 지어 얻은 종사를 다른 농민에게 팔거나, 다음해 농사를 짓기 위해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된 2세대 종자를 다시 파종하는 행위는 '해적질'로 매도된다. 그럼에도 영농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비용, 즉 자연재해, 병충해, 농민 건강 악화, 생태 파괴 등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농민이 부담해야 한다. 왜? 농민이 땅 소유자니까....

 
4.

내 주변에는 숨 쉬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그냥 '땅'들만이 가득하다. 제작년까지 우리집이었던 곳의 뒷 마당에는 엄마가 상추, 고추, 고구마 등을 심어서 우리집 네 식구 먹을 거리는 해결했는데, 그나마 그 땅도 이제 아파트 만든다고 다 밀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숨 쉬고 있는 땅이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외부에서 들여온 비료며 종자기술로 생을 연명하는 땅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그렇게 많은 땅의 숨통을 틀어 막아놓고는 그나마 숨쉬고 있는 좁은 농촌의 땅과 농민들을 무한히 착취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착취한 결과가 엄청 풍요로운 것도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던 생물종의 절반 가까이가 멸종해 가고 있다니 따지고 보면 먹는 우리가 먹는 것의 종류도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오로지 비만과 당뇨병을 재촉하는 것들 위주로 말이다.

그런 모습들에 근육을 키우기 위해 닭가슴살과 고구마만을 먹었다는, 얼마 전에 '스타킹'에 출연했던 몸짱의 얘기가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그 때 옆에서 강호동이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 울린다. "그러다 죽어요!"

그렇다. 그러다 진짜 죽는다. 근데 죽어도 그 근육으로 단단했던 몸은 풀도 못되고, 꽃도 못된다. 그냥 흰 가루일 뿐이다. 뭐하는 짓이니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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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책은 충격적이다. 그의 <세계공화국으로>에 담긴 주제는 역사적 교환양식, 칸트와 맑스, 세계제국과 세계경제 등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버거운 것들인데, 이걸 300쪽도 안되는 얍실한 책 한 권에 다 담았다. 심지어 쉽다!! 어쨌든 난 이 책을 산지 두어달 만에 두 번 완독했는데, (감히 용기내어 말하자면) 난 이 책의 내용이 뭐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적어도 15분 정도는 쉬지 않고 혼자 떠들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전적으로 내 능력이 아니라, 저자의 능력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책 자체가 원래 고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저자가 작정하고 쓴 책이라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어쨌든 이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자기가 줄곧 주장해 온 내용을 거의 다 쏟아낸 듯 하다. 이 책의 부제를 굳이 붙이자면 '1시간만에 읽는 가라타니' 정도?

 

어쨌든 이렇게 쉽게 세계화 속의 자본-네이션-국가의 문제를 둘러싼 쟁점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신 덕에 내가 앞으로 고민하고 공부해야 할 것이 뭔지가 좀 선명하게 드러나는 듯 하다.

 

일단 고진에게 특이한 점은 그가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생산양식'이 아니라 '교환양식'을 통해서 발견한다는 점이다. 그가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이런 논의는 20세기 중반 모리스 돕과 폴 스위지 간에 벌어졌던 자본주의 이행논쟁에서 스위지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진을 이 논쟁에 가담시켜 본다면, 그에게는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봉건제 조차도 그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봉건제는 '제국의 아주변'에서 출현한, 즉 제국권력이 영향력을 뻗치는 범위의 (상대적)외곽 또는 사이공간에 존재하는 타자였다. 이를테면 서유럽 봉건제는 로마제국의 아주변에서, 일본의 봉건제는 중국제국의 아주변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에게서 국가는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던 4가지 교환양식(호수 / 약탈-재분배 / 상품교환 / 어소시에이션) 중 약탈-재분배를 기초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상품교환은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자유민의 존재가 보장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국가와는 다른 토대를 갖는 것이다. 즉 상품교환은 공동체의 바깥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상품교환은 공동체가 끝나는 곳에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 또는 그 성원과 접촉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마르크스)

 

그렇다고 그가 국가와 상품교환이 완전히 별개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근대 자본주의 등장 이후에 네이션(나는 이것을 그냥 '민족주의'정도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이 등장해 이 둘을 매개하여 자본=국가=네이션의 보로메오의 매듭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이들 각각은 상품교환, 약탈-재분배, 호수적 교환관계를 상징한다.

 

여기서 또 다시 가라타니의 주장이 자본주의 이행논쟁과 관련해 쟁점을 형성하는 부분은 '소비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장이다. "상인자본과 달리 산업자본은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얻지만 이는 아직 잉여가치의 실현이 아니다. 잉여가치가 진짜로 실현되는 것은 그 생산물이 유통과정에서 팔릴 때"라고 주장하고 또,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자를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로서의 노동자가 스스로 만든 것을 다시 사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말한다. 이렇게 그는 산업자본주의의 특징으로서 노동과정에서의 노동자의 자본가에 대한 예속과 이를 통해 얻어지는 잉여가치에 대한 부분은 일정정도 상대화시키고, 스위지가 그랬던 것 처럼 유통과정과 상업에 방점을 찍는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다가 결국 2년 가까이 책꽂이에서 잠자고 있던 <자본주의 이행논쟁>을 꺼내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난 스위지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하지만(그런데 이 책만 보면 스위지가 돕, 다까하시, 힐튼, 힐 등에게 다구리 당하는 형국이다), 아직 고민이 좀 남는다. 스위지의 논점은 이후 월러스틴이 잘 계승해서 논의했듯이, 분석의 시야를 세계체계로 확장시켰다는 측면은 있지만, 어쨌든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모순의 변증법'을 상대화시킨 것 아닌가? 또한 자본주의의 기원을 가치체계 사이의 계산적 차이를 이용해 이윤을 얻는 상인자본에게 초점을 맞추면, 자본주의의 고유한 노동과정에 대한 분석은 어떤 로를 통해 이뤄질 수 있는가? 나아가 이 논의의 끝까지 밀고 나가면 노동가치론은 폐기되는 건가?

 

그럼에도 돕과 다까하시 등의 논리로는 스위지가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들은 봉건제 붕괴의 원인이 봉건 영주의 과도한 수입욕구와 이를 견디지 못한 농노들을 영지 이탈에 있다고 했다. 이에 스위지는 영주의 수입욕구라는 것도 국제 사치품 교역의 성장에 따른 결과이고, 농노들의 이탈은 도망갈 곳이 있어야 가능한데 이 당시 봉건영지 외부에 성장하던 상업에 기반한 도시가 이를 가능케 했다고 답한다. 딱히 도망갈 곳이 없던 동유럽의 경우에는 재판 농노제가 나타났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는 것이다. 이에 돕은 봉건제 외곽에 존재하던 도시들도 사실상 봉건 영주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이들은 오히려 반동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내가 볼 땐 좀 부족해 보이는 대답이고, 그가 가장 힘주어 강조하던 바는 "스위지 너, 계속 그렇게 말하면 넌 마르크스주의자 아니야" 뭐 이런 게 아니었을까?

 

아직 잘 모르는게 많아서 대충 정리해 봤는데, 어쨌든 이 두권의 책 덕분에 앞으로 공부할 게 더 많아졌다. 일단 올 여름이 가기 전에 <자본론> 1권부터 제대로 정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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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이 두 권의 책을 함께 읽고 몇 마디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시간을 낸다.  

 

조봉암과 박헌영. 이 둘은 모두 해방 이전 조선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거목들이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맞이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다른 길을 택해 결국 사실상의 정치적 반대파가 되고, 둘 모두 각각 남한과 북한에서 부당하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법살 당했다. 정태영의 <조봉암과 진보당>과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 모두 이 법살의 희생자들의 정치적 명예 회복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하지만 이러한 저자들의 목적이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어차피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의 스탈린주의적 편향을 비판하면서 독자적 길을 걸은 조봉암이 북한의 간첩이 아니라는 것과, 평생을 조선공산당의 정치적․이론적 지도자로 살아왔던 박헌영이 반공주의의 본산인 미국의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은 상식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동의할 만한 내용 아닌가? 
 

오히려 나는 이 둘을 통해 해방 전후 공산주의 운동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비극성을 발견한다. 조봉암은 왜 둘도 없는 동지 박헌영을 향해 매서운 비판의 문건을 날려야만 했는가? (비공개로 전하려던 조봉암의 계획과는 달리 미군정의 수색에 의해 문건이 발견되면서 부득이 공개되고 말았지만) 이 문건을 받게 된 박헌영은 왜 성실하게 토론에 임하지 못하고 조봉암을 축출하는 것으로 사태를 종결하고야 말았는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조봉암, 박헌영 개개인의 최종적인 정치적 결과물에 대한 평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봉암과 진보당>에 실린 박헌영을 향한 조봉암의 편지를 읽어보면 상당히 합리적이고 근거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소양국간의 대결로 치닫고 있는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지나친 친소적 노선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을 수 있으며,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하여 대중을 설득시키려는 노력에 힘써야 한다는 등의 주장들 말이다. 어쩌면 당시의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 상황에서 그의 그런 구상은 꿈 같아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그런 평가는 사실 사후적인 결과를 중심에 두고 하는 것이고 당시 상황에서 정치세력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였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런 면에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은 지나치게 코민테른의 지령을 조선 정세에 무매개적으로 대입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대한 조봉암의 비판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약간 저자의 주관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박헌영 평전>에 묘사된 박헌영의 정치적 토론 자세나 정세적 치밀성으로 미뤄봤을 때, 박헌영이 이런 비판을 조금이라도 수용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다소 미스테리다. 설령 박헌영이 스탈린주의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김일성이 ‘권력형 스탈린주의자’라면 박헌영은 그보다는 죄질(?)이 덜한 ‘이론형 스탈린주의자’라고 볼 수 있고, 그래서 박헌영의 합리적인 대처가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 조봉암은 철저한 대중지향적 노선에 기반하여 현실정치 참여로 방향을 잡았고, 박헌영은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반공주의에 맞선 전국적 저항을 통해 조선공산당 사수에 힘을 쏟는다. 어차피 둘 다 50년대 한반도 정치에서 축출 당했다는 면에서 패배자임에 틀림없지만, 최근 남한 진보정치 내부의 평가 움직임을 봤을 때, 둘 간의 경쟁에서 조봉암이 ‘역사적’ 승리를 거둔 듯 하다. 작년 조봉암 법살 50주기를 맞아서 주대환의 사회민주주의연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모두 그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토론회를 열면서 조봉암 노선의 복권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조봉암을 대한민국 건국공신으로 치켜세우는 사민련의 입장이나, 그의 진보당 건설 투쟁을 현재적으로 해석하면 ‘반MB연대’라고 주장하는 민주노동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조봉암의 법살이라는 비정상적인 정치 행태가 현재까지 내려져오면서 노무현의 죽음과 노회찬 X-파일 사건 유죄 판결을 낳았다는 진보신당 조현연 교수의 주장도 말이야 맞는 말이래도, 그런 주장이 미래지향적 정치적 비전을 형성하는데 그리 중요한 주장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진보신당 장석준 정책실장이 말한, 미소대립이 직접적으로 투영된 한반도 현실 속에서 평화통일이라는 구상(그는 이를 당시 반둥회의로 대표되는 중립국 제3세력 노선과 맞닿아있다고 말한다)을 제시했던 조봉암의 국제정치에 대한 혜안을 본받아 21세기에 걸맞는 정치적 리더쉽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성표를 주고 싶다. 이런 관점 하에서라면 나는 앞으로 조봉암 노선의 적극적 해석을 통한 진보정당의 비전형성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이런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단서들을 몇 가지 달아야 한다. 내가 제시하려는 단서들은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조봉암의 노선이 더 현실적이고 대중정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면, 왜 그의 시도는 법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버렸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그래서 이승만이 나쁜 놈이다’가 제시되는 건 부당하다. 왜냐하면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박헌영도 변명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도 잘 해보려 했지만, 미군정을 등에 업은 우익들의 테러가 만연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탄압에 의해 지하 비합정당이 되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대구총파업, 4.3항쟁 등 대중들의 자생적 봉기를 끝까지 책임지고 지도하려는 노력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박헌영의 북한행도 이런 상황에서 조직의 붕괴를 막으면서 대중투쟁에 대한 지도를 유지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조공의 이런 노력을 언급하지 않고 이들의 스탈린주의적 오류만 지적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사실 조봉암이 제헌의회 선거에서부터 다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엄혹한 투쟁의 시기에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었을까? (다만 참세상에 소개된 책에서처럼 조봉암을 변절 지식인이라 표현하는 것은 좀 과하다는 생각이다.(변절 지식인 조봉암과 비극의 뿌리 조선공산당))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조봉암의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그가 역사적으로 성공한 북유럽식 사민주의와 비슷한 내용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실패가 예정되어 있던 코민테른식의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자주적으로 국제정세를 읽으며 제3노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에도 코포라티즘의 물적 토대가 전무했던 50년대 한국 상황에서 텍스트적 유사성만을 근거로 조봉암이 개량적인 북유럽식 사민주의를 주장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무시한 해석이다.

그와 비교해 박헌영은 고지식하다고 할 정도로 조직적인 인간이었고, 그래서 그 조직(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의 오류가 그대로 박헌영의 오류가 되어버렸다. 안재성의 설명대로 박헌영이 김일성의 주전론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라 해도 전쟁에 반대하는 실제적 행동을 하지 않은 이상 그도 전쟁의 공범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진보운동의 역사에서 박헌영을 버리고 조봉암을 택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옳지 않다. 조봉암의 현실주의는 비슷한 시기에 터져 나온 노동대중들의 자생적 투쟁을 우회한 현실주의였다. 당시의 대구총파업, 4.3항쟁등이 조선공산당의 모험주의의 소산이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 당시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전국적 지도 체계가 붕괴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공산당은 대중 투쟁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극의 길로 빨려들어 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와 함께 조선공산당의 오류에 대해서도 좀 더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나는 이재유를 비롯한 경성 트로이카의 중심들이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았다면 적어도 코민테른 입장에 따라 반탁에서 친탁으로 우왕좌왕하는 조공의 행보는 나타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이재유는 박헌영이 자신의 밀사를 통해 상해에서 보내주는 공식 문건과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활동할 것을 권하였을 때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문건이 도착하는데만 한달이 넘게 걸리는데, 어떻게 조선의 구체적 정세에 맞는 운동을 하겠냐는 것이다. 가혹한 탄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이들의 죽음이 조선공산당에 가장 큰 비극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장석준 등 진보신당의 브레인들이 주장하는 ‘조봉암 계승론’은 ‘비판적 계승론’으로 바뀌어야 한다. 21세기 진보정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폭발하는 대중적 불만과 투쟁을 수평적 토론과 연대 속에서 대안적 사회체제에 대한 구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이끄는 리더십이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50년대 민중항쟁과 함께했던 조선공산당의 긍정성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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