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통스럽게 '사유'하기 위하여
- 『리영희 프리즘』서평, 그리고 나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 전 친구 하나가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친구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나 그리고 나의 여자친구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물론 그 친구는 엄마가 하도 보채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말했다지만, 나이가 올 해 스물여섯이나 먹은 성인이 제 얼굴에 칼 대는 일을 엄마가 하란다고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친구가 아무리 변명한다 해도 그 선택에 자신의 욕망이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단 한번의 수술로 그간 우리가 지켜왔던 여성주의 운동의 대의를 배신한 친구의 선택에 분노를 터뜨리고 난 후에도 뭔가 개운치는 않았다. 나조차도 부지불식간에 그 친구에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절대 보편이 될 수 없는 도덕률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식의 도덕률로 그를 욕한다면 알량한 대학 졸업장을 받아보겠다고 두 달간 토익학원에 시간과 돈 그리고 영혼까지 갖다 팔았던 나는 얼마나 정당한가? 냉정하게 말해서 그와 나의 차이점이라고는 노동시장에서 나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한 자기계발의 기술을 외모에 까지 적용했느냐 안했느냐 정도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 나면 내가 감히 그 친구에게 들이밀은 도덕주의는 혹시 '꼰대스러운' 운동권의 자격지심의 발로는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시대에 좌파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분열증에 시달린다는 것을 의미"(한윤형, <냉소주의시대의 우상과 이성>, 206쪽)한다는 한윤형의 지적은 이미 그런 분열증 증세 속에 살아가는 나에게는 의사가 작성해준 진단서를 읽는 기분이 들게 한다. 학생운동을 할 때, 우리는 비대해진 사교육 시장과 경쟁교육을 비판하면서도 밀린 방세를 내기 위해 영수과외를 해야만 했다. 이쯤 되면 과연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MB교육인지,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하루에 세 번씩은 꼭 울어대는 내 배꼽시계인지 헷갈리는 지경이다.
내 앞엔 지금 『리영희 프리즘』이란 책 한 권이 놓여져 있다. 70년대 대학생에겐 '스승'이었고, 그래서 프랑스 진보언론 르몽드로부터 '사상의 은사'라는 별칭까지 얻은 상징적인 지식인 리영희. 그는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쉼 없이 '몽롱한 의식에 끼얹은 찬물 한 바가지'같은 글들을 쏟아냈고, 그렇게 리영희로부터 세례 받은 청년들은 소위 '의식화'가 되어 80년대를 분노와 저항의 세월로 채워갔다.
2010년 3월 11일. 나는 리영희의 일생의 화두였다는 우상(偶像)과 이성(理性)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도 거의 대다수의 청년세대가 리영희를 모르고 리영희의 사상에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2010년 3월 11일에.
스승이 없는 시대, 우상맹목의 시대
지난 21세기의 첫 10년간, 우리는 확실히 '스승이 없는 시대'를 살았다. 70년대 대학생을 감화 받게 했던 리영희도, 80년대 대학생이 리영희를 경유하여 만난 마르크스도 우리에겐 없다. 91년 사회주의권 붕괴를 찍고 턴한 청년세대의 사상적 좌표는 그간 '모셔왔던' 스승들을 사정없이 패대기를 쳐대더니 결국 지금의 청년세대를 탈이념, 탈정치 그리고 냉소주의를 뼛속 깊숙이 받아들인 'Cool'한 이들로 성장시켰다. 그러는 동안 리영희가 치열하게 마주해왔던 군부독재라는 우상은 자본독재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었지만, 우리는 이전 청년세대와는 다르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 우상을 치열하게 대면하고 파괴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Cool'했기 때문에.
그러했기에 사르트르식으로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으로서 지식인 또는 그람시식으로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지식인은 소위 '꼰대' 취급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는지.(이대근,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133쪽 참조) 어쩌면 우리에게 '지식인'은 특정한 기술(Technique)을 전수해주는, 이를테면 메가스터디 손주은 사장같은 사람이 아닌지.
그렇게 스승이 부재한 가운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 우리는 분명 고통스럽게 억압과 마주해야 할 부담에서 자유로워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탈정치'라는 이름으로 그 부담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 부담이 자리잡고 있던 자리에 지금 무엇이 들어 앉아 있는가? 얼마 전 삼성 총수 일가를 비판한 책에 대한 광고를 거부한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의 고위간부라는 사람들이 'Cool'하게 던진 말들 속에서 나는 그것의 실체를 본다. "삼성은 우리의 파트너", "삼성은 해체의 대상이 아니라 상생의 대상". 이미 우리시대 우상(偶像)이 되어버린 삼성은 그들에게 신문사 경영의 일부가 되었고, 리영희에겐 그것과 맞서기 위해 벼려내야 했던 무기였던 이성(理性)이 그들에겐 삼성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적응의 기술'이 되어버렸다. 이 '적응의 기술'이 시장주의를 통해 자유의 가면을 쓰는 과정을 안수찬 기자는 "진짜 기자의 멸종"이라는 글을 통해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다시, 고통스럽게 '사유'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렇게 억압과 마주해야 할 부담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대신, '생각'을 잃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지만, 우리는 지금 확실히 의심의 여지없이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병권,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15쪽 참조) 우상의 지배 하에서 작동되는 두뇌의 의식작용은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화학적인 생리작용과 다르지 않다. 화학적 생리작용으로만 유지되는 유기체를 우리는 '노예' 또는 '짐승'이라고 부른다.
확실히 이 구절은 아팠다. 너무 아파서 읽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리영희는 사르트르를 인용해 자유의 의미를 절절하게 전했다. 사르트르는 독일 점령 하에 있을 때처럼 자유로웠던 예가 없었다고 했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유라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억압자에 저항함으로써 자유를 느꼈던 그에게는 저항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이대근,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144쪽)
나와 같이 범속한 인물이 저런 자유에 털끝만큼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심지어 앞에서 말한 '진보언론'의 간부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상과 이성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등을 맞대고 붙어 있는, 우리 삶의 두 부분일 따름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그러나 나는 또 아프게 되새김질 한다. 나치 전범재판에 회부된 아이히만을 관찰하면서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에게 사유는 '능력'이 아니라 '의무'이다. 우상이 끊임없이 이성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고 둘 사이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는 조건 속에서, 우리가 그 둘을 분리해내려는 고통스러운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아이히만의 변종일 뿐이다. 아이히만은 가정에 충실했고 성실한 직장인이었다. 다만 너무 성실한 나머지 유태인을 살해하라는 우상의 명령에 대해 '사유'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나의 친구에게 묻는다. 성실하게 일주일에 세 번 토익학원에 다니는 동안, 그리고 유행에 맞춰 성형외과를 찾는 동안, 너는 얼마나 자유로웠냐고. 너는 얼마나 네 안에 자리 잡은 우상에 대해 사유했느냐고. 5.18의 시인 김남주는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라고 했다. 그리고는 "사람들은 맨 날 겉으로는 소리 높여 자유여, 해방이여, 통일이여, 외치면서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라고 꾸짖었다. 시인 앞에 한 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스승 없는 시대를 함께 버텨내온 나의 친구에 대해 생각한다. 그 친구는 얼마 전 만났을 때 김규항의 『예수전』이라는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나도 최근에 그 책을 접했다. 종교와 별 다른 인연을 맺지 않았던 나도 이 책을 통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친구였던 '최초의 사회주의자' 예수의 삶에 깊이 감동했다. 나는 그렇게 우리가 스승 없는 시대에 스승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는 사실에 감사했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친구와 함께 사유하고 싶다. 자유롭기 위하여. 나의 이성과 육체 모두가 진정 자유롭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