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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틀마니아- 20세기 최대의 마케팅 성공작, 생수에 관한 불편한 진실
엘리자베스 로이트 지음, 이가람 옮김 / 사문난적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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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4월 17일에 저장

붓다, 나를 흔들다- 붓다를 만나 삶이 바뀐 사람들, 2006 올해의 불서
법륜 지음 / 샨티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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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이환 옮김 / 돋을새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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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철학 콘서트 1-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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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 -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제언
박승옥 지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운전면허증 따지 않기로 결심하다.

 얼마 전 학교를 졸업(정확히 말하면 수료. 아직 나에겐 토익시험이라는 장벽이 남아있다. ㅠ.ㅠ)하고 집에 내려와서 지내면서 가족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아온 게 하나 있다. 그건 다름아닌, 수능끝난 고3 수험생들이 제일먼저 자신이 '성인'임을 인증받기 위해 치르는 '운전면허시험'이다. 난 다른 친구들이 하나둘씩 운전면허 학원으로 달려가던 고3 수능 이후, 오전엔 영어회화학원을, 오후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는 친구를 따라 택견을 배우러 다녀서 사실상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데모'하는데만 쫓아다녔으니 운전같은거 배울 세가 있을리 만무하고...

'인생 살아가는데 운전면허는 필수다', '나중에 직장생활 어떻게 할라고 그러냐?', '차 한대는 있어야 살 수 있는거 아니냐?' 등등... 빨리 운전면허를 취득하라는 압박의 수단은 다양하다. 우리 가족들도 서서히 이런 말들로 나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맨날 주차 문제 때문에 이웃들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 운전하면서 온갖 짜증 다 부리는 운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운전같은거 진짜 재미없겠다고 생각해오고 있던 터라 최대한 이런 요구들을 회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지금은 토익학원을 다니는 것을 핑계로 운전면허 취득은 내년초로 미뤄 놓은 상태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그 계획을 '취소'했다. 나는 내 소유의 차를 가지는 것은 물론 운전면허도 갖지 않을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내키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이제 아예 가슴속에 도장을 찍었다. '지구 천연자원을 파헤쳐 자연생태계가 그간 쌓아온 저금통장을 순식간에 까먹으며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온실가스를 배출해 나의 숨통을 조여오는 자동차 따위' 타지 않겠다고!! 나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안티-오토모바일리스트다!!!

 

 
자본주의의 '화석 에너지 동맹'과 결별을 선언하다!
 


물론 이런 개인적 선언은 뭇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 딱 좋다는 것 정도, 나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힘으로는 아프리카의 기아를 없앨 수도 없고, 지구 온난화도 막을 수 없지만..."으로 시작되는 대기업 홍보 광고따위가 이미 나를 비웃고 있질 않은가? "너 하나가 운전 안한다고 조그만 도시 하나의 대기 오염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으냐?"라고 비웃을 지 모른다. 또는 "너 그런 생각이라면 아예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마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대중교통과도 결별할 만큼의 배짱은 없다. 하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조금씩 그것들과 결별할 것이다. 지금 나는 충분히 운전면허증과 결별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래도 내 삶에 하등의 지장이 없다. (사실 나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실천을 안 할 뿐이다.) 이를 통해서 나는 지구 탄생 역사 45억년 중에 단 1%도 차지하지 않는 자본주의 근대 역사가 벌이는 화석에너지 강탈 동맹에서 조금이라도 빠져나오겠다는 것이다. 비단 자동차 뿐만이 아니다. 전기, 가스 사용량도 현격히 줄여서 '1인당 전기 사용량이 에펠탑 꼭대기에서 땅에 있는 자동차를 끌어올리는 힘과 같은' 이 정신나간 근대 에너지 동맹에서 서서히 탈퇴할 것이다. 난 이제 그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나 자신도 못 바꾸면서 무슨 세상을 바꾸냐?" 내가 예전에 학교 후배들 갈굴 때 자주 쓰던 말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나도 이걸 실천에 옮기는 셈이다.
내가 왜 이렇게 극단적이고 황당하게 들릴 법한 생각을 하게 되었냐구? 그것은 거의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박승옥 저, 녹색평론사, 2007)의 책임이다.

 

 

 

 

 잔치는 끝났다! 햇빛 에너지로 먹고 살자!
 

내가 이런 생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2008년 5월, 온 나라가 촛불로 타오를 때, 나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겠다고 거리에 섰다. 그러면서 광우병 문제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슈로 떠오르던 전 세계 식량 위기의 문제도 함께 공부했었는데,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 자본주의에 의한 생태계 순환 파괴에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생태위기에 관련된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의 한가지 단점부터 말하자면, 지겨우리만큼 비슷한 얘기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각각의 글들이 이 책을 내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지면을 통해 발표된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거의 모든 장에서 '피크오일'문제가 등장한다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 또한 피크오일 문제는 아무리 입에 쉰내가 나도록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동의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화석연료 문명, 즉 석유에 중독된 문명이다. 현대산업의 원동력은 값싼 석유이다. 20세기 들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석유는 자동차문명 사회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주 모든 분야에서 석유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게끔 만들었다. (...)

인류는 수억년 전 만들어진 자연의 보물 석유와 각종 천연자원을 단 몇백년 만에 마구 퍼다 쓰고는 또 쓰레기로 마구 내다버리고 있다. 이는 미래세대의 저금통장을 몽땅 털어먹는 도둑질이자 미래를 소비하는 파렴치한 범죄행위이다. 호모 사피엔스, 즉 '슬기로운 동물'이라기보다는 재생 불가능한 쓰레기를 만드는 동물, 눈먼 소비중독의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정확할 듯싶다.

- 64-65pp


이렇게 석유에 중독된 문명이 석유가 고갈되는 사태가 발생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1956년 킹 허버트가 발표한 대로 1970년 이후 미국의 석유 생산은 정점을 지나고 있고, 다른 국가들도 거의 비슷한 길을 밟고 있는 상황에서 석유 에너지 체제를 고집하는 것은 기름을 지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지금 한국 정부가 하고 있듯이 바다 곳곳을 쑤셔대서 새로운 천연자원의 저장소를 많이 발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에너지로 인해 가속화되는 지구 온난화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게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라는 점을 아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워낙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대중들에게 알려져서 새삼스러운 면도 없진 않지만, 이런 사실을 경제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기존의 주류 경제학은 자연자원을 '무상의 선물'로 여기기 때문에(이에 대해서는 존 벨라미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석유 에너지의 '공급'을 변하지 않는 사실로 고정시켜 버린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의 성립과 석유 체제의 확립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이 없다. 석유를 이용해 달리는 자동차를 보급하기 위해 철도를 매입해 철도 노선을 없애버렸던 석유메이저들의 만행은 그저 자유로운 시장경제 활동의 하나로 인식될 뿐이니 말이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석유 메이저들이 아무리 주가를 올리기 위해 석유 매장량을 속일지라도 진실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저자가 주장하는대로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햇빛 에너지를 비롯한 재생가능 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 햇빛 에너지 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겐 '똥'으로 바이오매스 에너지도 얻을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바로 "똥은 에너지다"라는 장인데, 저자는 이 글을 통해, 자본주의 근대 문명이 우리 사회에 이식되면서 도입된 수세식 화장실은 사실상 퇴비나 동물 사료로 쓰일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원인 '똥'을 폐기물로 인식하게 하면서 물질의 자연적 순환을 가로막는 '퇴보'의 상징이라고 말한다.(예전에 <<소금꽃 나무>>의 저자 김진숙 지도위원이 강연할 때 수세식 화장실은 초국적 자본의 개수작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러나 볏집이나 왕겨등을 같이 넣어 똥을 썩히면, 여기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는 전기로 이용할 수 있고, 남는 찌꺼기는 유용한 퇴비가 된다. 나는 유럽 몇몇 나라의 사민주의적 시스템을 동경하진 않지만, 이들 나라로 부터 배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똥'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자연친화적 시스템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하루 빨리 이들 나라들 처럼 국가가 재생가능 에너지를 고가에 매입해 주는 전기매입법이 도입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생태적 전환,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사실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과 재생에너지 체제로 전환이 중요하다는 말은 하는 것은 쉽지만, 그 길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말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나야 일단 운전면허 안따기 부터 시작한다지만 이걸로만 그친다면 그냥 쇼에 불과하지 않겠나? 저자가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재생가능 에너지 체제는 지금과 같이 한전과 국가가 주도하는 에너지 독재체제가 아니라 동네에 마련된 소규모의 발전소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에너지 자립체제여야 한다. 제주도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서 바다에 해저케이블을 깔아놓는 해괴망측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에너지 체제의 생태적 전환은 대부분의 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첨단 기술 개발 여부에 달렸다기 보다는 석유 에너지 체제를 유지하려는 거대 자본과 국가의 권력을 민중들의 운동을 통해 얼마나 약화시킬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래서 저자는 자연스럽게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진로에 대해 고민한다. 그저 신사회운동, 부르주아 시민운동의 하나 쯤으로 생태운동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금융위기/생태위기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노동운동, 농민운동도 생태적 전환을 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되는 지점은 바로 '폭력시위'에 대한 것인데, 저자는 단호하게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폭력시위는 그만두고, 차라리 전경들 먹는 식단 재료들을 유기농으로 바꾸는 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고 잘라 말하기도 한다. 말의 뉘앙스로 봐서는 기존 운동방식을 비판하고 생태적 전환이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든 비유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현재 농민운동, 노동운동이 폭력적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조건에 대해 너무 쉽게 간과하고 보수언론과 비슷한 방식으로 일갈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된다.

올 해 초 민주노동당이 분당하고 진보신당이 결성될 시점에 '녹색'인사로 박승옥씨가 참여하는 문제를 두고 노동운동 진영에서 말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들의 논지를 대략 요약하면 '박승옥은 너무 우파 아니냐?'라는 거였다.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생태운동에 무게중심이 가 있는 사람을 '우파'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렇고, 그 반대편에서 노동운동의 행동양식을 무조건 '폭력적이다'라는 말로 몰아세우는 것도 보기 안 좋긴 마찬가지다. 서로의 조건을 이해하면서 변화의 지점들을 찾아갈 수는 없을까?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넘어서야할 또 하나의 벽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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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2-14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자기 반성에서 나온 자동차 줄이기나 대중교통 이용하기...에는 눈감습니다. 그건 욕망이라는 자본주의의 추진력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미국은 그래서 요즘 중앙아시아의 가스자원 탈취에 여념이 없다는 소식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리뷰당선도 축하드리구요. ^^
 
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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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카.

러시아 말로 '삼두마차'라는 뜻이다.

세 마리의 말이 동시에 같은 힘으로 수레를 끌면서 가야하는 구조.

이것이 바로 이재유가 1930년대 경성 일대에서 노동운동을 이끌면서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상적인 조직의 형태, 바로 '경성 트로이카'의 모습이다.

 

요새 어쩌다보니 해방전후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책 저책 뒤져보고 있던 차였는데,

안재성의 멋진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우리집에서 버스타고 10여분을 달리면 나오는 도서관에 이 책이 있었고, 나와 경성 트로이카의 만남은 이렇게 손끝의 파르르한 떨림을 느끼면서 시작되었다. ^^;; (이런 책을 가까운 공공 도서관에서 이리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사실 시립, 구립 도서관을 조금만 뒤져보면 이런 보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사실 나는 이 책 제목만 보고 이 책이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소설은 아니라도... 아, 그럼 이 책은 어떤 부류로 넣어야 하나?

단순한 역사책이라고 부르기에는 '역사책'이라는 말이 너무 투박하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핵심 인물로 다루고 있는 이재유라는 인물의 평전인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그에 대한 평전이라고 하기에는 동덕여고 출신들의 운동사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 이 책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굴의 투사들에 대한 정당한 기록, 바로 진정한 역사 다큐멘터리다. 특정인물에 대한 평전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영웅사관 따위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그 당시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고뇌와 열정의 숨결들을 세심하게 포착해 낸, 역사실록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든 첫 번째 느낌은 무엇보다 경성 트로이카의 구성원들 모두 결과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남한에서는 물론이고, 북한에서조차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현상, 김삼룡같이 남한 땅에서 죽임을 당해 북한에선 혁명열사로 추앙받게 된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이들이 지도했던 남로당도 북한 노동당에게는 외면을 당했고, 그렇게 염원하던 공산주의가 북한에서는 실제 너무나 강압적이고 연고주의의 고루한 것으로  서서히 드러나자 낙담하고 운동을 포기한 이들도 있고, 그 이전에 일본 경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트로이카의 우두머리 이재유 등이 있다.

 

나는 어쩌면 우리 현대사에서 이들의 존재가 잊혀진 것이 사회주의 운동의 크나큰 비극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재유를 비롯한 트로이카의 일원들은 철저하게 대중의 힘의 근거한 사회주의 운동을 도모했고, 현장에 기초하지 않은 어설픈 이론주의로 대중을 계몽하려 하지 않았다. 때론 이런 입장 때문에 국제선을 주장하는 다른 사회주의 그룹이었던 권영태 그룹과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이재유는 아직 초기단계에 있는 경성의 노동운동을 지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원산으로 옮겨 이주하 등과 노동운동을 함께하라는 코민테른의 명령도 거절한다. 경성 트로이카는 그야말로 일제치하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자주파 사회주의자'들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에 비하면 사실 김일성 등이 말하는 '자주'는 얼마나 빈약하기 그지 없는가? 그는 압록강 인근에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탄압이 심해지자 소련으로 쫓겨가 적군부대 밑에서 수십명의 유격대만을 거느리고 활동했을 뿐이다. 게다가 해방 이후 소련의 지시에 따라 국내 여론을 무시한 채 진행된 신탁통치 지지운동은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국내 좌파세력의 괴멸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면 경성 트로이카의 주축 인물이었던 김상룡(당시 남로당 책임지도자)은 국내 인민의 여론을 감안하여 찬탁운동에 신중한 뜻을 내비쳤다.

 

그에 비하면 이재유의 트로이카는 아무리 심한 탄압에도 조선의 혁명은 국내 노동자 인민의 힘으로 이뤄야 한다는 일념으로 경성지역에서 연쇄총파업을 일으키는 등 엄청난 '자주적' 성과들을 만들어 냈다. 어쩌면 김일성 등의 해외파가 이재유 사후에 남은 국내파들을 압도한 것이 우리 역사의 엄청난 비극이지 않나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사회주의는 철저히 대중운동에 기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권영태 그룹과의 통합논의 과정에서도 상부 단위의 음모적 논의를 통한 통합이 아니라, 공동의 대중투쟁 과정을 통한 사상적, 행동적 통일을 꾀했다.

 

2009년 벽두에 80년 전의 혁명가들의 족적을 따라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 경찰의 미행을 피해 신출귀몰해대는 식민지 혁명가들의 장엄한 삶의 파노라마를 보면서 때론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의 역사를 통해 다시 21세기 좌파의 새출발을 상상해 본다. 어차피 이젠 코민테른같은 국제적 지도부도 없다. 다시 이 땅에 진정한 '자주적 사회주의'가 꽃피울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트로이카의 마차를 끌 말들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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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Will님의 "사랑은 쿵푸가 아니다."

저기... 외람된 말씀이지만... 50쪽 이후부터도 꼼꼼히 읽어보시는게 어떨지요?? 사랑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라는 저자의 말은 단지 나만을 위한 이기주의적인 사랑을 하라는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사랑이라는 것이 몸과 정신의 분리라는 근대적 이분법적 사고속에서 어떻게 몸을 배제해 왔는지를 밝혀내고, 사랑은 '몸'으로 하는 거다, 자신의 '몸'을 통해 '공부'하는 거다, 그 공부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깨달으면서 결국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다... 뭐 이런 건데... 오해를 해도 잔뜩 오해를 하신듯... 그리고 저자는 "결혼 후에도 내몸을 위해 여러사람들에게 달려드는 사랑의 실력"따위는 키우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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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
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김현구 옮김 / 현실문화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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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위기’에 관한 새삼스러운 고발

- 서평 :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존 벨라미 포스터, 현실문화연구, 2001)




얼마 전 MBC뉴스에서는 “서울에 ‘열대 과일’ 자란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간 적이 있다. 뭐 사실 이런 류의 기사가 새로운 것은 아니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니긴 하지만, 유독 이 기사가 ‘황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대목이 있다. 바로 방송 맨 마지막에 인터뷰를 한 농촌진흥청 연구정책국장이라는 사람의 발언 때문이다. 이 사람 인터뷰 직전까지 세계 평균에 비해 한반도 기온이 2배 이상 빠르게 상승하고 있고, 그래서 고랭지 채소 수확량이 급감했으며, 새롭게 나타난 해충도 골칫거리라는 암울한 내용이 전해졌다. 온난화 문제가 확산되면서 전 세계적 식량 위기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국책 연구기관에서 국장이라는 자리에 까지 와 있는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다. “망고, 파파야, 키위 등 열대작물을 개발해서 수입을 대체하는 효과를 발휘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오히려 국내 농업 경쟁력을 강화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라는 말도 덧붙여졌을 법 하지만, 이 양반의 말이 너무 민망하다고 생각한 담당PD가 편집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지구 온난화가 진행된다면 해수면이 가파르게 상승하여 지구상의 몇몇 섬은 지도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고, 생물종의 대다수가 멸종할 가능성이 높다는 웬만한 과학자들의 충고는 고리타분한 맹자왈 공자왈 쯤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프리카나 남미의 나라들처럼 식량작물을 포기하고 환금작물로 농업을 다 갈아 엎어버리면 농업 경쟁력이 상승할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것일까? 혹시 집에 TV가 없어서 이들 나라가 최근의 애그플레이션으로 인해 엄청난 식량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신 것인지...?? 아! 농진청 국장님의 구상대로라면 한 동안 사람만이 자원이라던 우리나라가 엄청난 농업 수출국이라도 되는 것일까? 여하간에 다양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인터뷰 대목이었다.

이렇게 나이브한 생각을 가지신 분에게는 ‘생태위기’에 대해 포괄적이고 친절한 설명이 요구되는데,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는 바로 이런 양반을 위해 준비된 책이라 할 수 있다.

 


1. 생태위기의 범인을 찾아라!

사실 위의 인터뷰에서 보여진 입장을 비롯해서 최근 환경과 생태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략 다음과 같은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생산적 부에 대한 자연의 기여를 ‘무상의’ 이득 또는 공짜 선물로 취급한다. 위의 인터뷰에서는 심지어 기후의 교란 조차도 수입대체 효과를 낳을 수 있는 ‘기회’(즉 ‘공짜 선물’)로 보고 있지 않은가? 둘째, 환경변화에 따르는 위기를 단순한 기술적 진보나 새로운 국제협약을 통해 탄소배출 감축량 등을 정하는 것으로 해결될 것으로 본다. 최근의 교토의정서 협약에 포함된 ‘탄소거래’가 바로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앞의 두 가지 입장의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셋째, 자본주의적 경제성장과 생태의 보존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때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들고 나온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슬로건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포스터는 이와 같이 생태위기에 대한 고전적인 입장에 통렬하게 일침을 가한다. 그의 다른 책(『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 책갈피, 2007)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생태계의 안전과 자본주의는 양립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여기서 마르크스의 ‘신진대사의 균열’(metabolic rift)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즉 노동뿐만 아니라 자연도, 산업혁명이 인도하는 새로운 조건들의 결과로 점점 더 자본에 종속되고 있으며, 자본주의는 도시와 농촌을 분리(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20세기 후반의 가장 극적이고 가장 영향이 널리 미친 사회적 변화이자 우리를 과거세계로부터 영원히 단절시킨 변화는 농민층의 사멸이다.”라고 말한 바로 그것!)함으로써,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에도 공업적인 기법들을 적용함으로써 인간존재의 생태적 기초를 파괴했다고 본다. 이로 인해 생명 그 자체의 자연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 물질대사의 상호 의존 과정에 비가역적인 균열을 불러일으키는 조건이 만들어지고, 그 결과 토양 생명력이 낭비되고 이 낭비는 무역에 의해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무역에 의해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부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을 통해 저자는 생태위기가 일국적 경제성장 전략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체계적 메커니즘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경계를 넘어서’라는 말은 단순히 개별 국가들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서 한 나라의 생태위기가 다른 나라로 전이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을 초과하여,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등장과 함께 구조화된 불평등한 국가간체계의 문제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사탕수수 재배의 세계화’(이 표현은 그냥 내가 붙인 거다)의 예를 든다. 사탕수수는 주변부의 환경을 변형시킨 최초의 현금작물이다. 아메리카 발견에 성공한 개척자(??)들은 카나리아 군도의 원주민들을 노예노동을 위한 인력으로 뽑았다. 개척자들(아, 왜 이렇게 이 단어가 거슬리냐?)은 이들을 활용해 다양한 생물종이 번성하던 땅을 사탕수수 생산을 위한 단종경작의 대농장으로 변화시켰다. 이와 같은 단종경작의 결과 이 식민지들은 식량을 유럽과 북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내륙에 의존하게 되었다. 최근 제3세계 식량위기로 인해 운위되고 있는 ‘식량 제국주의’의 출발은 바로 자본주의 세계체계가 성립되던 15-16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계 비판에 바탕을 둔 포스터의 생태위기에 대한 인식은 생태에 대한 미국 사회의 전통적인 두 진영, 즉 보호주의(conservationist)와 보존주의(preservationist) 모두와 차별점을 가진다. 전자의 경우 미국의 대기업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으로서 환경악화에 반대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이윤을 위해 자연자원의 이용을 규제, 합리화하려 했던 쪽에 속한다. 테오도르 루즈벨트와 기포드 핀쇼가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데, 이들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관리자’를 자청해 왔다. 생태계가 자본에 점점 더 종속됨에 따라 인간존재의 생태적 기초가 파괴된다고 보았던 포스터가 “우리의 번영은 우리의 주요산물의 생산과 미국 전역을 통한 그것들의 상업적인 유통에 기반해 있으며, 이는 또 그 산물들이 숲으로부터 적절한 비용으로 적당한 양만큼 영원히 공급된다는 점에 불가분하게 의존해 있다.”고 말하는 과학적 관리의 입장과 교차점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포스터가 산업혁명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기술적 진보를 거부하고 ‘생태적 양심’이나 ‘땅의 윤리’와 같은 도덕주의적 방식으로의 회귀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불평등하게 조직해 내고, 생태적 교란을 심화시키는 ‘사회적 구조’였다. 그런 이유에서 포스터가 아무리 프란시스 베이컨과 같은 근대 계몽주의자의 이성에 대한 낙관주의를 비판한다고 해도, 이성에 대한 거부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환경영향에 관한 코모너의 연구를 차용하여 다음과 같은 공식을 제시한다.







I = P×A×T

 

I : 환경영향,  P : 인구,  A : 부(富)와 관련된 물질산출량, 

T : 물질산출량을 생산하는데 사용되는 에너지 단위당 환경영향(기술)



오늘날의 논의에서 환경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인구증가에 기인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부(A)와 기술(T)이 거의 언제나 일정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종종 무시된다. 이러한 맬더스적 관점에서는 인구성장이 교체 수준(‘높은 사망률-높은 출생률’의 단계에서 ‘낮은 사망률-낮은 출생률’의 단계로의 인구학적 이행)에 접근하는 부자 나라들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에 환경문제의 주된 책임이 돌려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3세계 나라들이 인구학적 이행의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여 교체수준의 번식력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국제적 불평등 구조의 결과일 뿐이다. 즉 “식민주의는 세계의 부의 분배뿐만 아니라 인구의 분배도 결정하여, 대부분의 부를 북반부에, 그리고 대부분의 인구를 남반부에 집적”시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작가 저메인 그리어의 말을 인용하여 쓴 다음 부분은 음미하면 할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기근의 기억이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한,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어린이 수를 줄임으로써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하나 더 있다고 해서 동냥질에 방해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경제체제가 다수의 궁핍화를 야기한다면 그런 일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며, 실제로 이로 인해 극빈자의 확산이 더욱 심화되었다.”



2. 자본주의 농업․생태체계를 인식하기

이 책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20세기 후반기의 생태위기에 대해 다룬 6장 「상처받기 쉬운 지구」이다. 이 부분에서의 설명이 비록 여러 사례의 나열 형태이기는 하나, 그 분석의 방법은 최근 광우병 사태, 멜라민 파동 등으로 붉어진 자본주의 농업․생태체계의 문제와 먹거리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해 나가는데 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의 설명을 더욱 보충․심화하는 것으로는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제이슨 무어 외, 공감, 2005)을 들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포스터의 몇몇 글도 번역되어 소개하고 있다.)

먼저 주목해 볼 것은 영농과 농업 사이의 괴리 증가에 관한 것이다. 르원틴과 베를랑은 이 둘의 차이를 전자는 밀을 생산하는 것이고 후자는 비료를 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정의한다. ‘밀’이라는 생산물이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영농 그 자체는 이제 농업생산물의 평균 부가가치 중에서 겨우 10%만을 차지할 뿐이다. 나머지 90% 중에서 40%는 농업 투입물(종자, 비료, 살충제, 기계 같은)에 의한 것이고, 50%는 생산물이 농장을 떠난 이후 주로 마케팅과 유통비용의 형태로 부가된다. 그 결과, 비록 영농 자체는 “많은 수의 소생산자들에 분산되어 있지만” 농업 투입물의 판매와 농업 생산물의 마케팅과 유통을 독점하는 소수의 대기업들이 영농에서의 생산 조건을 통제하고 농업 이윤의 대부분을 거둬들인다.

농업과 영농의 괴리 증가는 사실 미국자본주의 하의 ‘녹색혁명’의 기본적 펀더멘털이라 할 수 있다. 자유무역체계에 종속된 농업 시스템은 자국내의 자족적 식량생산을 파괴하고 이를 단종경작 중심의 환금작물 재배로 대체한다. 이 때 종자의 생산, 보급, 생산과정, 유통과정 전반이 초국적 농식품기업의 통제하에 놓여지게 된다. 여기서 농민은 전통적인 부농/빈농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pt화 되는데, 이들은 농업 생산물 생산 과정에서 가장 위험하고 자연재해에 쉽게 노출되는 ‘영농’을 담당하게 된다. 예컨대, 식품산업자본이 종자, 비료, 기계 등을 농민에게 제공하고 매뉴얼화된 농작법에 따라 생산을 강제한 뒤, 2차가공의 원료로서 농산물을 다시 사가는 것인데, 이 때 품질검사 탈락이나 풍수해, 병충해 등으로 인한 손실은 모두 농민책임이 된다.

이로 인해 농민은 자본주의 농업 시스템에 실질적으로 포섭된다. pt화된 농민과 함께 자연도 실질적 포섭에 묶이게 되는데, 그 결과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신진대사의 균열’이 심화되는 것이다. 개별 농민의 독립적 통제하에서 작동하던 ‘토지-가축-농산물’의 영양물질의 순환은 초국적 농산품기업의 통제하의 ‘화학적/인공적 투입물(교배종 종자 또는 유전자 조작 종자, 화학비료 등)→농산물’의 선형적 흐름으로 대체된다. 자연 생태계를 ‘무상의 선물’로 인식한 초국적 자본이 오로지 자본축적을 위해서만 생태계를 변형/조작함으로 인하여 지속 가능한 농업․생태체계는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pt화된 농민, 자연의 자본으로의 실질적 포섭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종자생산의 상품화’라 할 수 있다. 농업의 전 과정을 단일한 법인자본 하에 수직적으로 통합한 몬산토, 듀퐁, 카길과 같은 초국적 농산품기업들은 유전공학의 힘을 빌어 종자생산을 통제한다.(ex: GMO) 생산량 증대를 목적으로 유전자 조작된 종자들은 보통 해충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고, 자연재해의 피해를 덜 입는 특성을 지니지만, 이런 종자를 사용한 농부들은 매년 새 종자를 구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유전자 조작된 종자들은 진품을 낳지 못하며, 이들 자손들은 그 이전 세대에 비해 산출량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변종 종자들은 초국적 기업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기술 패키지가 수반되었을 경우에만 좋은 산출량이 나온다. 그 뿐인가? 변종 종자들은 이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관개용수를 요구하며, 이를 재배하는 농민들의 건강을 해친다. (몬산토사가 만든 유전자 조작 Bt면화를 생산하는 인도 농민들은 피오줌을 싸는 질병에 걸리고, 이를 먹고 자란 염소들은 대량 폐사했다.)



3. 새삼스러운 위기, 뒤늦은 인식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껏 운동을 하면서, 생태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올 해가 처음이다. 심하게 말해서 그 전까지는 ‘생태위기’ 떠들고 다니는 얘들을 좀 우습게 봤다. 변명이긴 하지만 그 때의 ‘무시’가 그렇게 근거없는 짓은 아니었다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생태’ 운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뭔가 도덕주의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치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 문제를 거창하고 거시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손 치더라도, 지금 환경단체의 대부분은 개인적인 양심에 호소하거나, 정부에 청원하는 형태의 운동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들의 인식속에 자본주의라는 생태계 파괴의 가장 큰 범죄자에 대한 인식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듯 하였다.

그런 와중에 광우병 파동, 전세계적 식량 위기 이후에 명박이는 새삼스럽게도 ‘녹색 성장’을 들고 나왔다. 일단 나는 이 구호가 명박이 개인의 정치적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차원에서 제기되었다고 본다. 사실 서울시장 재직 시절, 청계천 복원공사를 통해 나름 환경 친화적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놨는데, 대운하 때문에 엄청 이미지 구기지 않았던가? 이걸 만회하려면 자기 이미지에 나름 쐐기를 박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이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녹색성장'이란 구호는 어딘가 광고 카피스러운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

하지만 이건 좀 부차적인 이유다. 더 중요한 것은 전 세계적 정세가 '녹색'을 강제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멍청한 부시만이 부인하고 있지만) 2-30년 안에 오일 피크가 도래한다는 것은 지질학자가 아니더라도 상식 수준에 속하는 것이어서, 당장의 에너지 위기 해결이 전 세계적 과제가 되었다. 게다가 한국도 1997년 체결된 쿄토의정서에서 합의한 나라로서 이산화탄소 감축량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현재 에너지 체계에 대한 제고는 아무리 명박이 똥배짱이라 하더라도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였다. 정부가 이 '녹색성장'을 중심으로 경제위기를 탈출하고 신성장동력을 창출하겠다고 나섰다. '녹색'이라는 담론이 이명박 정부에겐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하나의 비상구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사실 내가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어찌보면 명박이 때문이다. 명박이 덕분에 새삼스럽게 위기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열라 고맙다!!)

그런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정부가 '석유 이후 시대'를 준비한다면서 제시한 제1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에는 새로운 원전 개발, 수소에너지, 원자력 에너지 비중 확대와 같이 화석에너지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거나 화석에너지 만큼이나 환경파괴의 문제점이 거론되어왔던 것들이다. (현 정부의 이러한 에너지계획에 대한 반론으로 적절한 책으로는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강양구 저, 프레시안북, 2007을 들 수 있다.) 바로 어제까지 러시아를 방문하고 온 명박이가 러시아 대통령하고 합의했다는게 러시아에서 직통으로 남한까지 가스 송유관을 연결한다는 것이란다. 이게 대안에너지 체제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건설자본 중심의 회색빛 경제성장 정책이 국민들에게 약발이 안먹히는 것 같으니까 겉 표면만 녹색으로 덕지덕지 칠한 '삽질 경제정책'의 2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서평을 마무리 지을 타이밍이 왔다. 이 글이 최근 생태위기를 둘러싼 정세를 분석할 목적으로 쓴 글은 아니니까... 그 방향이야 어찌됐든 간에 정권차원에서도 '녹색'과 '생태' 담론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무엇을 위해서 이런 담론을 활용하려 하는지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이명박이가 전통적인 자본주의적 성장 전략을 포기하고 생태주의로 돌아섰다고 단단히 착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포스터가 다른 글에서 언급하는 아래 글을 음미해 보자.

 

(오코너의) "두 번째 모순" 개념의 전반적 취지는 일단 생태적 손상이 자본주의의 경제위기로 전환되면 일종의 피드백 매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직접적으로는 자본이 생산조건의 손상과 결합된 생산비용의 증가를 억제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간접적으로는 사회운동이 체계로 하여금 외부효과를 내부화하도록, 바꾸어 말하면 자본이 외부화해온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지불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체계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생산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 (...)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전체로서 자본주의에는 그러한 피드백 매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 녹색당이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계는 마지막 한 그루의 나무가 벌목되었을 때야 비로소 화폐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인간사회와 대다수 생물종을 위해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주 혼란스러운 생태 파괴의 와중에도 축적할 수 있고 (예컨대 폐기물 관리산업의 성장을 통해) 환경 훼손으로부터도 이윤을 얻을 수 있으며 회복 불가능한 지점까지 지구를 계속 파괴할 수 있음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달리말해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 생태 문제의 위험은 자본주의 체계가 그것을 재촉하도록 인식하게 만드는 어떤 내부적 (또는 외부적) 조절 매커니즘도 그 체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더 심각하다. 생태에는 경기순환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 존 벨라미 포스터,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中

 

자연생태계를 무상의 선물로 여기는 자본에게 생태계의 교란이 이윤 압박을 가져와 자본 스스로 생태계 치유비용을 내부화하기 위한 자정 노력이 발생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은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안정적인 생태계가 자본에게 무상의 선물이라면, 자연 자원의 희소성 또한 자본에게 무상의 선물이 된다. 자연 생태계를 사유화한 자본이 '희소성 판매'에 나선다면 '생태계 파괴'라는 자연적 상황 또한 자본 축적을 위한 안정적인 조건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에서 어렴풋 하게나마 이런 더러운 속셈을 훔쳐보고 있다. 전 세계적 담수부족 현상을 물 사유화의 유리한 조건으로 활용하고, 지구 온난화는 열대 과일의 수입 대체 상품화의 기회로 인식하는가 하면, 대체 에너지 개발은 탄소거래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논의의 중심에 '지속가능한 생태'에 대한 문제의식이 빠져있다.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는 생태위기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며, 어디서부터 물고 늘어질 것인지, 매우 새삼스러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왜 우리가 녹색'성장'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녹색', '생태'를 지향해야 하는지 고민이 드는 사람이라면 포스터의 이 책으로부터 시작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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