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귓속말 - 마음을 두드리는 감성 언어
김기연 지음 / 어바웃어북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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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가 쓴 책들을 좋아한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번뜩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쓰는 글이라,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정철이라는 작가를 통해 알게 된 '카피라이터'들의 책, 그리고 여전히 읽기만 하면 내 마음을 두드리는 그네들의 책. 사실 혹자는 특별할 것이 없다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혹자는 누구나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누구나가 다 아는 것'을 '같지 않게' 설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카피라이터들이 하는 일이고 그들의 힘이라 생각한다. 남들과 다른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들과 같은 것 또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와는 꽤 상성이 좋은 책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작가의 이력 중에 '카피라이터'가 있다면 그냥 스쳐 지나갔다가도 다시 한 번 들춰 보는 편이고, 그렇게 해서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꽤 즐겁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단어의 귓속말>이라는 감성적인 책 제목도 내 마음에 들었지만, 카피라이터라는 작가의 이력에도 혹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미 제목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단어가 작가에게만 들려준 자신의 새로운 면의 모습'이라는 주제일 것 같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그렇다면 책에서 중요하게 볼 것은 단 한 가지다. 이 책에 속해 있는 단어들은 과연 남들이 모르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냈는가에 대한 것.


하지만 나는 '작가의 말'에서 이미 넉다운 당했다. 단어에게도 등이 있다는 작가의 말 첫 줄에서부터 말이다. 

단어에게도 등이 있다. 뒷모습을 보기 전에는 결코 볼 수 없는 단어의 '아우라' 말이다. 그는 보통 인간이 만들어낸 문장으로 꼴을 갖추지만 그로써 환희에 차거나 찬란하지는 않다. 뭐랄까 아직 햇살을 받지 못한 그늘 속 꽃이랄까. (중략) 사전에 포획된 단어의 뜻풀이는 진부한 연애처럼 시큰둥하다. 아름답지만 멍한 표정이다. 긴 세월 갇혀서 멍청이가 되기라도 한 것 같다. (중략) 달뜬 그가 내게 속삭이듯 귓속말을 내뱉는다. 목소리는 비밀을 토로하듯 거침없지만 조심스럽고 가녀리다. 그 순간이 되면 단어가 내 곁을 배회하는 것인지, 내가 단어를 기웃거리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_작가의 말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단어를 의인화했다. 그리고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단어를 애무한다 했다. '누워서 일어설 줄 모르는 단어를 입에 넣고 느낄 때'라든가 '몸을 포갠 채 혀로 등을 애무하면'이라든가의 표현들은(작가의 말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의인화된 단어를 애무하는 표현들이었고, 작가는 결국 자신이 괴롭혀 황홀한 귓속말을 들었노라 이야기했다. 단어를 여러번 곱씹어보며 입속에서 혀로 단어를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애무한다라고 표현하는 작가의 발상- 내가 '작가의 말'만 보고 작가에게 넉다운 당했다고 이야기 한 이유다. 그리고 역시나, 본문 속에서도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들이 차고 넘쳤다.


일단 차례에서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찾았다. 눈물, 친구, 눈, 책, 비밀, 거짓말, 꿈, 우산, 여행, 사진, 시간, 바다, 운명, 잠, 삶, 비, 바람, 인연, 중독, 그리고 음악. 보편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기에 일단은 끌리는대로 읽었다. 눈물은 첫 번째 단어이기 때문에 읽었고, 그 다음부터는 한 페이지 가득 작가가 쓴 캘리그라피 단어를 보고 마음에 드는 단어들의 귓속말부터 전해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 하나 빠짐없이 읽었다. 한 번 봤던 이야기들은 익숙하니까 더 자세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고, 처음 보는 단어들의 이야기들은 낯설면서도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기도 했다.


눈물 ; 어떤 날에는 흐르는 눈물을 방치해도 괜찮다. 당신을 소독하는 중이니까. (13쪽)

책 ; 채집된 텍스트. 포획된 것이라 해서 추억이 없는 가공식품이 아니다. 미동은 없지만 가장 활발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채집된 글자와 낱말과 문단 사이에서 돋아난 날개가 낯선 너머의 세계로 인도한다. (43쪽)

사랑 ; 변하고, 스러지고 바래서 슬픈 것이 아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 (63쪽)

밥 ; 세상 모든 욕망의 기초 단위. 먹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고 삼켜야 한다는 명분 앞에서 밥은 삶 자체가 된다. (110쪽)

사진 ; 사진기로 채집한 시간의 비늘. 순간의 장면이 아니라 기억의 덩어리를 압축하듯 포장하는 것이다. (121쪽)

추억 ; 기억에의 그리움이다. 애틋한 되새김이자 이룰 수 없었던, 혹은 다가서지 못한 아쉬움이다. (169쪽)

바람 ; 그곳에서 태어난 바람이 지금, 당신 곁을 지나간다. 녀석은 때로 사람 안에서도 분다. 그리움에서 간절함으로 불어가고, 긴장에서 떨림으로 휘몰아가는 깊은 감정의 골짜기에도 분다. (193쪽)

혁명 ; 내 안에 오래도록 자리 잡아온 냉소와 무관심, 습관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하는 것에서 혁명은 마침내 의지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263쪽)


작가의 말에서 '인간이 단어에게 걸쳐놓은 인위적인 옷을 벗기고 싶었다'고 이야기한 작가. 작가는 단어들에게 전해들은 귓속말로 한층 더 가깝게 단어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그토록 자신이 원했던 단어의 그 이면의 민낯을 볼 수 있었을까. 내가 보기엔 아직은 단어가 제 온 몸을 보여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아마도 당신에게 그 단어가 귓속말을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자신만의 시선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들어질 또 다른 민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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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 주세요!

 

 

책 한 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작가의 책이 어디론가 숨어버렸다ㅠㅠ) 매번 찍어야지 찍어야지 했었던 신간평가단으로 받은 책탑을 드디어 사진으로 찍어봤다. 조금 많이 어렵게 느껴졌던 <조지프 앤턴>부터 꼭 읽고 싶었던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까지. 책으로 내 마음의 양식이 그득그득 쌓였다고는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올해도 해냈다!라는 마음은 드는 것 같다.

 

매번 마지막 페이퍼를 쓰면서 하는 말이 "다음 기수에도 내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였는데, 과연 다음 16기때는 어떠려나. 6개월이라는 시간이 또 쏜살같이 간 것 같다. 분명히 15기를 시작할 때는 추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여름이다. (오늘이 말복!) 괜히 하는 일이 많아져 파트장님께 몇 번 마감 기일을 미뤄달라 말씀 드리기도 했고, 읽는 게 더뎌서 힘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무사히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더군다나 이번엔 내 스스로도 조금 벅차다 싶어서 간당간당했는데 중간에 떨쳐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어찌됐든 잘 마무리 지었다는 것에 더더욱 큰 박수를 보낸다.

 

 

 

 

올해의 베스트 5

 

 

 

1. 태도에 관하여 / 임경선

 

읽으면서도 가장 신났던 책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좋은 느낌을 받았던 기억도 있고, 글이 재미있던 기억도 있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엔 무슨 책인지도 잘 몰랐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폭풍공감하며 작가의 글솜씨에 감복하며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이 책이 내게는 15기의 베스트 책이다!!

 

 

 

 

2.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이동진, 김중혁

 

빨책효과로 인해 읽을 수 있었던 책. 팟캐스트 빨간책방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올 수도 없었을 책. 늘 귀로만 듣던 빨책을 활자로도 읽으니 두 사람의 썰렁 개그가 더 썰렁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흘려 듣는 것보다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하다.

 

 

 

 

3. 나의 사적인 도시 / 박상미

 

나는 '나의 사적인' 시리즈를 알지 못했다. 다만 이 책 또한 읽으면서 그곳에서 있었던 작가의 시간과 생각들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나는 하지 못했던, 하지만 작가는 직접 겪었던 일들이 흥미롭게 다가왔던 책.

 

 

 

 

4. 그래도 괜찮은 하루 / 구작가

 

예쁜 그림 속에 덤덤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당신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인가요?'라고 되묻던 구작가.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으로는 전혀 할 수 없던 긍정의 힘을 보여줬던 책이다. 나는 참 열심히 살아야 하는거구나,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 책이기도 하고- 사실 일러스트가 너무도 예뻤고 말이다.

 

 

 

 

5. 금요일엔 돌아오렴 /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읽으면서 참 많이도 울었던 책. 이미 아팠음에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들추기만 하면 여전히 아픈 그 한구석을 볼 수 있었던 책이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은 겉핥기였고, 지금 유가족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면서도 고스란히 담아낸 책이라서 읽으면서 아팠다. 한 장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책을 부여잡고 울었던 게 한 두 번이 아닐만큼 읽는 이들에게 아픔을 고스란히 전해준 책이다. 하지만 참사 이후 변하는 게 없다는 현실도 알려준 책이라서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한 번쯤은 읽어봤음 좋겠다 생각했다. 제대로 알아야 할 이야기이고, 앞으로 두번 다시 겪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가는데 여전히 현재 진행형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여전히 마음 아프다.

 

 

 

위에도 이야기 했다시피 나의 베스트 책은 <태도에 대하여>다.

생각보다 재밌고 생각보다 즐겁고 그리고 읽는 내내 유쾌했다. 잘 읽히고 기분이 좋은 책.

 

 

 

 

 

-

 

이렇게 15기도 마무리 됐다. 페이퍼를 또 다시 쓸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기에 더 열심히 리뷰를 쓰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한 것 같다. 다음 기수에는 지금처럼 벅차 하지 않고, 즐겁게 가볍게, 조금 어려운 책이 와도 열심히! 해 볼 것을 다짐(?) 하면서.

 

16기때 또 만나요~ (누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든?;;)

이제 진짜 15기와는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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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온 코코 샤넬 보그 온 시리즈
브로닌 코즈그레이브 지음, 이상미 옮김 / 51BOOKS(오일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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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 <보그 온>을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보그가 본 디자이너'라고 말 할 수 있다. 보그 VOGUE 라는 잡지가 창간된 해가 1892년이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브랜드들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봤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같은 시간대를 지내면서 그들의 많은 것을 알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궁금해 한다. 현재 우리가 명품이라 일컫는 브랜드들이 그 당시에도 그런 느낌을 줬었는지 아닌지, 디자이너는 그 옷을 어떤 생각을 갖고 디자인을 한 것인지, 그때 당시의 그 브랜드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결론적으로 이 명품은 언제나 명품이었는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 명품이 된 것인지 말이다. 더군다나 '샤넬' 같이 여성들이 열광하는 브랜드라면 더더욱.


그래서 그런지 나도 이 책 이름을 봤을 때 궁금했었다. (구미가 확 당겼었다.) 보그라는 잡지 이름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었고, 유명한 디자이너의 이름들이 그 바로 다음에 붙은 책이었으니 말이다. 알고보니 <보그 온>은 시리즈로 기획된 책이었다. '천재 디자이너'들에 대한 비평을 담은 책으로, 출간 당시부터 여러 노력으로 이루어진 보그의 '패션 바이블'이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도, 보그에서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최대한 활용한 책. 현재 시중에 출판된 디자이너는 4명으로 코코 샤넬, 지방시, 발렌시아가, 랄프 로렌 등인데, 이들 중 누구도 천재라 불리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패션계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여러 디자인들이 보고 싶다면, 그리고 그 디자이너의 생애(정말 패션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디자이너가 죽을 때까지)와 가치관을 보고 싶다면 이 책 <보그 온>을 추천한다. 


책에 나타난 샤넬은 '트렌드를 빠르게 파악하며 한 눈에 고객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코코샤넬과 함께 일한 공방의 책임자의 말을 빌려 '쉽게 만족하는 법이 없고, 매우 엄하고 가차없는 디자이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후 50년이 지난 어느날 1급 재단사를 그 자리에서 해고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뉴욕 타임즈>의 리포터가 있는 것으로 봐선, 그녀의 완벽주의자적 성향이 젊어서 뿐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늘상 한결같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과 옷에 대한 프라이드가 굉장해 가격표에는 상당히 높은 액수가 적혀 있었다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ㅡ이처럼 책은 그녀와 관계된 일화들을 끊임없이 풀어놓는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채우는 것은 눈을 즐겁게 만드는 일러스트와 사진들이 채운다. <보그> 잡지에 싣기 위해서 보그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그린 여러 일러스트들이 그린이의 느낌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현이 되어 있다. 샤넬이 만들어 낸 옷은 하나의 스타일을 유지해 나갔음이 일러스트를 통해서도 눈에 고스란히 보였으나 (샤넬이 어떤 느낌인지 몰랐던 사람이라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디자인 특징을 잘 살려낸 일러스트들이다.) 그럼에도 다른 느낌을 갖게 되는 일러스트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이사이 라고는 해도 꽤 방대한 양의 일러스트들이 들어 있고, 샤넬의 초창기 디자인부터 죽기 직전까지의 디자인까지 총망라되어 있으므로 그녀의 변천사가 궁금한 사람들에게도 재미있는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날카롭고 사나우면서도 자신의 디자인과 옷에 가지고 있는 철학에 대해 뚜렷이 이야기하는 코코샤넬이 한편으로는 대단해보이기도 했다. 원래 대단한 사람이라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내보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브랜드를 운영하는 경영자로서 꼭 필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치밀하고 완벽주의적 성격이 어떤 식으로 브랜드를 키워냈는지를 볼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더군다나 책 중간중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그녀의 말들은 현 시대에도 모두 통용되는 이야기들이라 새삼 다시 감탄했다.


- 우아함은 갓 청소년기를 탈출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미래의 주인이 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 패션은 그저 옷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패션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아이디어와 함께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 여성이 옷을 지나치게 차려입을 수는 있지만, 우아함에는 지나침이 없다.

- 여자들이 어떻게 조금도 꾸미지 않고 집을 나설 수 있는 지 이해할 수 없다. 이건 예의의 문제만이 아니다. 바로 그 날이 운명적인 만남이 예정된 날인지 누가 알겠는가? 운명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다.

- 초라하게 옷을 입으면 사람들은 그 옷을 기억한다. 그러나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게 입으면 사람들은 그 옷을 입은 여자를 기억한다.


왜인지 현실의 여자들에게 해줘도 피와 살이 될 것만 같은 자신감 있는 조언들이라, 내게도 많이 와 닿았던 이야기들이다. 특히 꾸미지 않고 나가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그 얘기는 나한테 하는 얘긴가, 잠시 찔렸다는 건 비밀. 더불어 일러스트나 사진마다 코멘트가 반드시 달리므로, 앞 뒤 페이지를 잘 살펴서 작은 글씨들도 전부 빠짐없이 읽기를 권한다.


결론적으로 <보그 온>은 '보그' VOGUE 라는 잡지가 주는 신뢰감 위에 패션 전문잡지로써 그 브랜드가 갖는 가치를 최대한 활용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살짝이라도 살펴보면 이 책은 생각보다 꽤 전문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일러스트들로 디자이너의 옷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여러 참고 문헌들을 참고해 그녀의 전 생애에 걸쳐 여러가지 일화들을 소개하고, 그녀의 디자인에 관한 여러가지 일러스트와 사진들을 한 데 모아 놓았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패션을 잘 모르는 사람도 책을 들춰보면 살펴볼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패션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영감을 줄 책 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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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포핀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22
패멀라 린던 트래버스 지음, 정윤희 옮김, 천은실 그림 / 인디고(글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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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담 서포터즈를 하면서 2번째로 맞이하는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이자, 내게는 익숙한 듯 낯설기만 한 내용인 <메리 포핀스>. 어렴풋하게 읽은 기억은 나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상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 책이었다. 굉장히 익숙한 제목이고 유모가 주인공이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다음이 영..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익숙한데 왜이렇게 낯설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메리 포핀스>를 읽기 전까지는 내가 가지고 있던 막연한 메리 포핀스의 이미지를 <내니 맥피>라는 영화와 비슷하겠거니- 상상했었다. 책의 첫 부분만 읽어봐도 유모가 주인공이고, 마법을 쓰고, 아이가 많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됐다. <메리 포핀스>와 <내니 맥피>는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많이 달랐다. 그러기에 유모가 집을 떠나는 것은 비슷했지만 결론은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한 손에는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꺼낼 수 있는 커다란 카펫으로 만들어진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앵무새 손잡이가 달린 검은 우산을 들고 다니면서 모자까지 갖춰쓰기를 좋아하는 사람. 동풍을 타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그녀는 제인과 마이클, 쌍둥이인 존과 바버라까지 4남매가 살고 있는 '벚나무길 17번지'에서 유모생활을 시작한다. 아이들에게는 꽤 엄한 듯 새침하고 떽떽거리지만, 알고보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못이기는 척 들어주는 기질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는 거리를 두는 것 같으면서도 뒤에서 챙기는 것이 요즘 '츤데레'라 일컬어 지는 순정만화 속 남자 주인공 이미지와 많이 닮았다. 어떤 성격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이 장면이 아닐까 한다.


"조용히 좀 해."
메리 포핀스는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제인을 나무랐다. 그리고 새로 산 장갑을 벗어서 마이아의 손에 한 짝씩 끼워 주었다.
"이제 됐어! 오늘 날이 추워. 장갑이 잘 어울리네."
메리 포핀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292쪽)


막 부산스런 아이들을 조용히 시킨 후, 아이들이 해주고 싶었던 것을 대신 해 주는 모습. 자신의 것을 내어주면서도 아이들을 혼낼 때와 마찬가지로 무덤덤하다. 이런 소소한 것들에서 드러나는 메리 포핀스의 성격은 말 그대로 츤데레- 처음엔 '이 유모는 뭔데 애들한테 이렇게 차가워?'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벚나무길 17번지로 왔을 때부터,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냉담했던 그녀다. 아이들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했고, 자신의 일을 다 하지 못하고 꾸물거리는 것도 싫어했다. 일은 끝내주게 잘 한다고 묘사되어 있었으나, 유모가 아이들에게 냉담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하지만 처음의 의문점들은 그 이후 아이들을 대하는 한결같은 그녀의 행동들과 다른 일련의 행동들로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그녀는 '원래 그런 성격'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좋아하며, 아닌 척 마법을 통해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영화 <내니 맥피> 속 유모는 악동같은 아이들의 장난과 폭력적 행동 등을 자신이 가진 마법의 힘으로 '찍어 누른다'. 너희들이 힘으로 대든다면 나도 힘으로 내리 찍어주지- 같은 느낌이 물씬 든다고나 할까. 질서와 룰을 만들고 그것을 체득시키게 하기 위해 마법을 쓰는 모습은 마치 사랑의 매를 드는 여느 집과 진배없었다. 물론 그 과정들이 무섭게 그려지기는 커녕 꽤 즐겁게 그려졌고, 나중에 아이들은 내니의 그런 점을 사랑이라 여기고 따르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내니 맥피> 속 유모는 아이들과의 대립을 자신의 힘으로 눌렀다.


그 반면, <메리 포핀스>의 유모 메리는 아이들에게 차가울지언정 아이들에게 어떤 힘을 가하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가진 마법의 힘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뿐이다. 하지만 그냥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곳들이 사실은 '그냥' 데려간 곳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야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메리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을 직접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되고, 그렇게 하나씩을 더 배워가는 것이었다.


"세상에, 붉은 소야!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마. 하늘에서는 매일 밤 수억 만 개의 별이 떨어진단다. 하지만 매번 별이 떨어지는 장소는 매번 달라지거든. 평생 같은 장소에 별이 두 번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럼, 다른 곳에 가면 그 별을 만날 수 있을까요?"
"나 같으면, 별을 찾기 위해서 열심히 돌아다녀 볼 거야." (125쪽)

메리 포핀스의 엄마가 붉은 소를 만났던 이야기를 해 주면서 아이들에게 '별을 찾으라'는 그러니까 꿈을 찾으라는 이야기를 에둘러서 해 주기도 하고,


"잡아먹든 잡아먹히든 결국에는 똑같은 거란다. 나이를 먹고 지혜가 쌓이고 나서야 깨닫게 되더구나. 우리는 같은 뿌리를 타고 났다는 걸 말야. 동물은 정글이라는 뿌리를, 너희는 도시라는 뿌리를 타고났다고만 여기겠지만 모든 생명체의 근원은 똑같단다. 머리 위로 자란 나무, 발 밑에 있는 돌멩이, 새, 짐승, 별... 모두 똑같은 곳으로 가고 있어. 만약 나를 잊게 되더라도 이 사실만은 기억해 두렴." (269쪽)

아이들에게 자연과 인간들 모두 같은 생명체로 같이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도 에둘러 알려준다.


메리 포핀스는 아이들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위험하지 않은 곳으로 아이들을 끌어들여 그 아이들이 자신들이 직접 보고 느끼면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차갑게 구는 것은 아이들이 시끄럽게 굴거나 부산하게 굴거나 귀찮게 굴 때 뿐이다. 언제나 '귀찮다'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면서 챙기는 것 또한 메리가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한 뼘 자라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 장을 닫을 때쯤 아이들은 한 뼘 자라 있었다.


<메리 포핀스> 속 엄마, 아빠의 역할은 미미하다. 늘 정신없이 바쁘기만 한 아빠와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며 보여지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에게서 아이들은 모정, 부정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자고로 아이들에게는 부모님이 필요한데 말이다. 그런 그 아이들에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비워진 곳, 채워져야 하는 곳들을 충실히 채워준 채 메리 포핀스는 떠났다. 오 르부아르,라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말이다. 책 속에 정확한 시간적 흐름이 나오지는 않는다. 네 명의 아이들, 특히 제인과 마이클 남매와 유모 메리가 같이 지낸 시간은 독자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다만 동풍이 불어 벚나무길 17번지에 도착한 메리는 서풍으로 바람이 바뀌자마자 떠났다는 것만이 시간의 흐름의 전부다.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가 얼만큼의 시간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이들이 '메리는 자신이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을 줄 만큼의 시간은 같이 있었던 게 아닐까 추측할 뿐. 프랑스어로 된 작별인사가 '또 만나자'라는 것을 알고 안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아이들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메리 포핀스라는 유모는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의 그 어느 날 만나게 된다면 아주 반갑게 인사할지도 모르겠다.


서풍을 타고 날아간 그녀는 또 어느 집에서 유모를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새와 바람과 강아지와 대화하고, 그림에 들어가 식사를 할 수 있으며, 마음대로 공중에 뜰 수 있는 그녀가 있는 그 집의 아이들은, 적어도 꿈을 꾸는 법을 알게 되고 살아감에 있어 좋은 이야기들을 듣는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겠다. 아이들에게 메리 포핀스는 좋은 유모이며, 좋은 친구이고, 좋은 스승이다. 이렇게 매력적인 츤데레 유모가 세상 천지 또 어디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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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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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와 관련된 책을 보고 있자니, 내가 손편지를 써 본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가늠해 보게 된다. 요즘에는 손편지의 자리를 이메일이 자리하고 있지만, 손편지와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쯤 아마 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손글씨가 보기 어려워진 만큼 손편지 또한 보기 어려워졌다. 예전엔 옆에 앉은 짝꿍과 함께 쪽지를 주고 받기도 하고 편지를 주고 받기도 한 것 같은데, 이제는 손편지를 주고 받을 사람도, 기회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카드에 적힌 '생일 축하한다'는 짧은 문장에도 감동 받게 되는 요즘에 이렇게나 서로를 위하는 편지를 보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끼리 주고 받은 편지에 이렇게나 마음이 따스해 질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이 책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는 이오덕, 권정생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들을 모아서 낸 책이다. 1973년부터 2002년까지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들 가운데서 뽑아 만들었다. 책은 3가지의 시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파트 나눔에 대해서는 '왜' 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게 약간의 함정이라면 함정. 이오덕은 권정생이 쓴 동화를 참 좋아한 듯 싶다. 그가 많이 아픈 채인 것을 알고 있고, 그의 생활이 많이 곤궁한 것을 알고 있어 이오덕은 그런 권정생을 어떻게든 돕고 싶어한다. 73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많이 와 닿지는 않으나, 돈을 보내는 것도 '인편'으로 보내야 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렇게나 서로를 챙기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선생님의 건강을 항시 염려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건필을 빌고 있습니다. (31쪽 / 권정생  이오덕)

부디 몸 조심하시고 글 너무 쓰지 마시고 쉬시도록 바랍니다. 선생님은 좀 더 오래 사셔야 합니다. (58쪽 / 이오덕 → 권정생)

 

 

하지만 이들이 서로만을 알뜰히 챙기는 것은 아니다. 현재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과 자꾸 통속화 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동화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신진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역시나 같은 생각 (아동문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말이 잘 통했는지도 모르겠다.

 

대가들도 그렇지만 신인들의 창작 자세가 거의 타락 상태에 있는 것 같아요. 이준연, 권용철, 장욱순 제씨들의 작품은 시발점에서는 좋았는데, 요즘 와서 거의 통속화되어 버렸어요. 언젠가는 이분들이 부딪힌 벽을 뚫고 자기들의 바른길을 걸어갈 날이 있으리라 봅니다. (40쪽)

 

동화란 것을 심심풀이 오락물로 읽는 백만 명의 독자보다 단 백 명의 가난한, 그러나 슬기로운 어린이들과 진실한 삶을 찾는 젊은이들이 읽어 주는 것이 더욱 기쁘고 보람 있는 것이지요. (58쪽)

 

일본 동요곡을 어엿이 표절해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문학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 이름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본 이름으로 등장되었다 해서 어려워한다니, 조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72쪽)

 

요즘 저는 아동문학에서 아주 철저하고 과감한 태도로 평을 쓰고 논리를 세워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선배, 동배, 후진 할 것 없이 친소를 막론하고 쓰고 싶은 것을 써야겠습니다. 그래야만 안일 무사주의와 문단 출세주의로 흐리멍덩하게 되어 있는 우리 아동문학을 일깨워 전진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중략) 진실을 위한 싸움에서는 아동문학 작가들보다 일반 문단의 작가, 시인, 평론가들이 더 많이 성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84쪽)

 

시골 어린이들 중에 동화책 한 권 못 읽는 것이 90퍼센트도 넘을 것 같아요. 대체 누구를 위해 아동문학을 하고 있는지, 목적 없는 뜀박질을 하고 있는 우리가 아닌지요. (113쪽) 

 

 

하지만 역시나 편지의 대부분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만날 장소를 잡고, 어긋난 만남을 아쉬워하고, 그러면서도 다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끊임없이 건강은 괜찮은지 묻고, 거기에 끊임없이 답을 한다. 답장이 늦어서 미안하다고,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해서 미안하다고. 만나는 날보다 편지를 주고 받은 날이 더 많은 것 같은데, 그 속에서 서로 지내고 있는 소소한 일상들을 나누며 '잘 지내고 있구나' 확인을 받는다. 그러면서 서로 안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편지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여실히 드러난다. 감성이 짙어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때 쓴 편지에 대한 오해를 풀기도 하는 부분에서인데, 왜 새벽에 편지를 쓰고 아침에 읽어보면 이불킥을 하고 싶을만큼 화끈거린다고 하지 않나. 그런 것들이 여실히 드러나 있기도 해 꽤 흥미로웠다.

 

 

어찌보면 단조로운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쁘게 보내야 했던 편지는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이 가득하기도 했고, 어떤 편지는 하고 싶은 말을 굉장히도 많이 적어 두었으나 두서가 없기도 했으며, 간단하게 안부만 물어왔던 편지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중요성은 그런 것이 아닌 듯 하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어떤 존재가 있음으로서 살아갈 힘을 얻는, 더군다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데다, 마음이 잘 맞아 밤새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 받는 일을 우리에게 굳이 보여주는 것은- 이 책 속에 여실히 담겨 있는 그 마음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이야 전화를 하거나 화상통화를 하면 서로의 상태를 금방 알 수 있고, 또한 길도 많이 편해지고 차가 다니지 않는 곳이 없는데다, 서로 만나기로 하면 금방 핸드폰을 통해 연락이 가능하지 않나. 하지만 그런 것이 가능하지 않았던 시대에서만 볼 수 있던 '혹시나 오셨을까 해서 정류장에 나가 기다렸습니다' 라든가, '몸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계신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라는 이야기들은 퍽 생경했다. 그리고 낯설지만 따뜻함을 느꼈다.

 

 

만나기로 약속했다가도 '아직 나오지 않았으면 오늘 보지 말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에서 불편한 와중에도 끊임없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보면서, 현실에서의 내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를 둘러보게 된다. 역시 생각이란 것이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모양입니다. (99쪽) 라는 권정생의 말처럼, 생각이 잘 맞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과연 내 주변에 몇이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관심과 배려, 그리고 위로를 건네는 편지를 꺼내 읽기만 해도 즐거웠을 것만 같은 이 둘의 이야기.

 

보는 내내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을 담은 몇 장을 제외하곤 따뜻한 책이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한 세상 살다 가면서 이런 사람 하나쯤 만들어 놓는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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