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귓속말 - 마음을 두드리는 감성 언어
김기연 지음 / 어바웃어북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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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가 쓴 책들을 좋아한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번뜩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쓰는 글이라,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정철이라는 작가를 통해 알게 된 '카피라이터'들의 책, 그리고 여전히 읽기만 하면 내 마음을 두드리는 그네들의 책. 사실 혹자는 특별할 것이 없다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혹자는 누구나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누구나가 다 아는 것'을 '같지 않게' 설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카피라이터들이 하는 일이고 그들의 힘이라 생각한다. 남들과 다른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들과 같은 것 또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와는 꽤 상성이 좋은 책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작가의 이력 중에 '카피라이터'가 있다면 그냥 스쳐 지나갔다가도 다시 한 번 들춰 보는 편이고, 그렇게 해서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꽤 즐겁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단어의 귓속말>이라는 감성적인 책 제목도 내 마음에 들었지만, 카피라이터라는 작가의 이력에도 혹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미 제목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단어가 작가에게만 들려준 자신의 새로운 면의 모습'이라는 주제일 것 같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그렇다면 책에서 중요하게 볼 것은 단 한 가지다. 이 책에 속해 있는 단어들은 과연 남들이 모르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냈는가에 대한 것.


하지만 나는 '작가의 말'에서 이미 넉다운 당했다. 단어에게도 등이 있다는 작가의 말 첫 줄에서부터 말이다. 

단어에게도 등이 있다. 뒷모습을 보기 전에는 결코 볼 수 없는 단어의 '아우라' 말이다. 그는 보통 인간이 만들어낸 문장으로 꼴을 갖추지만 그로써 환희에 차거나 찬란하지는 않다. 뭐랄까 아직 햇살을 받지 못한 그늘 속 꽃이랄까. (중략) 사전에 포획된 단어의 뜻풀이는 진부한 연애처럼 시큰둥하다. 아름답지만 멍한 표정이다. 긴 세월 갇혀서 멍청이가 되기라도 한 것 같다. (중략) 달뜬 그가 내게 속삭이듯 귓속말을 내뱉는다. 목소리는 비밀을 토로하듯 거침없지만 조심스럽고 가녀리다. 그 순간이 되면 단어가 내 곁을 배회하는 것인지, 내가 단어를 기웃거리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_작가의 말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단어를 의인화했다. 그리고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단어를 애무한다 했다. '누워서 일어설 줄 모르는 단어를 입에 넣고 느낄 때'라든가 '몸을 포갠 채 혀로 등을 애무하면'이라든가의 표현들은(작가의 말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의인화된 단어를 애무하는 표현들이었고, 작가는 결국 자신이 괴롭혀 황홀한 귓속말을 들었노라 이야기했다. 단어를 여러번 곱씹어보며 입속에서 혀로 단어를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애무한다라고 표현하는 작가의 발상- 내가 '작가의 말'만 보고 작가에게 넉다운 당했다고 이야기 한 이유다. 그리고 역시나, 본문 속에서도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들이 차고 넘쳤다.


일단 차례에서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찾았다. 눈물, 친구, 눈, 책, 비밀, 거짓말, 꿈, 우산, 여행, 사진, 시간, 바다, 운명, 잠, 삶, 비, 바람, 인연, 중독, 그리고 음악. 보편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기에 일단은 끌리는대로 읽었다. 눈물은 첫 번째 단어이기 때문에 읽었고, 그 다음부터는 한 페이지 가득 작가가 쓴 캘리그라피 단어를 보고 마음에 드는 단어들의 귓속말부터 전해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 하나 빠짐없이 읽었다. 한 번 봤던 이야기들은 익숙하니까 더 자세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고, 처음 보는 단어들의 이야기들은 낯설면서도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기도 했다.


눈물 ; 어떤 날에는 흐르는 눈물을 방치해도 괜찮다. 당신을 소독하는 중이니까. (13쪽)

책 ; 채집된 텍스트. 포획된 것이라 해서 추억이 없는 가공식품이 아니다. 미동은 없지만 가장 활발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채집된 글자와 낱말과 문단 사이에서 돋아난 날개가 낯선 너머의 세계로 인도한다. (43쪽)

사랑 ; 변하고, 스러지고 바래서 슬픈 것이 아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 (63쪽)

밥 ; 세상 모든 욕망의 기초 단위. 먹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고 삼켜야 한다는 명분 앞에서 밥은 삶 자체가 된다. (110쪽)

사진 ; 사진기로 채집한 시간의 비늘. 순간의 장면이 아니라 기억의 덩어리를 압축하듯 포장하는 것이다. (121쪽)

추억 ; 기억에의 그리움이다. 애틋한 되새김이자 이룰 수 없었던, 혹은 다가서지 못한 아쉬움이다. (169쪽)

바람 ; 그곳에서 태어난 바람이 지금, 당신 곁을 지나간다. 녀석은 때로 사람 안에서도 분다. 그리움에서 간절함으로 불어가고, 긴장에서 떨림으로 휘몰아가는 깊은 감정의 골짜기에도 분다. (193쪽)

혁명 ; 내 안에 오래도록 자리 잡아온 냉소와 무관심, 습관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하는 것에서 혁명은 마침내 의지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263쪽)


작가의 말에서 '인간이 단어에게 걸쳐놓은 인위적인 옷을 벗기고 싶었다'고 이야기한 작가. 작가는 단어들에게 전해들은 귓속말로 한층 더 가깝게 단어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그토록 자신이 원했던 단어의 그 이면의 민낯을 볼 수 있었을까. 내가 보기엔 아직은 단어가 제 온 몸을 보여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아마도 당신에게 그 단어가 귓속말을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자신만의 시선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들어질 또 다른 민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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