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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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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체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이 입을 모아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 아름답다는 유럽의 프라하라는 곳에도 관심조차 없었다. 어쩐일인지 나는 정말 체코라는 나라에 도통 흥미가 일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그 나라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서도 거의 몰랐고(물론 세계사에 얽힌 것만 빼면), 그 나라의 문학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러니 내가 그 유명하다는 SF작가이자 로봇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카렐 차페크라는 작가를 모를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시작할 때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복잡하게 뒤엉킨 상태였다.   

도롱뇽과의 전쟁이라는 책의 제목과 이 책이 속한 SF장르에 대한 일종의 편견으로 인하여, 나는 이 책이 삼지창을 든 괴물 도롱뇽들과 인간들의 생존전쟁이라고 지제짐작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고도 나름 기발한 상상이였지만, 대략적으로 살펴본 이 책의 줄거리는 내 머릿속에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 편집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간중간 껴 있는 색상의 페이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왠지 투박해 보이는 책의 편집상태도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곧 책의 내용에 쏙 빠져들게 되면서 이 책의 이런 센스있는 편집에 감탄을 하고 말았다. 모든건 이 책의 의도를 담고자 고군분투한 편집부의 노력이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다음부터는 부디 빨간색 종이는 피해주길 바란다. 색상으로 말미암아 눈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은 1930년대로 세계가 전쟁으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뱉던 시기였다. 지금으로부터 너무나 오래전의 빛바랜 시절에 쓰여진 이야기. 그 당시 사람들이 과연 미래 자신들의 자손에 삶을 어느정도의 수준으로 상상했을까? 가만히 앉아서 전세계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소식이 채 하루가 되기도 전에 지구 전체로 그 소식이 전해지는 이 미래의 삶을 당시 사람들이 내다볼 수 있었을까? 아마 단 한가지는 예상했던 것 같다. 수십년이 흘러 우리가 엄청나게 진보된 삶을 누리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들과 싸우고 있으리라는 것을. 마치 거울을 보며 소리를 질러대고 악을 쓰는 한마리 원숭이처럼 말이다.  

어린시절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얽힌 소식들을 접하면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내눈에 비친 그들의 생활은 우리의 생활에 비해 몹시 남루하고 곤궁해보였다. 매일매일을 싸움터에서 보내고 그 전쟁에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붓고 있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모두 비참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어째서 싸움을 멈추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싸움을 멈추고 각자 자신들의 논밭을 가꾸고 평탄한 삶으로 돌아가는게 서로에게 더 이득이지 않는가? 어째서 그들은 그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자기 자신들을 갉아먹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제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 그 멈추지 않는 싸움이 그 당사자들이외의 사람들에게 많은 이득이 되며, 그 이득들 덕분에 그들이 멈추고 싶어도 스스로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마치 이 책에 쓰여진 도롱뇽과 인간의 싸움이 사실은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였다는 사실을, 내가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나도 그런 사람들 속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씁쓸한 여운을 더 진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을 읽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가 카렐 차페크에 대한 감탄을 멈출수가 없을 것이다. 한사람의 머릿속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회문제들과 그 문제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수십가지의 의견들을 내놓을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였다. 게다가 이런 다양한 시각들을 하나의 이야기에 빈틈없이 매워놓은 그의 빼어난 글솜씨와 그 뛰어난 통찰력에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입모아 칭찬하고 이번 책의 번역에 많은 사람들이 반가움을 표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이 체코어가 아니라 영어로 번역된 것을 재번역한 것이라는 점이였다. 하지만 나조차도 체코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바라컨데 부디 머지않은 미래에 이 책을 체코어 번역본으로 만나보고 싶다. 그때는 또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때는 1930년대와 조금도 바뀌지 않은 우리네의 모습이 아주 약간은 바뀌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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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랩소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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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는 오묘한 식물이다. 과일처럼 먹지만 알고보면 채소로 정의되는 속성을 지녔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내가 토마토를 섭취하는 방법은 달라지지 않았다. 난 여전히 토마토를 설탕에 살짝 절여 먹는다. 이렇게 먹으면 영양소가 파괴된다고 만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내게는 가장 맛있는 토마토 요리법이다. 특히 그 설탕에 절인 토마토를 다 먹고 나면 생기는 토마토의 즙과 설탕이 섞여 생긴 쥬스는 정말 최고의 맛을 자아낸다. 사실은 이 마지막으로 먹는 쥬스가 먹고싶어서 토마토를 이렇게 먹는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먹는 방법외에 토마토가 딱히 맛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토마토란 채소에 대해 엄청난 호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토마토를 제목으로 내세우며 그 이미지까지 표지에 거침없이 박아넣은 이 책을 보는 순간 이 책에 시선이 끌렸다. 한겨울에 들어서는 길목에 서 있는 나에게 한여름의 햇살같은 향기를 이 책이 뿜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상큼하고 싱그러운 향기와 느낌에 이끌려 나는 마법처럼 이 책으로 빠져들었다.  

이 책의 작가 얘덤 셜은 특이한 이력의 작가이다. 시나리오 작가와 CF 감독으로 일하다가 유럽을 여행한 후, 뉴욕에서 프랑스 요리학교를 다닌 후 주방장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요가를 가르치며 소설을 쓰고 있댄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두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안정된 직장을 얻고 적당한 커리어를 쌓으며 아주 평범하고 나른하게 살아갈텐데, 이런면에서 보면 그는 참으로 남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그의 인생이 참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도는 고맙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활기차고 유쾌한 그의 인생에서 우러난 경험 덕분에 그의 인생의 맛깔나는 소스들을 이처럼 멋진 이야기들로써 만나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 책에 붙은 광고문구는 참으로 화려하다. 마르케스를 만나 흠뻑 취한 셰익스피어 같은, 맛있는 소설! 외에 어쩌구 저쩌구 등등. 그래서 처음에 이 책에 반해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도 아주 약간의 의심에 눈길을 이 책에서 거둘 수 없었다. 이렇게 유명작가들과 대놓고 비교하며 요란하며 현란한 문구로 광고하는 책들치고 제대로 된 책을 만나는 일이 드문 일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문구들은 오히려 아름다운 여인의 외모를 조잡하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악세사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책은 마르케스나 셰익스피어 같은 위대한 작가들과 비교하며 그들의 후광을 이용해 자신을 빛내려하는 속빈 강정같이 허영심으로 가득차 있지 않았다. 이 책은 그저 이 책에 담긴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멋지고 즐겁고 유쾌한 이야기로 자기 스스로를 빛내고 있을 뿐이였다. 

착하고 순박한 토마토 청년 다비도와 당차고 아름다운 올리브 아가씨 마리의 사랑이야기와 거기에 한데 얽힌 마을 사람들의 맛깔나는 이야기들은 한겨울 이불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나에게도 달콤하고 향기로운 이탈이아에 밝은 햇볕아래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만들어 주었다. 사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산 사람이 직접 만든 스파게티를 먹어 본 기억이 있다. 맛이 어땠냐고? 그 지인의 요리솜씨는 정말 뛰어나서 모두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수준이였다는 것을 우선 전제하겠다. 비록 나에겐 조금 맞지 않았지만. 하지만 이 책은 이런 나의 입맛이나 다른 이들의 입맛에도 이 책은 모두 다 쏙 들어 맞을 것 같다. 사랑이 모두의 가슴을 달콤하게 적시고, 토마토가 모두에게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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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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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솔직히 조금 걱정을 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는, 내 머릿속에 내재된 프랑스 문학에 대한 선입견들 때문이였다. 프랑스문학은 철학적 사유를 기본으로 하므로 어렵고 지루해. 그러니까 읽기 어려워. 이게 내 머릿속의 전반적인 프랑스 문학에 대한 대부분의 생각들이였다. 머릿속의 프랑스문학에 대한 부분들이 저런 꽁깍지들에 쌓인채 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제는 저 꽁깍지들을 다 벗겨낸뒤, 가볍고 상쾌한 기분으로 프랑스 문학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내 야심차며 똥꼬발랄한 생각은 이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급브레이크를 밟고 말았다. 책의 서문이 나에겐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서문이란 보통 작가가 독자들에게 앞으로 읽게 될 자신의 책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싣는 것인데, 그 내용이 이렇게 이해하기 힘들다니, 이 책의 내용이 나에겐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이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칼을 빼들었으면 무라도 잘게 채를 쳐서 그 즙이라도 쪽쪽 빨아먹어야 하는 법. 마음을 굳게 먹고 이 책을 완독하리라 다짐하며 주먹을 꼭 쥐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라라? 이 책, 꽤 재밌는 것이 아닌가?! 

육식이야기는 총 14개의 단편이 담긴 책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서문까지 하나를 더해 총 15개라고 말하고 싶다. 바로 내가 어렵다고 움찔한 그 서문 말이다. 처음 서문을 읽을 때는 철썩같이 작가의 말이자 주제라고 생각했으나, 서문의 끄트머리에 써 있는 사람의 이름을 읽게되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서문을 쓴 사람의 이름이 작가 베르나르 키리니의 이름이 아니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글은 단지 이 책의 서문이자 누군자의 추천글이라고만 순진하게 생각했는데, 본문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읽어나가게 되면서 그 서문이 저자가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이 책의 전반적인 이야기에 대한 포석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어렵고 까다로운 내용을 비비꼬아 놓으며 번역문이라는 변명을 달아 독자들에게 일종이 "뻥"을 쳐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게 되는 사람들이 부디 그 뻥에 속아 이 책을 덮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서문이라는 무거운 대문만 꾹 참고 열어서, 일단 본문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이 책의 유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버릴 될테니까.  

이 책의 작가 베르나르는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지나치는 소재들에 주목하고, 그 소재들로 독특하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여러가지 형식을 빌어서 표현한다. 덕분에 이 책에는 평범한 단편들 외에 콩트 형식의 에피소드 모음들과 편지글, 일기, 회고록, 희곡 같은 다양한 묘사방식이 존재하며, 이런 자유롭고 다양한 형식들이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줬다. 또한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묘했다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이 책은 물론 재미있고 유쾌하지만 그 즐거움이 밝은 햇살 아래 행복감의 느낌이 아니라,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어 살짝은 으스스해진 미스테리한 느낌이 강하게 풍겨나왔다. 이런 느낌들은 환상문학과 단편이라는 특성상 자칫 가벼워질수도 있는 이 책의 이야기들에 무게감을 실어 주는 역활을 효과적으로 수행해줬는데 나는 이런 특유의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과 발상에 감탄하며, 이 책을 시작할 때 했던 걱정일랑 저 멀리 집어던지고 이 책에 푹 빠져들었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이 단편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육식이야기였다. 제목과 표지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듯이 육식성 식물인 파리지옥이 주 소재로 등장한다. 한 나이 지긋한 괴짜 식물학자가 이 육식성 식물에 매료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첫 시작에서부터 이미 이 학자가 죽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에서 이 이야기의 전개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이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처럼 이 짐작 가능한 이야기의 전개를 베르나르 키리니는 참 맛깔나고 독특하게 짜나갔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러서는 내 예상을 벗어난 결말을 보여줬는데, 그것을 읽는 순간 왜 이 작품이 표제작이며 이 책의 제일 끝부분에 위치하게 됐는지 알게 됐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단 하나의 주제가 이 한편의 이야기에 모두 압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베르나르 키리니가 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 아니였을까. 문득 이 책의 서문과 본문 사이에 끼여 있던 글 한자락이 생각났다.  

"이 놀라운 일들이 현실이라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것들이 상상의 것이라면 난 이미 미쳐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문구를 읽고 서문이 뻥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결국 이 책은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었고, 난 이런 사실을 교묘하게 숨겨놓은 작가가 치는 뻥에 계속 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뻥에 당하기 위해 기꺼이 이 책을 읽은 것은 나였고, 그 즐거움에 한껏 취할 수 있었으니 만족한다. 때로는 이렇게 독특하며 새로운 스타일의 책에 빠져드는 것도 독서의 한 재미니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베르나르 키리니는 간만에 만난 독특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였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을  특유의 관찰력으로 찾아낸 소재들을 글로 옮길 수 있는 필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 하나만으로는 작가 소개문구처럼 이 작가가 마르셀 에메와 에드거 앨런 포, 그리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비견될만한 재목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책 한권만으로 그를 단정짓기엔 그에 대한 단서가 부족했다. 다만 이제 그는 갓 시작하는 풋풋한 새내기 작가이므로 그 싹이 어떤 나무로 자라날지 지켜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과연 다음에 만날 그의 이야기는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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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다
그리젤리디스 레알 지음, 김효나 옮김 / 새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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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이 짧지만 강렬한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사회 주류층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혁명적 창녀라고 일컫어지는 한 창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설명이 책 표지와 소개글에 짧게 붙어 있었다. 창녀처럼 사회의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과 검은색이라니! 난 이런 제목을 붙인 이 책의 작가 그리젤리디스의 센스에 감탄하고 말았다. 어쩜 이렇게 꼭 맞아 떨어지는 제목을 만들어냈을까! 그런데 알고보니 이 멋진 제목은 아주 오래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이랜다. 이 제목을 붙인 것도 자신이 아니라 출판사라며 깔깔거리며 솔직하게 인터뷰했다는 부분에서는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그녀의 성격 한부분이 책의 본문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윽고 본문으로 들어가자 이런 그녀의 솔직하고 담담한 성격이 책에 씌여진 글자 한자한자에서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홍보와는 조금 다르게 그녀 자신의 자서전이였다.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격렬한 변화를 가져왔던 매춘이라는 일에 뛰어들게 된 시점으로부터 전후 2년간의 일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기승전결의 극적인 이야기 진행보다는 시간의 순서에 따른 순차적인 진행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직업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인생은 거의 전체가 자극적이며 거칠고 숨가쁜 이야기들 투성이 일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삶을 담은 이 책은 오히려 일반 소설들 보다도 자극적인 이야기들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 독자들이 이제 이 부분에선 좀더 격렬한 갈등이 나오겠지라고 짐작하게 되는 부분들에서는 오히려 간결하고 담담한 문체로 유들있게 생략하며 넘겨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이 그녀의 험난한 인생을 그대로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면, 괜시리 불편해지는 마음에 이렇게 끝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읽어 넘어가지 못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내내, 그렇게 거친 이야기를 씹어야 한다면 아마도 내 눈과 머릿속은 너덜너덜 해졌을테니까. 

그러나 이런 그녀의 담담함과 달리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 얼굴에서 피어난 웃음은 본문으로 들어가면서 사라져버렸다. 책의 번역이나 편집이 엉망이라서가 아니라(오히려 번역은 꽤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직업과 그것에 얽힌 이야기들은 내가 호감을 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였다. 처음에 그녀가 창녀가 된 계기가 된 것은 빌이라는 한 남자 때문이였다. 그녀는 그 남자 때문에 그나마 궁핍하지만 최소한 몸 누일 곳은 있던 삶을 던져버리고 무모하게도 생면부지의 나라, 독일로 떠나게 된다. 당시 그녀의 태도는 어떻게보면 낭만적이고 사랑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에 그녀가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라는 입장을 살짝 보태면, 내 입장에서 그녀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무계획적이며 한심한 사람의 이야기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끝까지 읽는 내내 이 사실에 대해서 화가 났다. 결국 그녀의 눈에서도 사랑이라는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빌이 멍청하며 폭력적이고 후안무치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버스는 이미 떠나버린 후 였다. 이미 그녀는 그날의 숙소와 배고픔을 걱정해야 하는 거리의 창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못돼먹은 빌이랑 헤어지고도 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한심하고 멍청한 남자들을 전전한다. 마치 폭력남편에게 매맞는 아내가 결코 폭력남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는 빌과 비슷한 남자들과 연인이 되는 것을 반복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런 폭행을 행사하는 것이 사랑에 표현이라는 말까지 한다. 오 마이 갓! 그렇다면 그녀를 창녀로 내몰은 악몽같았던 빌은 너무나 사랑이 넘치는 남자였던건가? 그래서 그의 사랑에 온몸이 부러져 죽기 전에 그를 겨우겨우 쫒아낸 것인가? 아무리 그녀가 1930년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그녀의 의견은 시대를 초월하여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엔 창녀들의 권리를 주장한 그녀를 시대를 앞선 패미니스트 중에 한명이라고 봤지만 이 책을 완독한 후에는 이런 내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그녀의 사망후, 그녀의 무덤을 왕실묘지로 이장하는 것을 패미니스트 단체에서도 반대한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패미니스트가 아니라 그냥 매춘이라는 노동조합의 조합장일 뿐이였으니까. 그녀가 만약 패미니스트였다면 남자 때문에 자식들을 불안한 삶으로 내몰지도 않았을 것이고, 외딴 타국에서 창녀가 되지도, 또 그런 한심한 남자들 사이에서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지도 않았을 터이니.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이 책에서 기대한 것은 매춘에 종사한 사람이 말하는 매춘이라는 일과 그 일을 업으로 삼은 여성들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였다.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어찌보면 급진적인 패미니스트의 한 모습을 그리젤리디스 레알에게서 발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와 이 책은 그렇지 못했다. 최소한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된 그녀의 모습은 이런 내 기대와 많이 달랐기에 실망스러웠다. 책을 잡고 있는 내내 이 책의 어느 부분에 가서야 내가 기대한 내용들이 나올까 두근거리며 기다렸지만 결코 그런부분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부분은 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사회비판은 그녀의 직업적 입장에 편향되어 있었고, 또 일반적이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을 조롱하는 내용이였기에 상당히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할 수 없었고, 이런 그녀의 태도에 마음까지 답답해졌다. 결국 내가 이 책을 통해 만난 사람은 혁명적 창녀가 아니라, 그냥 남자에 홀딱 빠져서 대책없는 삶을 살았던 한 여인이자, 4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참으로 어리석고 무책임한 어머니일 뿐이였다. 

이 책을 다 읽고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기사와 사진을 찾아보았다. 내가 찾아낸 사진속의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그 미소는 생생한 장미처럼 신선했고, 그녀의 미모는 나이가 들었지만 아름답고 활기찼다. 이 글에서 내내 느껴지는 것처럼 삶에 찌들어 고통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였을까? 아니면 그녀가 사랑한 연인들의 사랑 덕분이였을까. 아니, 그 두가지를 모두 포함한 덕분이리라. 낙천적인 성격과 달콤한 사랑들로 인해 그녀의 삶은 찌들어갔지만, 그 미소만은 해맑게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그 미소와 함께 그녀의 바램대로 예술가로써의 삶을 계속 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랬다면 그녀는 더 행복했을까? 이제 그녀의 육신은 검정색 땅속 저 밑에 있다. 아마도 그곳에선 그녀도 그렇게 사랑하던 연인들처럼 검어졌을테지. 그녀가 그토록 원하고 탐했던 것 같은 그들의 검은 피부색처럼. 부디 그녀의 삶이 그 영원의 세계에선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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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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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란 말과 같이, 사랑스럽고 해맑던 어린아이의 얼굴이 세월이 흘러 쪼글쪼글한 말린 자두같이 변하는 것처럼 결국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사실 사람들은 영원하다라는 말이 영원할 것이라 믿지 않는다. 다만 마음 한켠에 숨은 불안함을 애써 잠재우며, 영원하리라 믿는 자신의 환상이 영원히 깨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 믿음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 받는 상처와 충격이 클 것임을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영원하리라 믿었던 다리가 무너버렸다. 영원히 일어나리라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기에,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들의 믿음이 깨진 현실과 그 믿음의 다리위에서 유명을 달리한 다섯사람들에 대한 상실감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큰 파문을 남긴다.  

모든 사건이 양면성을 지니듯이 주니퍼 수사에게 이 사건은 마냥 슬프기만 한 것으로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신의 의지를 구체적인 결과로 도출하여 어리석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하여 주니퍼 수사는 다리 위의 다섯사람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곧 이 다섯사람이 묘한 인연들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1700년대 식민지 영토에서의 백인들에 사회가 좁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런 인연이 꼭 우연이나 운명같은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주니퍼 수사에게만은 흥미로운 요소로 다가온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딸에게 집착한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과 고독으로 힘들어 하던 그녀의 하녀 페피타, 쌍둥이 형제를 잃고 방황하는 에스테반, 여배우 페리콜을 헌신적으로 부정으로 사랑한 피오아저씨, 그리고 페리콜의 어린아들 하이메까지 이들은 모두 어긋난 사랑으로 괴로워했고, 대중들에게 외면받고 조롱받던 사람들이라는 것까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들이 처한 현실은 너무나 비슷했다.   

사람은 죽어도 삶은 계속된다. 이것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다는 그 자체로 인해 삶이 계속되고,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기억과 감정들 속에서 죽은자들의 삶 역시 지속 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삶이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속에서 반복적으로 내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지속되는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서 함께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 다섯 사람은 죽음을 통해 삶를 시작하게 된 사람들이 아닐까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외면받던 자신들의 존재를 비로소 각인시키고, 부정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살아생전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까지 얻게 되었으니, 그들의 삶은 비로소 죽어서야 의미있는 것이 된 셈이다. 비록 그들을 기억에 담고 살아가야 하는 남은 사람들에겐 그들을 잃은 상실감과 가슴이 저릿한 고통이 찾아오지만, 그 또한 삶의 또다른 모습이므로 가슴이 저릿해질 사람조차 갖지 못하는 삶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한다면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 붙은 수식어는 굉장히 화려하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인 점은 이렇게 훌륭한 평가를 받는 책이 어째서 이제서야 번역이 되어 나왔냐하는 것이였다. 이런 궁금증은 이 책을 읽고나서 자연스레 풀렸다. 아무리 원작이 훌륭하다 한들 그것이 번역을 하게 되면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다랄까.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우리네 민족의 가슴을 절절하게 울리고, 입안에서 그 운율이 멋들어지게 맴돌지만, 그 시가 다른 언어로 번역이 되면 그저 빛바랜 그림같이 보이는 것처럼 이 책의 빛나는 수식어 역시 번역이라는 필터를 거치고 나니 밋밋함만 남아버린 느낌이였다. 번역도 썩 매끄럽지 못하고 오탈자도 많아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다. 또 고전으로 치기엔 고전만한 가슴의 울림과 필체의 진한맛도 없었고, 현대소설로 치기엔 너무 고풍스러웠다. 덕분에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꽤 재밌지만, 문학 그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이 책을 선택했다면 실망했을 것 같다. 이런 까닭으로 이 책은 90년대 초반에 한번 번역되고 절판된 후, 거의 20여년만에서야 재번역되어 나올 수 있었나보다. 

손턴 와일더는 아쉽게도 희곡을 주로 쓰는 작가였기에 그의 저서들은 대부분 번역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그의 글을 한글로 접할 일은 앞으로도 요원할 듯 싶다. 물론 번역이 되어도 영문학계에서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그의 수려한 문장솜씨를 원문 그대로 맛깔나게 즐기긴 힘들겠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섭섭한 일이다. 이런고로 이 책을 편한 마음으로 한번 정도는 읽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덤으로 삶에 대한 여러가지 사유도 얻을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이기도 하다. 한가지, 이 책의 편집에 세심함이 지나쳤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 책의 앞뒤에 달린 추천사와 부록이였다. 무려 두개나 달려 있는 과도한 추천사로 인해 이 책의 내용을 이미 읽기도 전에 스포일을 당해버렸고, 덕분에 마치 이 책에 대한 찬양일색의 감정까지 강요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때론 과도한 친절이 오히려 부담을 주는 법이라는 것을 출판사들이 알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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