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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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란 말과 같이, 사랑스럽고 해맑던 어린아이의 얼굴이 세월이 흘러 쪼글쪼글한 말린 자두같이 변하는 것처럼 결국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사실 사람들은 영원하다라는 말이 영원할 것이라 믿지 않는다. 다만 마음 한켠에 숨은 불안함을 애써 잠재우며, 영원하리라 믿는 자신의 환상이 영원히 깨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 믿음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 받는 상처와 충격이 클 것임을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영원하리라 믿었던 다리가 무너버렸다. 영원히 일어나리라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기에,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들의 믿음이 깨진 현실과 그 믿음의 다리위에서 유명을 달리한 다섯사람들에 대한 상실감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큰 파문을 남긴다.  

모든 사건이 양면성을 지니듯이 주니퍼 수사에게 이 사건은 마냥 슬프기만 한 것으로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신의 의지를 구체적인 결과로 도출하여 어리석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하여 주니퍼 수사는 다리 위의 다섯사람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곧 이 다섯사람이 묘한 인연들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1700년대 식민지 영토에서의 백인들에 사회가 좁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런 인연이 꼭 우연이나 운명같은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주니퍼 수사에게만은 흥미로운 요소로 다가온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딸에게 집착한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과 고독으로 힘들어 하던 그녀의 하녀 페피타, 쌍둥이 형제를 잃고 방황하는 에스테반, 여배우 페리콜을 헌신적으로 부정으로 사랑한 피오아저씨, 그리고 페리콜의 어린아들 하이메까지 이들은 모두 어긋난 사랑으로 괴로워했고, 대중들에게 외면받고 조롱받던 사람들이라는 것까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들이 처한 현실은 너무나 비슷했다.   

사람은 죽어도 삶은 계속된다. 이것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다는 그 자체로 인해 삶이 계속되고,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기억과 감정들 속에서 죽은자들의 삶 역시 지속 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삶이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속에서 반복적으로 내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지속되는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서 함께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 다섯 사람은 죽음을 통해 삶를 시작하게 된 사람들이 아닐까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외면받던 자신들의 존재를 비로소 각인시키고, 부정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살아생전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까지 얻게 되었으니, 그들의 삶은 비로소 죽어서야 의미있는 것이 된 셈이다. 비록 그들을 기억에 담고 살아가야 하는 남은 사람들에겐 그들을 잃은 상실감과 가슴이 저릿한 고통이 찾아오지만, 그 또한 삶의 또다른 모습이므로 가슴이 저릿해질 사람조차 갖지 못하는 삶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한다면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 붙은 수식어는 굉장히 화려하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인 점은 이렇게 훌륭한 평가를 받는 책이 어째서 이제서야 번역이 되어 나왔냐하는 것이였다. 이런 궁금증은 이 책을 읽고나서 자연스레 풀렸다. 아무리 원작이 훌륭하다 한들 그것이 번역을 하게 되면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다랄까.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우리네 민족의 가슴을 절절하게 울리고, 입안에서 그 운율이 멋들어지게 맴돌지만, 그 시가 다른 언어로 번역이 되면 그저 빛바랜 그림같이 보이는 것처럼 이 책의 빛나는 수식어 역시 번역이라는 필터를 거치고 나니 밋밋함만 남아버린 느낌이였다. 번역도 썩 매끄럽지 못하고 오탈자도 많아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다. 또 고전으로 치기엔 고전만한 가슴의 울림과 필체의 진한맛도 없었고, 현대소설로 치기엔 너무 고풍스러웠다. 덕분에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꽤 재밌지만, 문학 그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이 책을 선택했다면 실망했을 것 같다. 이런 까닭으로 이 책은 90년대 초반에 한번 번역되고 절판된 후, 거의 20여년만에서야 재번역되어 나올 수 있었나보다. 

손턴 와일더는 아쉽게도 희곡을 주로 쓰는 작가였기에 그의 저서들은 대부분 번역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그의 글을 한글로 접할 일은 앞으로도 요원할 듯 싶다. 물론 번역이 되어도 영문학계에서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그의 수려한 문장솜씨를 원문 그대로 맛깔나게 즐기긴 힘들겠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섭섭한 일이다. 이런고로 이 책을 편한 마음으로 한번 정도는 읽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덤으로 삶에 대한 여러가지 사유도 얻을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이기도 하다. 한가지, 이 책의 편집에 세심함이 지나쳤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 책의 앞뒤에 달린 추천사와 부록이였다. 무려 두개나 달려 있는 과도한 추천사로 인해 이 책의 내용을 이미 읽기도 전에 스포일을 당해버렸고, 덕분에 마치 이 책에 대한 찬양일색의 감정까지 강요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때론 과도한 친절이 오히려 부담을 주는 법이라는 것을 출판사들이 알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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