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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다
그리젤리디스 레알 지음, 김효나 옮김 / 새움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검정도 색깔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이 짧지만 강렬한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사회 주류층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혁명적 창녀라고 일컫어지는 한 창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설명이 책 표지와 소개글에 짧게 붙어 있었다. 창녀처럼 사회의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과 검은색이라니! 난 이런 제목을 붙인 이 책의 작가 그리젤리디스의 센스에 감탄하고 말았다. 어쩜 이렇게 꼭 맞아 떨어지는 제목을 만들어냈을까! 그런데 알고보니 이 멋진 제목은 아주 오래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이랜다. 이 제목을 붙인 것도 자신이 아니라 출판사라며 깔깔거리며 솔직하게 인터뷰했다는 부분에서는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그녀의 성격 한부분이 책의 본문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윽고 본문으로 들어가자 이런 그녀의 솔직하고 담담한 성격이 책에 씌여진 글자 한자한자에서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홍보와는 조금 다르게 그녀 자신의 자서전이였다.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격렬한 변화를 가져왔던 매춘이라는 일에 뛰어들게 된 시점으로부터 전후 2년간의 일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기승전결의 극적인 이야기 진행보다는 시간의 순서에 따른 순차적인 진행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직업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인생은 거의 전체가 자극적이며 거칠고 숨가쁜 이야기들 투성이 일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삶을 담은 이 책은 오히려 일반 소설들 보다도 자극적인 이야기들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 독자들이 이제 이 부분에선 좀더 격렬한 갈등이 나오겠지라고 짐작하게 되는 부분들에서는 오히려 간결하고 담담한 문체로 유들있게 생략하며 넘겨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이 그녀의 험난한 인생을 그대로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면, 괜시리 불편해지는 마음에 이렇게 끝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읽어 넘어가지 못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내내, 그렇게 거친 이야기를 씹어야 한다면 아마도 내 눈과 머릿속은 너덜너덜 해졌을테니까. 

그러나 이런 그녀의 담담함과 달리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 얼굴에서 피어난 웃음은 본문으로 들어가면서 사라져버렸다. 책의 번역이나 편집이 엉망이라서가 아니라(오히려 번역은 꽤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직업과 그것에 얽힌 이야기들은 내가 호감을 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였다. 처음에 그녀가 창녀가 된 계기가 된 것은 빌이라는 한 남자 때문이였다. 그녀는 그 남자 때문에 그나마 궁핍하지만 최소한 몸 누일 곳은 있던 삶을 던져버리고 무모하게도 생면부지의 나라, 독일로 떠나게 된다. 당시 그녀의 태도는 어떻게보면 낭만적이고 사랑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에 그녀가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라는 입장을 살짝 보태면, 내 입장에서 그녀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무계획적이며 한심한 사람의 이야기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끝까지 읽는 내내 이 사실에 대해서 화가 났다. 결국 그녀의 눈에서도 사랑이라는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빌이 멍청하며 폭력적이고 후안무치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버스는 이미 떠나버린 후 였다. 이미 그녀는 그날의 숙소와 배고픔을 걱정해야 하는 거리의 창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못돼먹은 빌이랑 헤어지고도 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한심하고 멍청한 남자들을 전전한다. 마치 폭력남편에게 매맞는 아내가 결코 폭력남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는 빌과 비슷한 남자들과 연인이 되는 것을 반복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런 폭행을 행사하는 것이 사랑에 표현이라는 말까지 한다. 오 마이 갓! 그렇다면 그녀를 창녀로 내몰은 악몽같았던 빌은 너무나 사랑이 넘치는 남자였던건가? 그래서 그의 사랑에 온몸이 부러져 죽기 전에 그를 겨우겨우 쫒아낸 것인가? 아무리 그녀가 1930년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그녀의 의견은 시대를 초월하여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엔 창녀들의 권리를 주장한 그녀를 시대를 앞선 패미니스트 중에 한명이라고 봤지만 이 책을 완독한 후에는 이런 내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그녀의 사망후, 그녀의 무덤을 왕실묘지로 이장하는 것을 패미니스트 단체에서도 반대한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패미니스트가 아니라 그냥 매춘이라는 노동조합의 조합장일 뿐이였으니까. 그녀가 만약 패미니스트였다면 남자 때문에 자식들을 불안한 삶으로 내몰지도 않았을 것이고, 외딴 타국에서 창녀가 되지도, 또 그런 한심한 남자들 사이에서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지도 않았을 터이니.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이 책에서 기대한 것은 매춘에 종사한 사람이 말하는 매춘이라는 일과 그 일을 업으로 삼은 여성들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였다.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어찌보면 급진적인 패미니스트의 한 모습을 그리젤리디스 레알에게서 발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와 이 책은 그렇지 못했다. 최소한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된 그녀의 모습은 이런 내 기대와 많이 달랐기에 실망스러웠다. 책을 잡고 있는 내내 이 책의 어느 부분에 가서야 내가 기대한 내용들이 나올까 두근거리며 기다렸지만 결코 그런부분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부분은 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사회비판은 그녀의 직업적 입장에 편향되어 있었고, 또 일반적이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을 조롱하는 내용이였기에 상당히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할 수 없었고, 이런 그녀의 태도에 마음까지 답답해졌다. 결국 내가 이 책을 통해 만난 사람은 혁명적 창녀가 아니라, 그냥 남자에 홀딱 빠져서 대책없는 삶을 살았던 한 여인이자, 4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참으로 어리석고 무책임한 어머니일 뿐이였다. 

이 책을 다 읽고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기사와 사진을 찾아보았다. 내가 찾아낸 사진속의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그 미소는 생생한 장미처럼 신선했고, 그녀의 미모는 나이가 들었지만 아름답고 활기찼다. 이 글에서 내내 느껴지는 것처럼 삶에 찌들어 고통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였을까? 아니면 그녀가 사랑한 연인들의 사랑 덕분이였을까. 아니, 그 두가지를 모두 포함한 덕분이리라. 낙천적인 성격과 달콤한 사랑들로 인해 그녀의 삶은 찌들어갔지만, 그 미소만은 해맑게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그 미소와 함께 그녀의 바램대로 예술가로써의 삶을 계속 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랬다면 그녀는 더 행복했을까? 이제 그녀의 육신은 검정색 땅속 저 밑에 있다. 아마도 그곳에선 그녀도 그렇게 사랑하던 연인들처럼 검어졌을테지. 그녀가 그토록 원하고 탐했던 것 같은 그들의 검은 피부색처럼. 부디 그녀의 삶이 그 영원의 세계에선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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