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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처음에 이 책을 받아 들었을 때 나는 좀 당황했다. 책은 이뻤고 편집도 세심하게 신경써서 (표지 디자인이 원서와 같다는 것을 고려할 때 책의 편집도 원서 그대로의 분위기를 살린것 같지만) 간만에 마음에 쏙 드는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나는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 책은 편지글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 대략적인 분위기와 작가에 대한 짧은 지식만 있었던 나는 순간 너무 당황을 해서 몇일동안 이 책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고심을 해야 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바보같은 짓이였다 - 웃음)
어린시절 TV에서 키다리 아저씨라는 만화를 해줬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국민학교1학년 때(내가 다닐때는 국민학교였다!) 즈음이였던 것 같은데 그 만화가 정말정말 재밌어서 나는 당연하게 열렬한 시청자가 되었다. (아직도 마지막회 장면을 기억할 정도로) 그리고 시간이 몇년 흘러 학교 도서관에서 키다리 아저씨라는 책을 발견했을 때 깜짝 놀랐다. 사실 나는 이 만화가 그냥 만화라고만 생각했지 설마 원작 소설이 있을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반갑고 그리운 마음에 책을 펴본 순간 나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키다리 아저씨의 원작이 편지형식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나는 그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고민을 했고 결국 하루만에 안 읽기로 결심하고 책을 반납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였던 나에게 편지글은 너무 딱딱하고 어려웠고 충격적이였던 (웃음)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결국 아직도 키다리 아저씨는 읽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편지형식의 글은 읽어볼 엄두도 못내게 되었다. 이상하게 이 때의 충격이랄까..경험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말이다.
이 책을 놓고 고민하느라 일주일을 보내고 드디어 이틀 전 아침 불현듯 결심을 했다. 이제 읽어보자! 이제 나는 국민학생이 아니잖아! 편지글 형식의 소설에 진저리를 치던 나로써는 꽤나 용감한(!) 결정이였다. (웃음) 그리고 책의 10페이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이 용감한 결정(?)에 대해 스스로가 기특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책이 너무너무 재밌었던 것이다! 10페이지를 막 넘기고서는 당장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강력추천을 하고 말았다. (나는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지인들에게 다 전화를 해서 읽으라고 몹시 괴롭히는 편이다.)
이 책은 크게 두가지 이야기로 흘러간다. 하나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줄리엣 애쉬튼과 건지 아일랜드 사람들과의 첫만남부터 우정과 사랑, 그리고 믿음이 커가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의 기억과 그것에 따른 사람들의 가슴아픈 사연들이다.
세계 2차대전이 막 끝난1946년 어느날 작가인 줄리엣 애쉬튼에게 한장의 편지가 도착한다. 건지 아일랜드라는 곳에서 도시라는 사람으로부터. 우연하게 줄리엣이 소장하고 있던 찰스 램의 책이 도시라는 사람의 손에 들어갔고 도시는 그 책에서 몹시 매력을 느끼게 되었으나 그가 살고 있던 건지아일랜드는 전쟁기간 중에 독일군에게 5년동안 점령당한 했던 탓에 섬 밖 세상의 새로운 소식과 그 책의 저자인 찰스램의 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하지만 찰스 램의 책을 더 읽고 싶은 마음에 혹시 이 책의 원래 주인이였던 줄리엣에게 찰스 램의 저서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에 대한 책값을 지불할테니 책을 추천해주거나 보내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부탁을 한다. 그리고 도시는 자기가 이 책을 읽게된 계기가 된 건지섬의 문학회(바로 이 문학회의 이름이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다!)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이 문학회의 특이한 이름과 도시가 자신과 같은 책을 좋아한다는 것에 감명을 받은 줄리엣은 이 한통의 편지를 계기로 건지 아일랜드 사람들과 편지를 교환하게 되고 그 편지글들로 책의 이야기는 진행된다.
건지 아일랜드 문학회 사람들은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담담하게 자신들이 전쟁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그 이야기들은 전쟁중에 건지섬 문학회 사람들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이지만 전쟁의 고통에 대해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이야기들이다. 이야기 중에 전쟁과 그것에 대한 아픔이 곳곳에 나오지만 이 책은 전반적으로 따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데, 결국엔 독일군들 조차도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노출된 평범한 사람들이였다는 것이 가슴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을 수탈한 사람도 있지만 자신과 상관없는 마을 아이가 죽어감에도 목숨을 걸고 백신을 훔쳐서 건네주다가 체포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독일군, 감자를 훔쳐먹다가 사살된 독일군..등등 사상과 그들의 잘못을 떠나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전쟁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사실 사상과 그들의 잘못을 떠나라는 이 이해심 많아 보이는 문구는 독일이 2차 대전때 일어났던 일들을 진심어린 사죄를 하고 반성하는 모습이 있기 때문에 쓸수 있는 문장이다. 우리 옆나라 사람들에게는 절대 통용될 수 없는 말들이다. 나는 반딧불의 묘를 보면서도 급분노했던 사람인지라..)
작가인 메리 앤 셰퍼는 평생 책을 사랑한 사람으로 망설임 끝에 비로소 이 책의 집필했는데, 겨우 초고를 다 쓰고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조카 애니 배로우즈에게 이 원고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어달라 부탁하고 08년 2월에 타계했다고 한다. 이 책은 평생 책을 사랑한 사람이 쓴 책 답게 책 전체에서 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래서 이 책이 작가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특히 나는 책 집필을 망설이던 메리 앤 셰퍼에서 "이제 그만 닥치고 책이나 써!" 라고 말한 친구가 원망스럽다! 몇년만 더 일찍 말해줬더라면 우리는 메리 앤 셰퍼의 책을 한권이상 더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책의 구성은 상당히 만족스럽다. 편지글로 이루어진 느낌을 책의 편집과 페이지의 디자인에서 제대로 살려내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편지를 실제로 몰래 훔쳐 읽고 있다는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 이 기분은 책의 등장인물들에게 좀 더 친밀감을 느끼게 해준다. 원작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사실 영어실력으로 보자면 다리 밑에서 구걸해야 하는 수준인 나에겐 있어도 읽기 힘들겠지만) 번역은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급작스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꼼꼼하게 주석까지 달아 독자를 배려하고 최대한 소설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점에서는 칭찬을 해주고 싶다.
그러나!!!! 책의 교정은 도대체 누가 봤는지!!! 정말 한대 때려주고 싶다!!!! 오타가 너무 많다. 그냥 오타라면 넘어 가겠는데, 91페이지에 있는 ' 것입ㄴ니다' (토시하나 안 빼고 그대로 썼다) 이 오타는 도저히 용납해 줄 수가 없다. 순간 내눈을 의심하고 책의 발행날짜를 찾아봤는데, 이 책은 초판 1쇄도 아니고 초판 2쇄더라. 저런 오타가 있으면 초판으로 하지말고 중보판으로 다시 찍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런 엄청난 오타를 내놓고 뻔뻔스레 초판 2쇄를 찍다니. (사실 다른 출판사들도 요즘은 번역본에 저런 오타가 있어도 그냥 찍고 말던데, 너무 한심하다.) 출판사 홈페이지 찾아가서 한마디 해주려고 했는데 홈페이도 없더라. 이 출판사가 앞으로 번역예정 된 책들을 보니 내가 그동안 번역본으로 읽고 싶었던 소설들을 대거 번역 예정중이던데..이 엄청난 오타들을 보고나니 몹시 걱정된다.
책의 내용은 정말 좋다. 정말 요 몇년간 읽은 책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너무너무 좋았다. 전쟁의 잔상들과 남겨진 사람들로 인해서 억지 눈물을 짜게 유도하지 않고 아이들의 모습에서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고리타분한 표현들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담담하게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을 말할 뿐이다. 그래서 더 따뜻한 느낌이 나는 것 같다.
이 책을 다 읽고나니 처음에 이 책을 펼 때 가졌던 편지글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편지글로 이루어진 다른 책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갖게 해줬다. 내가 편지글에 대해 가졌던 공포감이 오히려 이 책으로 하여금 동경으로 바뀌게 되다니..여러모로 이 책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준 것같다. 그 교훈으로 그동안 피해왔던 키다리 아저씨를 다시 시도해 볼까 한다. (웃음) 그 전에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편지를 다시 써보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편지라는 매개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웃음)
사실..오타만 아니라면 독자들을 배려한 꼼꼼한 주석과 깔끔한 편집, 그리고 너무나 멋진 책의 내용으로 별 다섯개 X 100을 해줬을텐데..저 엄청난 오타들 때문에 별 4개를 준다. (진짜 교정 돈받고 하면서 그러는 거 아니다...)
이 책을 읽는 팁!
이 책은 편지글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이 서로 편지를 받는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읽는게 책의 맛을 더 살리는게 아닐까 싶다. (그냥 내 생각이다 -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