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인시공 -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
정수복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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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양국의 독서문화를 체험해본 작가가 쓴 독서문화 에세이다. 바위처럼 무겁고 강철처럼 튼튼한 학술서나 이론서가 아니라 산들바람 같이 가볍고 새소리처럼 상쾌한 산문집 한권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바램대로 이 책은 간결하고 깔끔한 필체로 쓰여져 소소하게 읽을 수 있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은 않고 중간중간 작가의 인문학적 지식과 경험으로 적당한 무게감을 유지한다. 그래서 이 책은 작가의 에세이되, 책에 대한 인문학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책의 제일 처음에서 떡하니 쓰여져 있는 <독자 권리 장전>이 이 책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 책을 읽을 권리.

2. 책을 읽지 않을 권리.

3. 어디에서라도 책을 읽을 권리.

4. 언제라도 책을 읽을수 있는 권리.

5. 책을 중간중간 건너뛰며 읽을 권리.

6.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7. 다시 읽을 권리.

8.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9.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

10. 책에 대한 검열에 저항할 권리.

11. 책의 즐거움에 탐닉할 권리.

12. 책의 아무 곳이나 펼쳐 읽을 권리.

13. 반짝 독서를 할 권리.

14. 소리내서 읽을 권리.

15. 다른 일을 하면서 책을 읽을 권리.

16. 읽은 책에 대해 말하지 않을 권리.

17. 책을 쓸 권리. 

나는 이 <독자 권리 장전>을 읽는 동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어쩜 이렇게 공감되는 내용만 주르륵 적혀있는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엇보다 9번,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소위 베스트셀러라는 책 중에서 내 마음에 와닿은 책들은 별로 없었는데도, 주변에선 이 책은 꼭 읽어야 해, 넌 아직 이런 경험이 없어서 공감할 수 없는거야, 라는 말들로 베스트셀러들을 강요당한 경험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해리포터조차 영화 개봉 직전에서야 겨우겨우 읽었고,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을 읽게 된 계기도 해리포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해리포터 영화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드라마를 봤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그 책들을 읽었던 것은 오직 책과 마찬가지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라고 닥달하며 스포일러를 흘려댈 사람들 때문이였다. 그러고 보면 영화나 드라마에도 시청자 권리 장전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내용은 프랑스의 서점들은 각 서점들이 추구하는 전문분야가 있다는 것이였다. 문학, 철학, 건축, 음악 등등. 그래서 서점 주인이 단순한 상인에서 벗어나 단골들과 책으로 친밀한 교류를 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는게 참 마음에 들고 부러웠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규모 향토서점들은 이미 대부분 문을 닫아버렸고, 그나마 남아 있는 대규모 서점들도 힘들다며 매장을 축소하고 있는 상황이니 더 비교돼 보였다. 프랑스 서점들 역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하지만 독자들과 그렇게 끈끈한 애정을 유지할 수 있는 개성적인 서점들이 존재하니 최소한 우리네보다는 이 상황을 돌파하는게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한 도시에 경우 도서관을 확충했더니 서점의 도서판매율이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나조차도 도서관에서 재미있게 본 책은 직접 구입해서 소장하는 쪽인데, 도서관 때문에 책 판매율이 떨어진다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 때문에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 했었던 기억이 있다. 역시 그렇지 않았구나, 해답을 찾은 기분이였다. 우리나라도 예시로 든 일본의 도시처럼 십분만 걸으면 도서관에 갈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다. 그나마 밤늦게까지 도서관이 문을 여는 등, 우리나라 도서관 문화가 점점 보다 많은 시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다행이긴 하다. 이렇게 차츰 발전하다 보면 언젠가는 어느 도시에서든 걸어서 십분안에 도서관에 닿게 되지 않겠을까.

 

이 책의 아쉬운 점은 후반부로 갈수록 처음의 담백하고 상쾌한 필치가 개인적인 경험담으로 쏠리면서 살짝 무겁고 눅눅해져버린다는 것과 저자가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이다보니 책 내용이 전반적으로 너무 낭만적이고 완벽한 상황의 독서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간만에 만족할만한 한국작가의 문장들을 읽을 수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초반의 필체가 워낙 내 취향이라 후반부에 유독 아쉬움이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독서에 관련된 사진들도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였다. 그 사진들 때문이라도 당분간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면 이 책이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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