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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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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솔직히 조금 걱정을 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는, 내 머릿속에 내재된 프랑스 문학에 대한 선입견들 때문이였다. 프랑스문학은 철학적 사유를 기본으로 하므로 어렵고 지루해. 그러니까 읽기 어려워. 이게 내 머릿속의 전반적인 프랑스 문학에 대한 대부분의 생각들이였다. 머릿속의 프랑스문학에 대한 부분들이 저런 꽁깍지들에 쌓인채 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제는 저 꽁깍지들을 다 벗겨낸뒤, 가볍고 상쾌한 기분으로 프랑스 문학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내 야심차며 똥꼬발랄한 생각은 이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급브레이크를 밟고 말았다. 책의 서문이 나에겐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서문이란 보통 작가가 독자들에게 앞으로 읽게 될 자신의 책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싣는 것인데, 그 내용이 이렇게 이해하기 힘들다니, 이 책의 내용이 나에겐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이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칼을 빼들었으면 무라도 잘게 채를 쳐서 그 즙이라도 쪽쪽 빨아먹어야 하는 법. 마음을 굳게 먹고 이 책을 완독하리라 다짐하며 주먹을 꼭 쥐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라라? 이 책, 꽤 재밌는 것이 아닌가?! 

육식이야기는 총 14개의 단편이 담긴 책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서문까지 하나를 더해 총 15개라고 말하고 싶다. 바로 내가 어렵다고 움찔한 그 서문 말이다. 처음 서문을 읽을 때는 철썩같이 작가의 말이자 주제라고 생각했으나, 서문의 끄트머리에 써 있는 사람의 이름을 읽게되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서문을 쓴 사람의 이름이 작가 베르나르 키리니의 이름이 아니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글은 단지 이 책의 서문이자 누군자의 추천글이라고만 순진하게 생각했는데, 본문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읽어나가게 되면서 그 서문이 저자가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이 책의 전반적인 이야기에 대한 포석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어렵고 까다로운 내용을 비비꼬아 놓으며 번역문이라는 변명을 달아 독자들에게 일종이 "뻥"을 쳐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게 되는 사람들이 부디 그 뻥에 속아 이 책을 덮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서문이라는 무거운 대문만 꾹 참고 열어서, 일단 본문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이 책의 유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버릴 될테니까.  

이 책의 작가 베르나르는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지나치는 소재들에 주목하고, 그 소재들로 독특하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여러가지 형식을 빌어서 표현한다. 덕분에 이 책에는 평범한 단편들 외에 콩트 형식의 에피소드 모음들과 편지글, 일기, 회고록, 희곡 같은 다양한 묘사방식이 존재하며, 이런 자유롭고 다양한 형식들이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줬다. 또한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묘했다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이 책은 물론 재미있고 유쾌하지만 그 즐거움이 밝은 햇살 아래 행복감의 느낌이 아니라,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어 살짝은 으스스해진 미스테리한 느낌이 강하게 풍겨나왔다. 이런 느낌들은 환상문학과 단편이라는 특성상 자칫 가벼워질수도 있는 이 책의 이야기들에 무게감을 실어 주는 역활을 효과적으로 수행해줬는데 나는 이런 특유의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과 발상에 감탄하며, 이 책을 시작할 때 했던 걱정일랑 저 멀리 집어던지고 이 책에 푹 빠져들었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이 단편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육식이야기였다. 제목과 표지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듯이 육식성 식물인 파리지옥이 주 소재로 등장한다. 한 나이 지긋한 괴짜 식물학자가 이 육식성 식물에 매료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첫 시작에서부터 이미 이 학자가 죽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에서 이 이야기의 전개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이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처럼 이 짐작 가능한 이야기의 전개를 베르나르 키리니는 참 맛깔나고 독특하게 짜나갔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러서는 내 예상을 벗어난 결말을 보여줬는데, 그것을 읽는 순간 왜 이 작품이 표제작이며 이 책의 제일 끝부분에 위치하게 됐는지 알게 됐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단 하나의 주제가 이 한편의 이야기에 모두 압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베르나르 키리니가 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 아니였을까. 문득 이 책의 서문과 본문 사이에 끼여 있던 글 한자락이 생각났다.  

"이 놀라운 일들이 현실이라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것들이 상상의 것이라면 난 이미 미쳐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문구를 읽고 서문이 뻥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결국 이 책은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었고, 난 이런 사실을 교묘하게 숨겨놓은 작가가 치는 뻥에 계속 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뻥에 당하기 위해 기꺼이 이 책을 읽은 것은 나였고, 그 즐거움에 한껏 취할 수 있었으니 만족한다. 때로는 이렇게 독특하며 새로운 스타일의 책에 빠져드는 것도 독서의 한 재미니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베르나르 키리니는 간만에 만난 독특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였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을  특유의 관찰력으로 찾아낸 소재들을 글로 옮길 수 있는 필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 하나만으로는 작가 소개문구처럼 이 작가가 마르셀 에메와 에드거 앨런 포, 그리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비견될만한 재목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책 한권만으로 그를 단정짓기엔 그에 대한 단서가 부족했다. 다만 이제 그는 갓 시작하는 풋풋한 새내기 작가이므로 그 싹이 어떤 나무로 자라날지 지켜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과연 다음에 만날 그의 이야기는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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