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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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소개되는 해외 문학작품 출산지는 유럽이나 일본, 미국 등에 치중돼 있다. 최근에 중국이 가세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으며 동남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 등의 작품들은 가뭄에 콩 나듯 소개되는 형편이다. 이것만 본다면 문학작품이 소개되는 것도 마치 무역구조를 따라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대세를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순간이나마 이 구조를 흔들어버릴 만한 조짐이 나타났다.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신작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 국내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마르케스가 누구인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함께, 국내에서는 불모지와 같았던 라틴 문학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 거장이 아니던가?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부터 국내에서 오랫동안 사랑받는 작가인 저자는 일종의 코드와 같이 여겨지고 있을 정도다.


라틴 문학이 일본이나 프랑스, 미국 등에 비하면 어색하게 느껴질지라도 마르케스의 이름이 들어간 작품이라면 '필독서'로 통하는 것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일. 그렇기에 출산지가 어디였든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 최근 작품들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아흔 살을 코앞에 두고도 칼럼을 쓰는 '노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아흔 살 하면 어떤 나이인가? '인생은 60부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아흔 살을 두고 인생의 한창때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흔 살은 인생을 정리해야 할 때라고 할까? 아름답게 정리할 수 있다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이 아흔 살이 바라는 내일일 테다.


마르케스의 '노인'도 그랬을 테다. 기자로 활동하는 젊은 시절 동안 514명의 여자들과 잠자리를 나누었고 그 덕분에 결혼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노인도 아흔 살의 생일을 앞둔 때에 미래보다는 과거를 생각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보다는 지나온 길을 정리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흔 살의 생일을 앞둔 노인은 옆에서 누가 들으면 '장난하시지 마세요'라는 소리가 곧장 나올 법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것은 풋풋한 숫처녀와 잠을 자야겠다는 계획이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는 아흔 살이 되는 노인이 열네 살 소녀를 사랑하는 이야기다. 이들의 만남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줄거리 자체로 본다면 약간은 당황스러울 수 있다. 사실 지금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당장 구속감이 아니겠는가. 허나 문학의 테두리 안에서, '멜뀌아데스의 양피지'와 '마콘도'로 세계를 흔들었던 마르케스의 손끝 아래서 그런 세속적인 기준은 무의미하다.


노인이 소녀를 사랑하는 것은 일종의 '플라토닉 러브'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한 난봉꾼으로 통하는 노인이었다고 하지만 소녀를 사랑하는 얼굴은 처음 이성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청소년의 수줍은 얼굴과도 같다. 창녀와 칼럼니스트라는 신분의 차이도, 열네 살과 아흔 살이라는 나이의 차이도 이 사랑 앞에서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


그 노인은 첫사랑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것과 같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사랑이라는 열병에 빠져 자신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적극적인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 모습은 사랑에 빠진 전형적인 남자의 모습이다. 그런 노인의 사랑 시를 듣다보면 이미 '노인'이라고 생각하며 여겼던 선입견과 편견은 사라지고 없다.


노인의 사랑은 아름답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주기만 하는 사랑은 아름답다. 이른바 '난봉꾼 시절'을 거치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했던 노인이 소녀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은 세속적인 시선과 관련 없이 아름답다는 수식어만이 어울린다. 피어오르지 못한 채 시들어가던 한 송이 꽃이 만발하는 것을 바라볼 때와 같은 심정이랄까? 그것을 보며 누가 인상을 찡그릴 수 있겠는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저자의 명성 때문인지 작품에 관련된 일화가 많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공식 배포되기 일주일 전에 '해적판'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가 해적판과 공식 판본이 다르도록 급히 마지막 페이지의 단어 하나를 수정했다고 하니 저자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오랜만에 눈길을 끄는 라틴 문학이지만 실생활의 '모습'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주요 등장인물들부터가 정확한 이름이 없으니 도시나 생활을 묘사하는 부분 등 현실적인 모습은 오죽하겠는가.


반면에 마르케스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비견될 정도의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시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작품은 마르케스의 이름에 거는 기대치를 실망시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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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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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유효성’을 믿는가? 무라카미 류는 <러브 & 팝>의 후기에서 문학의 유효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과연 문학의 유효성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가?’라고. 문학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또 다른 세계를 맛보게 해주기 위해서만은 아닐 테다.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닥거려주는 것이 또한 문학의 힘일 테고 그것이 문학의 유효성일 테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시대에 여전히 그것이 유효할까? 한 권의 책보다 인터넷 사이트의 패러디 동영상이 더 큰 위력을 보여주는 지금, 문학작품보다 실용서가 월등히 팔려나가고 있는 지금 그 문학의 유효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 기대는커녕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질문은 모든 작가들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화두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공지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품들을 연달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렸던 작가일수록 더 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저자의 글에서 이 화두를 직접 확인해보기란 어려웠다. 그러던 중에 작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작년 <별들의 들판>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말을 전하려고 했던 그것도 문학의 유효성을 말하려는 작가의 몸짓이 아니었겠는가. 그 몸짓에 이어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신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 공지영이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한 걸음 더 앞에서 강렬하게 느낄 수가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서로’를 비추면서 또한 ‘보는 이’들을 비추는 거울 같은 두 명의 주인공을 통해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를 비추는 첫 번째 거울은 이른바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화려함 속에서 빈곤을 허덕여야 했던, 가수가 되어 화려한 무대에 올랐지만 사는 동안 죽고 싶어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미대 교수 ‘유정’이다.


두 번째 거울은 세 명의 사람을 죽여 사형선고를 받은 ‘윤수’다. 유정과 윤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정의 고모이자 윤수를 달래주려는 모니카 수녀 덕분에 다른 차원의 이들을 서로의 눈을 보게 되는데 그 ‘마주침’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독자들의 ‘마주침’과도 같다.


‘몰랐다’고 외면했던 어두운 곳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나와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서글픔과도 같은 그것은 윤정이 윤수를 보며 눈시울이 불거지듯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그것은 신파조의 사랑이야기도 아니고, 죄인의 억울한 인생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강요가 아니다.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이 주는 ‘감동’과 부조리한 세상의 어긋난 정의 때문에 만들어진 ‘아픔’이 신의 장난처럼 비극적으로 서로를 찾아갈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강간에 당한 피해자가 다시 상처를 받아야 하는 사실이나 자본 때문에 밤새 떨어야 하는 사람들의 현실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조명하고 있는데 가장 구체적인 것은 ‘사형제도’로 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을 인위적으로 설정해놓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일까? 또한 오해 속에서 죄 없는 이를 죽일 수 있다는 혐의 때문일까? 작품 속에서 사형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저자의 눈길이 알베르 까뮈나 빅토르 위고의 그것과 비슷하게 여겨지는 건 그 탓일 테다.


환경은 전혀 다르지만, 인생의 밑바닥에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고 몇 번이나 무릎을 꿇었던 그들은 서로를 거울처럼 여기게 된다. 그 과정은 세속적인 해석이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가장 아름다운 정신적 행위로서의 ‘사랑’이다. 또한 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을 통해 더불어 또 하나의 위대한 정신적 행위인 ‘용서’가 등장해 사형수인 윤수는 천국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처럼 보이고 윤정은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오늘을 맞이하게 된다.


윤수가 윤정을 보며 느끼듯, 윤정이 윤수를 보며 느끼듯 이들은 서로 닮아 있다. 그것은 거울과도 같은데 앞서 말했듯이 그 거울은 작품을 바라보는 작품 밖의 사람들에게도 보여 진다. 무슨 뜻일까? 상처 입고, 눈물 흘리고,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는 우리네 사람들이 우리와 닮은 그들을 보면서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랑과 용서를 나눌 수 있는 삶, 그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축복을 이야기하기 때문인가.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다는 것이겠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인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불편한 책이다. 이 점은 이전에 발표됐던 작가의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별들의 들판>도 읽기가 수월한 책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더하다.


허나 신영복 교수가 ‘서경’을 해석하며 말했듯이 불편한 것이야 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것이 오늘날 문학이 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보고 싶지 않았던 곳을 보게 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젠가는 했어야 하는 일이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그것을 촉구했을 뿐이다.


저자는 작품을 책상 앞에서 글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사회 구석구석을 보려고 했던 그 노력, 설사 그곳이 더러운 거품들이 들 끊는 하수구일지라도 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저자는 펜 끝에서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작품을 통해 말을 토해내는 인물들의 절박함을 자신의 것인 양 느낄 수 있는 것도 작품이 지닌 가치 중 하나다.


장편소설로는 7년 만에 발표한 공지영 신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전에 발표했던 작가의 작품들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건드렸다면 이 작품은 가슴 속을 파고든다. 작가의 작품 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만큼 격동적으로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적은 없었다. 광고 같은 말이지만 이 작품을 두고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허튼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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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술
이지하 지음 / 자유로운상상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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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현장에 있었기 때문인가? 이지하의 글이 범상치 않다. 아니, 글이라기보다는 그림을 그려내는 재주가 범상치 않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연애의 기술>은 참으로 놀랍다. 이상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고은주의 ‘칵테일 슈가’를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문학성을 논하기에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갸우뚱거린다. 그러나 대중성으로 보자면 <연애의 기술>은 다섯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어차피 작품 자체가 ‘소설을 읽는다’는 것보다 ‘미니시리즈를 본다’는 것에 가깝기에 글로서 표현하는 문학의 예술성을 맡기란 사실상 어렵다. 반면에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조금만 들어도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선과 악의 지루한 대결 구도를 벗어나 있는 <연애의 기술>은 네 명의 주요등장인물 모두가 ‘선’에서 비롯된 행동을 한다.


'선과 선의 충돌'이 <연애의 기술>에 바람을 일으킨다. 선과 선의 충돌에서 오해가 발생하고 갈등이 야기된다. 누군가는 그것을 ‘부조리’하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그것이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했는데 이지하는 완벽하게 해냈다. 선과 선의 충돌이 주는 안타까움을 이렇게 절실하게 표현해낼 줄 아는 작가가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있었던가?


애초에 저자는 이 작품을 소설이 아닌 다른 매체로 만들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톡톡 튀는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사연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연들을 캐릭터 모두 갖고 있으니 작품이 진행될수록 저자에게 놀라움을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또한 지나칠 정도로 성적인 행위의 묘사가 많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또 하나의 특징인데 그것은 주인공과 주인공을 엮어주는 과정의 하나로 저자가 택한 것이니 별다르게 문제 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몸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자를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의 심리와 그것을 바라보며 착잡하지만 그대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여자들의 심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 런지?


문장들이 짧고, 이야기도 빠르게 진행된다. 숨이 가빠를 정도다. 등장인물 중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모르던 사이에 350페이지의 분량은 나뭇가지가 ‘뚝딱’하고 부러지듯 ‘뚝딱’하고 끝을 보인다. <연애의 기술>은 신비로운 소설이다.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상처받고, 상처 주는 이야기인데 신비롭게도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책 속에서 영화 필름 돌아가는 걸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니 신비롭다고 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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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햇살가득눈부신날 > ㅋㅋ 잼나다 삼순이


삼순이
 

   정말 잼난다.

  요즘 이런 코미디 로맨스가 넘 넘 잼난다.

  김선아의 연기는 정말 푸하하하하..

 항상 웃음을 자아낸다.

  잼난다.. 김 삼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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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검객 2005-08-15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이 뒷북이지만,요즘 내 이름은 김삼순을 한번 다운받아 볼까 생각중이다..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보려 했지만,,영화보느라 결국 포기했다,,재밌는걸 좋아하는 나니까,,이 드라마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된만큼..분명 볼만할 것 같다..음,,어떻게 하지?ㅡㅡ;
 
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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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을 살려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허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린다할지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의 틀을 작가가 임의대로 해체할 수는 없다. 길고 난다는 소설일지라도 이야기는 엄연히 역사의 그 틀 안에서 돌고 돌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 여정은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기나긴 여정을 뚫고 세상의 빛을 본 소설은 그 자체로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김별아 장편소설 <미실>은 일단 흥행 요인을 갖고 있다. 사실 1억원의 상금을 내걸었던 제1회 세계문학상 당선작이라는 점에서도 흥행 요인을 찾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상금이 많은 문학상 수상작’보다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 더 주목하고 있다.


김별아가 주목한 인물은 누구인가? 제목 그대로다. 신라 시대의 여인 ‘미실’이다. 미실은 ‘화랑세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신라의 여인이다. 역사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하는 것으로 소문난 김탁환의 인물들에 비하면 김별아의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의 저자 김훈에 비하면 역사의 빛과 같은 남자가 아닌 ‘여자’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어렵지 않게 작업의 수고를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김별아는 한 여인을 재창조하는데 성공했다.


역사 속의 어떤 ‘팜므파탈’보다 위협적인 여자, 여러 자식들에게 사랑받는 어머니, 세 명의 왕을 움직일 수 있었던 권력자, 제도와 관습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움직였던 강력한 자아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미실이 김별아의 <미실>을 통해 천오백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숨결을 부여받았다.

 

미실은 신라 시대 왕실을 위해 ‘색’을 바치는 운명을 지닌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이자 스승인 옥진으로부터 색에 대한 것을 깨닫고, 다스리는 법을 배우며, 정복당하지 않고 지배하는 정신을 공부했다. 물론 그것은 미실이 원해서라기보다는 신라시대의 골품제도가 그러했듯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굴레였다.


미실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치마가 펄럭이면 세상은 무릎을 꿇었다. 경국지색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허나 아름다운 여인이 역사 속에서 한두 명이었을까? 지금 미실을 바라보는 건 문자화된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천하를 휘어잡은 여인의 ‘당참’ 때문이다.


한 명의 왕을 폐위시키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신라시대의 성군으로 알려진 진흥제까지 휘어잡는 무서운 끼를 갖고 있었다. 미실이 원한다면 성군도 바보가 될 수 있으며, 바보가 성군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 미실은 그런 힘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


사람들은 미실을 두고 ‘팜므파탈’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후세에 존재하는 남자들의 시선에서 내린 평가가 아니겠는가. 미실을 보면서 팜므파탈을 논하며 그것에서 비롯되는 여성의 위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다른 사람이 대신 죽어줄 정도로 사랑받은 사람, 어떤 인간보다 자유로웠던 사람, 본능을 쫓으면서도 사람이었던 미실이 보여주려는 것은 자신을 구속했던 운명과 속박을 희롱하며 세상을 활보했던 그 자유로움일 것이다.


그것은 역사 속의 어떤 인물에 견주어도 낮게 볼 수 없는 매력적인 요인이다. 업적이라고 한다면 권력가들의 색을 채워준 정도로 미비하다. 허나 사람들이 꿈꾸던 삶을 추구했고 개척했다는 점에서 미실을 따라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역사 속의 인물을 그려내는 녹록치 않은 작업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훌륭하게 그 일을 해냈다. 그렇기에 천오백여년의 시간이 갖고 있던 긴 공백은 봄에 눈 녹듯 독자가 미실을 만나는 순간 사라지고 없다.


<미실>은 생동감이 넘친다. 미실이라는 인물을 바로 옆에서 보는 것처럼 인물의 생명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또 한번 역사와 현재를 하나로 만드는 소설 특유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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