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홍연미 옮김, 찰스 키핑 그림 / 열림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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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는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친숙하다. 드라큘라는 이제 공포를 제공하는 존재이기 보다는 친숙하게 느껴지는 악령, 또는 귀신들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처음 드라큘라가 만들어졌던 1897년에는 흡혈귀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만큼 큰 명성을 얻었고 그 결과 음악, 뮤지컬, 연극, 영화 등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언어로 많은 작품이 탄생하고 있으며 대중들에게 끊임 없이 사랑 받고 있다.



문득 드라큘라를 처음 알게 되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원래 겁이 많은 지라 부모님께서는 공포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잘 말씀해주시지 않는 분이셨는데,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드라큘라를 알게 된 후로 밤이 얼마나 무서워졌는지 밤마다 같이 자자고 조르고 십자가를 지니고 있으면 드라큘라가 오지 못한다는 말에 하나만 구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도 나는 여전히 겁쟁이였고 공포와 관련된 것은 일절 접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여름마다 줄줄이 쏟아지는 공포영화도 절대 보지 않았다. 어느 덧 성인이 된 지금은 드라큘라가 무섭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브램 스토커의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드라큘라>가 나오면서 한구석에 꽁꽁 묶어두었던 기억들을 풀어 약간은 떨리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드라큘라>라는 keyword에 영화를 떠올리고, 이 책을 읽을 때 영화와 비교하면서 읽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본 유일무이한 드라큘라는 <두치와 뿌꾸>라는 만화영화에서 보았던 ‘큐라’가 전부여서 그런지 오히려 원작이 낯설게 느껴졌다. 또 만화영화를 보면서 드라큘라에 대한 친숙한 이미지를 심어두었던 내 노력들이 다 부질없는 짓이 었다고 생각될 만큼 찰스 키핑의 그림은 노골적이면서도 찌릿하게 섬뜩하였다. 다양한 색감도 없이 오직 펜 하나로만 그려졌을 것 같은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찰스 키핑이 겪어보고 그린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드라큘라>는 영국 런던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조너선 하커는 루마니아의 황량한 지방인 트란실바니아로 향한다. 그곳에 사는 드라큘라 백작이 런던에 집을 한 채 구입하는 과정에 필요한 법적 절차를 일러주기 위해서다. 음산하고 수상한 분위기의 성과 백작의 분위기 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는 조너선 하커는 어느 순간부터 드라큘라 백작이 언데드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기 시작한다. 상황은 조너선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자 그는 백작의 성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조너선의 약혼자인 미나는 조너선과 연락이 닿지 않아 초조한 마음으로 친한 친구인 루시와 길을 떠난다. 인간의 피로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되는 드라큘라 백작에게는 이 두 사람을 이용하여 더 없이 좋은 인간의 피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루시의 변화를 눈치체면서 드라큘라 백작의 뒤를 쫓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게 진행된다.





흡혈귀 문학의 명작, 흡혈귀 문학의 고전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드라큘라>이지만 명작과 고전이라는 어려움을 털어낼 수 있을 만큼 흥미롭게 진행된다. 현재와 맞지 않는 의학적인 내용도 다소 포함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수혈에 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는 재미로 가볍게 넘길 수 있다. 그만큼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드라큘라>는 여전히 오싹하고 가슴을 뛰게 만들며 공포를 가져다 준다.
그 이 어디 있을까?





<드라큘라>와 비슷한 keyword를 가지고 있는 책들이 주인공 시점으로 사건이 흘러가는데 반하여 이 책에는 기록으로 의해 사건들이 흘러간다. 뿐만 아니라 지금과 다소 맞지 않는 의학적인 지식이 포함되어있지만 브램 스토커가 차근차근 자료를 조사하고 모아 써내려 갔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을 보인다. 등장하는 인물 모두에게 각자의 특징을 부여하고 특징에 맞는 새로운 삶이 부여되었다고 생각될 만큼 생생하고 흥미롭다.





여전히 지금도 인터넷을 띄워 검색 창에 ‘드라큘라’ 단 4글자만 입력하면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다양한 정보들이 등장한다. 그 시절 꼬마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겁이 많은 나는 스쳐 지나가는 사진만으로도 겁이 날만한 그림들도 많다.
그러나 정말 <드라큘라>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원작의 충실함과 삽화들. 그 보다 정확한 드라큘라가 어디 있으랴.

무더운 여름날 밤, 작년에 읽었더라도 또 읽고 싶어서 매년 꺼내 읽게 되는 매력이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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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진 음지 - 조정래 장편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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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1943년 출생하셔서 1970년 등단 이후로 <태백산맥>과 <아리랑>으로 문학상을 받았음은 물론 끊임없이 책으로 뜻을 펼쳐가는 우리 시대의 소중한 보석 같은 작가님이시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조정래 작가님의 글은 이번 <비탈진 음지>가 처음이었다. 조정래 작가님의 작품 속에는 우리네 정서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음은 물론이고 아픔을 과감히 노출하여 더욱 시리고 애틋함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비탈진 음지>를 읽어보고자 마음 먹었던 것은 어쩌면 건방진 태도 일지도 모르나, 왜 조정래 작가에게 열광하는지 또, 쉽게 공감되지 않고 어렵다고 회피한 그 정서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비탈진 음지>는 1973년 처음 발표되고 1999년 조정래 문학전집에서 <황토>와 함께 출간이 되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부터 평단의 관심을 받을 만큼 문학관과 역사관을 압축한 작품으로 일컬어 지며, 이번에 새롭게 개정하며 장편 소설로 태어나게 되었다.
최근 들어 읽어 온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마다 얼마나 섬세하고 정성들인 글인지 문력(文力)이 느껴졌다. 글자 하나에도 힘을 불어 넣고 의미를 부여 한다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인데도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힘이 가득한 글자들이 향연에 책을 읽는 동안 얼마나 기운을 얻었는지 모른다. 이는 여타 외서들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한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탈진 음지>는 1970년대 한국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는 시기에 부인의 병수발로 삶을 터전을 잃고 가족들과 서울드림을 꿈꾸며 서울로 상경하여 생계를 꾸리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리하여 서울로 떠난 복천은 ‘무작정 상경한 1세대’로 일컬어 진다. 말 그대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복천은 칼갈이로 생계를 유지하지만 생활이 녹록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는 마지막까지도 평탄하지 못하고 끊임 없는 고생과 시련을 맞이 한다. 끊임 없이 고생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복천이 가난한 사람은 끊임 없이 가난하고 부자인 사람은 끊임 없이 부자인 세상에 원망하고 한탄하는 구절이 있었다.




P125
“어떤 놈들은 벼락을 맞아도 골라가며 돈벼락을 맞아 저런 궁궐 같은 집에 살고, 어떤 놈들은 무슨 모진 죄를 졌길래 고향을 도망쳐 나와 산꼭대기 판잣집 셋방살이 신세란 말인가.
잘사는 것들은 갈수록 팔자가 처지고 늘어지고, 못사는 놈들은 갈수록 신세가 비틀리고 조그라드니 평생 저런 집에서 살아보기는 아예 틀려먹은 거 아닌가.”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조정래 작가가 남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합니다”의 문구가 대번에 떠올랐다. 책을 처음 읽어 내려갈 때는 1970년대 돈이 없던 우리네가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면서 겪게 되는 모질고 아픈 삶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 즈음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속속들이 열어본 <비탈진 음지>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단 저 구절에 해당하는 것이 1970년대에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약 4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일이고 NEWS에서는 경제/사회면을 늘 장식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결국 우리가 힘든 것은 그 시대에서도 반복되던 일이고 이 시대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절대 끊을 수 없는 쇠고리로 연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탈진 음지>를 읽을 필요가 없는 날의 속내는 그런 날을 희망하지만, 현실화 되기는 어렵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동안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왜 이렇게 까지 힘들어야 하고 왜 이렇게 까지 고통을 받아야 하며 왜 이렇게 까지 모진 시련이 주어지는지. 그 힘들고 고생스러운 마음은 겪어 보지 않고 따뜻한 밥 먹으며 따뜻한 집에서 편히 생활하는 내가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마냐 이지만, 아무리 타국 생활을 오래하여 우리네 정서가 어렵고 쉽게 읽어 내려가기 힘들다는 내게도 공감을 불어 일으킨다.
첫 시작을 왜 조정래 작가에게 열광하는지 궁금하다고 시작했었다. <비탈진 음지>를 다 읽은 지금 그 해답을 조금은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독자들은 조정래 작가의 글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그의 글에 열광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여타 책에서 느끼기 힘든 한국인의 애환과 순수하면서도 힘이 가득한 문력(文力)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투리로 대화하는 부분이 많아서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거듭 읽어야 했지만, 문득문득 힘이 들 때 한번씩 <비탈진 음지>를 꺼내어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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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세계문학의 숲 7
마크 트웨인 지음, 김영선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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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이 책의 제목인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는 쉬운 듯하면서도 어딘가가 미묘하게 어렵다고 느껴졌다.
(어딘가 입에 착착 붙는 제목이 아니어서 늘 말하는데 힘들었다고나 할까…….)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의 작가는 마크 트웨인으로 그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마크 트웨인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을 당시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도 나고, 그 때 너무 좋아해서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만화주제가를

테잎을 따라 즐겨불렀던것으로 기억난다.

그런 점에서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도 재미있을 거라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고 정말 이 책은 도입부부터 재미를 안겨주었다.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는 그 당시 접하기 힘든 SF적 요소가 포함되어있다.

완벽한 SF적요소가 가미되어있는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당시의 책들이 주로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향의 사회에 관심을 둔 것에 반해 이 책은 주인공이 과거로가 당시의 과학기술로

사회를 변모시키려고 한다는 설정에서 독특하고 참신함이 묻어난다.

도저히 19세기 미국인에게서 탄생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스토리 라인이라 읽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지난 과거에 쓰였다고 믿기 어려운 탄탄한 구조와 재미있는 설정덕분에 세계문학 시리즈 중의 하나라고 하는 책을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전혀 어려움 없이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으로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면, 주인공은 어쩐지 약간 어리바리 하게 느껴지는 캐릭터였다.

뿐만 아니라 중세시대가 배경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시대하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장언함과 근엄한 분위기보다는

이 모든 것을 해학과 풍자로 담아낸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 책의 홍보문구에서도 '해학과 풍자'가 잘 담겨있는 작품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한 만큼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에서는 그 동안 마크 트웨인의 해학과 풍자가 쏟아져 나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이 책을 재미있는 풍자와 해학이 담겨있다고 단정 짓기에는 의외로 담아내는 것이 많다.

물론 얼핏 보면 당시 상상하기 힘든 스토리와 풍자 및 해학으로 주목을 이끄는 것 같지만, 실상 들여다 보게 된 이 책에서는

그 외에도 당시 미국의 문제를 날카롭게 써내려갔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19세기에는 미국의 문화(문학도 물론 포함되는)가 영국과 같은 유럽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에 세계로 부터 인정을 받기란 어려웠다.

이에 대해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개성을 살려 날카롭게 숨은 뜻을 감추고 '해학과 풍자'로 뜻을 담아낸 작품이 아닐까 한다.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의 진정한 재미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알게되었을때 진정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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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송 이즈 유 The Song is You
아서 필립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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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The song is you> 라는 책을 받았을 때 어쩜 이렇게 제목을 잘 지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지나가는 길에서 듣는 음악, 내 이어폰을 타고 흐르는 음악, 채널을 돌리다가 접하게 되는 음악, 그 모든 음악에서는 나를 담고 있고 또 우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즐거운 자리에서 혹은 이별을 경험한 후 노래를 듣는 것으로 눈물을 흘리고 용기를 얻으며 상처를 치료한다.

세상은 점점 고독해지고 매일 수백 곡의 노래가 쏟아진다.

 그 중 내 가슴을 울리는 몇 곡은 아이팟으로 저장되어 이어폰을 타고 흘러 나를 '구원'한다.

대중가요일 뿐인 음악이 ‘구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일상을 가득 침범한 고통과 방황에 크나큰 위로를 해주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받지 못한 유일한 안식처가 내 이야기를 담고 있는 대중가요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는 생각보다 두꺼운 두께에 놀랐고 다음으로 저자인 아서 필립스의 이력에 놀랐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역배우로 재즈음악가로 연설문 대필가로 또 그 밖에도 실패한 사업가와 퀴즈쇼 우승자라는 다채로운 경험이 있는 화려한 경력의 작가라는 점이었다.

내가 몰랐던 아서 필립스의 책이 많다는 것과 그 책들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내가 <The song is you>에 거는 기대도 상당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대중음악을 통하여 소통하고 사랑하고 삶을 찾아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The song is you>는 섬세한 문체와 꼼꼼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인 책이었다.

주인공인 줄리언 도나휴는 잘나가는 광고 감독이지만 아들을 잃고 아내와 이혼을 하는 아픔을 겪고 매일 아이팟을 듣는 것으로 위로 받는 현대인 중 하나이다.

아이팟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은 단순한 음악이 아닌 그의 일부가 될 수 도 있고 전부가 될 수 도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가 즐겨듣는 음악은 빌리 할러데이지만 그 밖에도 많은 음악을 즐기는 것처럼.

우연히 들르게 된 클럽에서 케이트 오드와이어라는 보컬의 노래를 줄리언이 듣게 된다.

줄리언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노래에 빠져들어 그녀의 팬이 되어가 간간히 쪽지를 보내게 되고 케이트는 그런 그에게 빠지게 된다.

 

 

  사실 <The song is you>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쉬운 책이 아니었다.

많이 무거워 보이지 않았던 주제는 책을 파고들수록 물에 젖은 솜마냥 무거워 졌다.

작가 아서 필립스의 섬세함과 꼼꼼한 산문형식의 글이 이 이야기들을 조금은 어둡고 무겁게 만들었다.

또 <The song is you>에는 줄리언도 등장하지만 한국 전쟁에 참여했던 그의 아버지도 등장한다.

두 사람 모두 빌리 할리데이를 좋아하는데다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삶의 이야기로 인해 그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구분이 어려웠다.

(이러한 구도는 작가의 의도된 장치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마치 불편한 옷을 입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을 살짝만 비켜본다면 이 책은 나에게 고도의 집중력과 책을 완독하기 전까지는 손 떼기 힘들게 만든다.

단절되고 고립된 생활의 나날과 치밀한 주인공들의 내면심리를 다루기 위해서는 필수요건으로 작용한 작가의 문체와 글 흐름은 작가로써 역량을 보여주는 한편 이야기를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각박한 삶 속에서 상처 받는 현대인의 심리와 그 모습에 대한 묘사는 이 보다 더 꼼꼼하게 만들어 질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 이었으니 말이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숨 한번 크게 들이 쉬고 심리묘사나 상황묘사 등등을 이해한다면, 작가 아서 필립스가 세세하면서도 놓치기 어렵게 신경 써서 이 글을 써내려갔다는 느낌이 가득 베어 나오는 글이 아닌가 한다.

 

 

  <The song is you>는 각박한 현대인의 삶을 대중음악으로써 치유 또, 작가 아서 필립스의 역량을 느낄 수 있는 책이 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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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아이들 1 - 숨어사는 아이들 봄나무 문학선
마거릿 피터슨 해딕스 지음, 이혜선 옮김 / 봄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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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림자 아이들>에서는 전 세계가 고민하는 문제를 조금 가볍게 풀어 모든 이가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점점 늘어나는 인구와 한정된 자원을 모두 부족함 없이 이용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시발점으로 한다.

문제에 대하여 정부 관리들은 '한정된 자원을 내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이용하기위해서는 인구를 제한하여 한다.'라는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림자 아이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정부가 나서서 한가족당 자녀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셋째 아이의 출생을 금지된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이 가꾸는 가축 및 농작물까지도 일일이 개입한다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될 것 인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림자 아이들>은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한다.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인구를 염려하여 한가정당 한 자녀 두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고, 시골에서는 간혹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고 들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이미 우리 곁에서는 이 비슷한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다.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림자 아이들>- 숨어사는 아이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림자 아이들>의 주인공은 루크이며 루크가 바로 정부가 금지하는 셋째아이다.

셋째 아이들은 태어났다고 출생신고를 해서도 안 되며 만약 존재가 인구 경찰에게 발각되는 즉시 그 날로 바로 어디에 끌려가 결국 죽게 되는 아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셋째아이들은 학교는 물론이고, 어디라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없다.



루크가 어렸을 때는 집이 숲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형들과 밖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일손을 돕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숲을 허물고 배런들을 위한 새로 짓는 아파트로 인해 더 이상 루크는 밖은 물론이고 창문으로 비치는 모습까지도 걱정되어 가족들과 함께 식사조차 할 수 없었다.

결단코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수 없는 루크는 매일 창밖으로 아파트만 바라보다 그 아파트에서 또 다른 셋째 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큰 용기를 내어 또 다른 셋째 아이 '젠'을 만나게 된다.







p110

"그게 다 식량 때문이야. 정부는, 인구가 계속 늘면 식량이 바닥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

그래서 정부가 너랑 나를 불법 출생자로 만든 거야. 사람들을 굶지 않게 하려고"

"내가 안 먹으면 다른 합법 출생자가 굶지 않는단 말이구나."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식량은 충분하지만 분배가 제대로 안 되는 것뿐이래. 그게 바로 정부가 인권 시행을 중단해야 하는 이유야. 또 정부가 너랑 나를 비롯해 모든 그림자 아이들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고……"





루크를 포함한 루크의 가족들은 (일반 국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 정부가 제시한 인구정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정책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어쨌든 이 과정에서 루크는 그동안 몰랐던 인구정책의 부당함과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혼란을 겪게 된다.

젠을 통하여 자신이 알지 못하였던 새로운 세상을 배우게 되고 또 그 것들에 대해 무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리고 싶어 한다.

젠은 이 모든 것을 위해 집회를 열고 다 함께 주장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p158

"하지만 넌 돌아올 거잖아. 내일.... 아니면 모레....집회가 끝난 다음에 말이야 ……"







루크는 결국 젠을 따라 집회에 가지 않았지만, 사실 젠도 루크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집회는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살아 돌아 올 수도 없다는 것을.

집회의 실패와 더불어 젠의 죽음을 통하여 루크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젠이 말한 새로운 세상이 열려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그림자 아이들>의 부제인 숨어사는 아이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앞으로 더 큰 여정이 루크를 기다리고 있을 것 이고 이 과정을 루크는 헤엄쳐 나가게 될 것 이다.

얇은 두께만큼이나 가볍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은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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