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지음, 유영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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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셰익스피어나 독일의 괴테를 떠올리게 하는 세계적인 대문호 인도의 타고르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인도의 힌두이즘 전통과 영국의 식민통치를 통한 서구의 근대정신이 만나 피운 꽃인지도 모른다. 브라만 계급이지만 카스트의 폐해를 인식하고, 민족적 자존심에 머물지 않고 인류 보편의 인류애를 주창했기 때문에 인도 국민과 세계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타고르가 높이 든 인도 개혁과 인류애의 실천이라는 횃불은 여전히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다. 그만큼 이루기 힘든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현재성을 가진 그의 시와 소설은 현대적이진 않지만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의 원천은 고전에 뿌리를 두면서도 시적이고 창조적인 타고르만의 언어와 사상에 있는 걸까. 아무튼 인도는 타고르가 있다는 사실이 부럽다. 우리도 분명 그런 시성이 있거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정체성에 뿌리내린 인류의 유산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 동방의 이 작은 나라에서 그 일을 해낸다면 매우 뜻있을 것이다.

소설 <고라>는 종교가 사회 제도화되어 있는 인도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힌두교 정통파 사회와 브라만 혁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의 갈등은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방불케 한다. 두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경원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웃으로 이사 온 파레슈 노인의 가족으로 인해 마을에는 일대 파문이 인다. 우연히 친절을 베풀면서 브라만 교회의 일원인 이 가족의 친구가 된 비노이와 고라는 그 집의 딸들인 스차리타와 롤리타를 만나게 되면서 힌두교 정통파인 두 사람의 사고방식에 큰 변화가 온다. 파레슈 노인으로부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교육을 받은 두 딸을 통해 여자라는 존재를 거의 처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인도의 자주 독립을 위해 힌두교 정통을 신봉하고 있는 비노이와 고라는 이제 인도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는 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고의 일대 전환을 하게 된다. 고라의 열렬한 정통 신봉에 처음에는 반감을 갖고 어리둥절하던 스차리타와 롤리타도 그의 인격에 감화를 받고 차츰 힌두교의 참뜻에 마음을 열게 된다. 그들이 서로 반목하는 두 사회의 편견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맺어지게 된 뒤에는 파레슈 노인과 고라의 어머니 아난다모이라는 열린 마음을 가진 두 어른의 남다른 양육과 응원이 있었다. 사실 고라는 아일랜드인 부모의 아이로 브라만 계급이 결코 될 수 없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인도를 그토록 사랑하는 고라가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고라는 오히려 (브라만으로서 정죄식을 치룸으로써가 아니라) 이제야말로 진짜 힌두가 되었다고 기뻐한다. 브라만이라는 자신의 계급으로 인해 늘 민중과 진정한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던 고라는 스차리타가 그토록 사랑하는 (수양)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벗인 파레슈 노인을 찾아가 그의 기도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파레슈 노인과 아난다모이는 인간을 인간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사랑하는 종교의 참뜻을 실천하는 어른들이고 개인의 자유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근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진정한 근대인들로서 정통파와 브라만파를 통합할 수 있는 모델로 타고르가 제시한 것 같다.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고 오직 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고자 하는 파레슈 노인의 기도 시간에는 스차리타가 함께 한다. 그의 명상과 기도 속에 깃든 평온은 주변으로 확산되어 인도의 미래를 비추어준다. 아마도 타고르가 평생 추구했던 것도 바로 그런 평화일 것이다. 소리높여 주장하지 않아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조용한 혁명. 고요와 평온이야말로 요즘 시대에도 미래에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흥분과 열정을 가라앉히고 전체를 볼 수 있을 때 행동하는 지혜를 보여주는 파레슈 노인과 모든 이를 품는 어머니의 자비로움으로 어떤 장애도 견뎌내는 사랑을 보여주는 아난다모이는 인류의 영원한 이상적 인간상일 것이다.

"나는 네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감정에 반대하는 말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구나. 기도로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심에 있는 정의의 표준과 영원한 진리의 빛에 비춰보면 무슨 일이든 차차 뚜렷해지는 법이다. 모든 것 위에 서 있는, 보다 위대한 신을 국토나 인간보다 낮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너를 위해서도 소용없을뿐더러 또 나라를 위해서도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일이다. 나는 방황하는 일 없이 신께 내 마음을 송두리째 바치고 만족하고 있다—그것이 나라를 위해서나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참된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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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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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4-0807

소포클레스가 그린 인간의 본질은 본성에 있다고 한다. 그가 아흔의 나이에 쓴 마지막 작품 <필록테테스>를 보면 아킬레우스의 아들인 네옵톨레모스가 본성이 다른 오뒷세우스를 따르다가 결국 본성이 같은 필록테테스와의 우정으로 기우는 내면적 변화가 인상적이다. 결국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게다가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오이디푸스는 제 손으로 제 눈을 찌르기도 하고,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는 결국 어머니를 살해하고, 안티고네는 자살하고, 필록테테스와 네옵톨레모스는 헤라클레스의 등장에 의해 겨우 파국을 면한다. ‘모 아니면 도식의 직진형 인간들인 셈이다.

소포클레스의 인간들은 결코 운명을 회피하지도 순응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운명에 맞섰던 오이디푸스는 결국 운명의 올가미에 걸려들었음을 알고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운명의 일격에 당한 피해자이며 부친을 살해한 자신의 행동은 정당방위였다며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한다. 게다가 자신을 헌신적으로 부양하는 딸들이야말로 아들이나 마찬가지라며 자신을 추방하다시피한 아들들에게는 저주를 퍼부으며 죽는다. 귀족적인 본성이란 결코 자신이 당한 수치와 원한을 잊지 않고 명예를 지키고 복수하는 데 목숨을 거는 건가 보다.

호메로스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는 듯한 이 고전적인 작가의 작품들은 만만찮은 인물들의 불꽃 튀는 대결이 압권인데, 말로는 설득할 수 없는 그들의 본성과 본성의 대결이 평행선을 그리며 비극적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말할 수 없는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고통조차 인간으로서 짊어져야 할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영웅적 인간들은 짐승과 인간의 경계에서 여전히 고민하고 방황하고 죽고 죽이는 오늘날의 인간들에게도 여전히 영웅적이고 그래서 지극히 인간적이다. 짐승으로 살 것인가, 인간으로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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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탄잘리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지음, 류시화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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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깊은 위로가 되어 준 시편들이었다. 슬플 때 슬픈 노래에서 위안을 얻듯이. 시를 모르지만 타고르의 시는 가슴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노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상상하는 시인의 마음은 종교적인 명상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종교성이 강하다고 해서 이 시의 문학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보편적인 내용이라 인상적이진 않더라도 그만큼 공감대가 넓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인 서정이라기보다 인류 보편의 무의식을 탐구한 힌두교의 전통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든다.

32
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온갖 방법으로 나를 단단히 묶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보다 더 큰 당신의 사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를 자유롭게 놓아 둡니다.
내가 자신들을 잊을까 염려해 사람들은 나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또 지나도 당신은 내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내 기도 속에서 당신을 부르지 않아도, 내 마음속에 당신이 있지 않아도,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여전히 나의 사랑을 기다립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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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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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0613

호메로스 서사시를 읽었기 때문인지 비극의 내용이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다. 그리스 신화나 전설에 익숙해지고 있다. 주석을 같이 보면 흐름이 좀 끊어지기 때문에 먼저 본문을 한번 읽고 나서 주석만 따로 읽고 마지막으로 본문을 한 번 더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역시 단테나 셰익스피어가 저절로 나온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서양 문학을 읽어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관문 같다.

문학의 세계는 얼마나 넓은 걸까.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상을 해석한 신화와 신화에 바탕을 둔 서사시와 서사시에 바탕을 둔 비극 등으로 이어지는 문학의 역사를 통해 인문학적 해석의 전통은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비극에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자긍심과 함께 몰락의 전조도 있을 것이다. 제국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의 찬란했던 한순간이 담겨 있는 셈이다.

문학은 문제의 답이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각자의 생각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집단의 생각이 각자의 삶을 규정하기도 한다. 문학은 다양한 각자의 생각과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그 사회가 나아갈 좀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 옛날 신화와 전설을 구전으로 전하며 그랬듯이 말이다.

플라톤이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을 옹호한 인물일 것이다. 그는 비극이 작중 인물의 첨예한 갈등과 극적인 사건의 플롯을 통해 관객이 진실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플라톤이 수학자라면 수학의 근본인 수와 문학은 서로 배척하는 관계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자에 가까웠기 때문에 생물학의 근본인 생명과 문학은 서로 가까울 수밖에 없을까. 수가 지배하는 요즘 세상에 문학이 설자리가 있을까. 생명이 있는 한 인간은 문학을 버릴 수 없을까.

꿈꾸는 기계와도 같은 인간은 세상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기계는 꿈꾸지 않고 꿈은 기계가 아니다. 언젠가 먼 훗날 더 이상 꿈꾸지 않는 기계가 된다면 문학은 영원히 사라지겠지만 기계가 되느니 꿈을 선택한다면 문학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이 원한을 품고 하는 말은
무서운 법이니, 백성들의 입에서 나온
저주는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이라네. - P47

이제 할 말을 충분히 했다면, 이 사람들더러 양심에 따라
정의의 투표석을 가져오라고 할까요? - P179

하지만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남자들의 위력에
예속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사랑 없는 결혼을 피해
별나라 밖으로까지 도망가서라도 구원을 찾을 거예요.
그대는 신들에 대한 경외심을 전우로 삼아,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세요. - P313

하지만 잘 알아두게. 나는 내 이 불행을
자네 종살이와는 결코 바꾸고 싶지 않네. - P386

그가 전하기 전에 이미 나는 전언을
알고 있었소. 서로 미워할 경우 적의 손에
고통당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오. - P388

인간은 행동함으로써 죄를 짓게 되고, 죄는 고통스런 벌을 수반하게 되고, 고통은 인간을 지혜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죄와 벌과 지혜의 인과관계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인간이 죄를 짓고자 할 때 기꺼이 협조해주는 신이라는 독특한 발상과 만나게 된다. -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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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0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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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작가는 <혼불>을 완성하지 못하고 작고했다. 아쉬움이 크지만 10권을 읽으면 앞으로의 전개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과연 한민족은 누구이며 한민족의 꿈은 무엇인가를 천착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답은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꿈을 저버리지 않는 한 불멸할 수 있다. 그 생명의 꽃심은 하찮아서 장하다’. 그 하찮아서 장한 꽃심을 지닌 들풀같이 질기고 천한 백성이 지키고 싶은 나라, 꿈꾸는 나라, 망해도 망하지 않는 나라, 진정 강한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10권에서 드디어 강실과 강모를 예수와 베드로에 비유하면서 큰 비약을 이룬다. 죄없이 못박힌 예수와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 죄없이 고통받는 강실과 강실을 버린 강모. 그런 사태의 주범은 유대 사회를 속박한 유대 율법의 가차없음과 같이 조선 사회를 속박한 유교 윤리의 가차없음이다. 유교적 질서가 어느새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이자 도구로 전락한 조선은 결국 외세에 짓밟히고 미친 개와 같은 일제의 수탈을 당하며 몸과 마음이 갈갈이 찢어지고 있다. 시체들이 널려있는 만주 벌판을 유랑하는 조선인들의 비참한 참극은 형용하기 어렵다.

만주에서 강모는 베드로가 될 것인가, 빌라도가 될 것인가, 갈림길에 서 있다. 매안에서 온 부서방네 아이 둘의 죽음을 목격한 강모는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 생존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성찰에 이른다. 매안에서 효원은 강실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현실 앞에서 마침내 마음 속의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살아만 있기를 기도한다. 강실을 버린 강모와 효원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기존의 질서에 맞설 수 있는 도덕적 자각과 각성이 싹튼 것이다. 동경 유학생 강호와 사회주의자 강태 역시 유교의 틀에서 벗어나 생명의 씨앗과도 같은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청암부인의 품 안에서 자라난 이씨 문중의 손자 손녀 손부들이 유교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일어선 청암부인과 같이 스스로의 자각에 의한 주체적 변화와 성장이기 때문이다. 청암부인이 준 쌀 한 가마니는 부서방에게도 주어진 조건에서 벗어나 만주 땅에서 스스로 살아볼 큰맘을 일으켰다. 민족의 자취를 찾아 만주까지 온 심진학 선생 역시 식민지 청년들의 등불이다.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예수의 말대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 가장 약한 자가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나라. 예수가 꿈꾼 그 나라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 나라는 개인의 양심과 윤리를 보호하는 나라일 것이다.

혼불의 대미는 효원의 간절한 부름으로 끝난다. 효원의 행동하는 양심이야말로 청암부인의 혼불일 것이다. 모두 한 할머니의 자손인데, 왜 서로 미워하는가. 오직 모든 생명을 귀하게 아끼고 아낄 뿐이다.

이제……부디……그대가 살아서, 나를 용서해 주오.
효원은, 강실이의 목숨만이 자신의 생애를 건져 줄 수 있을 것 같아, 한없이 까라지려는 몸을 추스르며, 강실이 얼굴을 부른다.
강실이가 비록 누항의 시궁창 그 어떤 질곡에 빠져, 말로 못할 더러움을 겪고 있다 하여도, 그네가 온전한 몸으로 살아만 있다면, 효원은 이 무서운 죄책에서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에……어디에 있소…….
효원은 등을 구부리고 기도하듯 강실이를 부른다.
그 온몸에 눈물이 차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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