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내편 - 개정판 세상을 움직이는 책 19
장자 지음, 박일봉 엮음 / 육문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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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240910

장자 원문을 읽으면서 참고한 책들 가운데 완독한 책 중 한 권이다. 분량이 상당하고 그만큼 내용이 충실한 편이다. 더 훌륭한 책들도 많겠지만, 일본 학계의 분위기를 엿본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는 책 같다. ··일의 미묘하게 다른 해석의 차이를 맛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장자 사유의 핵심은 인지, 인지, 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장자의 자유가 노닒에 있다고 한다면, 그 노니는 경지는 적당한 거리두기에 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편애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인데, 주와 객을 구별 짓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비우고 타자가 되는 태도이기도 하다. 외편과 잡편을 읽으면서 계속 참조하며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장자가 두고두고 읽히는 이유는 신화적인 이야기와 인물과 사건이 있는 우화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강렬하게 이미지로 각인되는 이야기의 여운은 기억 속에서 계속 변주된다. 간결하고 애매모호한 이야기는 경계가 흐릿하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꾸는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듯이. 모든 것을 낳은 혼돈을 죽인 것은 그 자식들이다. 이 비극적인 상황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외편과 잡편을 읽어보자.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열자는 그때까지의 수업은 전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과 같다고 생각하여 집에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3년 동안 한 발짝도 집밖에 나오지 않고 오로지 사색에 몰입하였다. 모든 겉치레를 버리고 아내를 위해 불을 때기도 하고 돼지를 기르는 것도 마치 사람을 기르듯 하며 어떤 물사만을 특별히 마음 쓰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모든 인위적 허식을 본디의 소박함에 되돌려, 어떤 일에도 번뇌하지 않는 위대함을 지니고 그 타고난 모습 그대로 독립하였다. 참으로 위대하도다! 열자는 오로지 도를 지키며 세상을 마쳤던 것이다. - P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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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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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을 예전에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새롭고 낯설고 기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소설 특유의 서술 방식 때문인 것 같다. 분명히 일인칭 관점의 소설인데 화자의 감정이나 생각을 잘 알 수 없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건조하고 생경하게 느껴지는 뫼르소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뫼르소가 주변인들에게 다정하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며 주변인들 역시 뫼르소가 과묵하지만 친절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 뫼르소가 어떻게 살인을 한 것일까. 아니 그의 우발적 살인은 어떻게 명백히 고의적이고 비인도적인 살인으로 둔갑했을까. 그거야말로 중대한 문제 아닐까. 그 문제의 원인이 과연 뫼르소에게 있을까, 아니면 사법 체계에 있을까. 이미 독자는 화자가 사형 선고를 받을 범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화자가 잘못된 판결마저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은 크나큰 정념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수수께끼 혹은 진실에 도달하게 한다.

그 개인은 단지 정직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죽을 것이며, 바로 그 점에서 사형은 자살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이 때의 자살은 죽음보다는 삶에 가깝다. 삶의 방식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뫼로소의 생애는 외형적으로 사형으로 마감되겠지만 그런 마감을 자초한 것은 그의 삶의 방식이고 그런 삶의 방식은 사형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화가 되어 부활할 것이다.

항고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사형 선고를 받은 뫼르소를 찾아온 사제는 항고의 조건은 오직 구원자의 얼굴을 바라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뫼르소는 오직 자신에게 남아 있는 삶의 시간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것만이 진실이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진리를 붙들고 있는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마침내 해방된 엄마의 죽음을 아무도 슬퍼할 권리가 없듯이, 마침내 감옥과 사형으로부터도 해방된 뫼르소를 위해 사제는 필요 없다. 자신이 자신의 사제가 되어 그는 단두대에 설 것이다. 그리고 증오의 함성으로 그를 맞아 줄 사람들이 많으면 덜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잠든 그 여름의 그 신기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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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지음, 유영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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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셰익스피어나 독일의 괴테를 떠올리게 하는 세계적인 대문호 인도의 타고르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인도의 힌두이즘 전통과 영국의 식민통치를 통한 서구의 근대정신이 만나 피운 꽃인지도 모른다. 브라만 계급이지만 카스트의 폐해를 인식하고, 민족적 자존심에 머물지 않고 인류 보편의 인류애를 주창했기 때문에 인도 국민과 세계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타고르가 높이 든 인도 개혁과 인류애의 실천이라는 횃불은 여전히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다. 그만큼 이루기 힘든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현재성을 가진 그의 시와 소설은 현대적이진 않지만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의 원천은 고전에 뿌리를 두면서도 시적이고 창조적인 타고르만의 언어와 사상에 있는 걸까. 아무튼 인도는 타고르가 있다는 사실이 부럽다. 우리도 분명 그런 시성이 있거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정체성에 뿌리내린 인류의 유산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 동방의 이 작은 나라에서 그 일을 해낸다면 매우 뜻있을 것이다.

소설 <고라>는 종교가 사회 제도화되어 있는 인도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힌두교 정통파 사회와 브라만 혁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의 갈등은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방불케 한다. 두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경원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웃으로 이사 온 파레슈 노인의 가족으로 인해 마을에는 일대 파문이 인다. 우연히 친절을 베풀면서 브라만 교회의 일원인 이 가족의 친구가 된 비노이와 고라는 그 집의 딸들인 스차리타와 롤리타를 만나게 되면서 힌두교 정통파인 두 사람의 사고방식에 큰 변화가 온다. 파레슈 노인으로부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교육을 받은 두 딸을 통해 여자라는 존재를 거의 처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인도의 자주 독립을 위해 힌두교 정통을 신봉하고 있는 비노이와 고라는 이제 인도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는 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고의 일대 전환을 하게 된다. 고라의 열렬한 정통 신봉에 처음에는 반감을 갖고 어리둥절하던 스차리타와 롤리타도 그의 인격에 감화를 받고 차츰 힌두교의 참뜻에 마음을 열게 된다. 그들이 서로 반목하는 두 사회의 편견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맺어지게 된 뒤에는 파레슈 노인과 고라의 어머니 아난다모이라는 열린 마음을 가진 두 어른의 남다른 양육과 응원이 있었다. 사실 고라는 아일랜드인 부모의 아이로 브라만 계급이 결코 될 수 없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인도를 그토록 사랑하는 고라가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고라는 오히려 (브라만으로서 정죄식을 치룸으로써가 아니라) 이제야말로 진짜 힌두가 되었다고 기뻐한다. 브라만이라는 자신의 계급으로 인해 늘 민중과 진정한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던 고라는 스차리타가 그토록 사랑하는 (수양)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벗인 파레슈 노인을 찾아가 그의 기도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파레슈 노인과 아난다모이는 인간을 인간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사랑하는 종교의 참뜻을 실천하는 어른들이고 개인의 자유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근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진정한 근대인들로서 정통파와 브라만파를 통합할 수 있는 모델로 타고르가 제시한 것 같다.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고 오직 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고자 하는 파레슈 노인의 기도 시간에는 스차리타가 함께 한다. 그의 명상과 기도 속에 깃든 평온은 주변으로 확산되어 인도의 미래를 비추어준다. 아마도 타고르가 평생 추구했던 것도 바로 그런 평화일 것이다. 소리높여 주장하지 않아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조용한 혁명. 고요와 평온이야말로 요즘 시대에도 미래에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흥분과 열정을 가라앉히고 전체를 볼 수 있을 때 행동하는 지혜를 보여주는 파레슈 노인과 모든 이를 품는 어머니의 자비로움으로 어떤 장애도 견뎌내는 사랑을 보여주는 아난다모이는 인류의 영원한 이상적 인간상일 것이다.

"나는 네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감정에 반대하는 말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구나. 기도로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심에 있는 정의의 표준과 영원한 진리의 빛에 비춰보면 무슨 일이든 차차 뚜렷해지는 법이다. 모든 것 위에 서 있는, 보다 위대한 신을 국토나 인간보다 낮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너를 위해서도 소용없을뿐더러 또 나라를 위해서도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일이다. 나는 방황하는 일 없이 신께 내 마음을 송두리째 바치고 만족하고 있다—그것이 나라를 위해서나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참된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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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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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4-0807

소포클레스가 그린 인간의 본질은 본성에 있다고 한다. 그가 아흔의 나이에 쓴 마지막 작품 <필록테테스>를 보면 아킬레우스의 아들인 네옵톨레모스가 본성이 다른 오뒷세우스를 따르다가 결국 본성이 같은 필록테테스와의 우정으로 기우는 내면적 변화가 인상적이다. 결국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게다가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오이디푸스는 제 손으로 제 눈을 찌르기도 하고,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는 결국 어머니를 살해하고, 안티고네는 자살하고, 필록테테스와 네옵톨레모스는 헤라클레스의 등장에 의해 겨우 파국을 면한다. ‘모 아니면 도식의 직진형 인간들인 셈이다.

소포클레스의 인간들은 결코 운명을 회피하지도 순응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운명에 맞섰던 오이디푸스는 결국 운명의 올가미에 걸려들었음을 알고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운명의 일격에 당한 피해자이며 부친을 살해한 자신의 행동은 정당방위였다며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한다. 게다가 자신을 헌신적으로 부양하는 딸들이야말로 아들이나 마찬가지라며 자신을 추방하다시피한 아들들에게는 저주를 퍼부으며 죽는다. 귀족적인 본성이란 결코 자신이 당한 수치와 원한을 잊지 않고 명예를 지키고 복수하는 데 목숨을 거는 건가 보다.

호메로스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는 듯한 이 고전적인 작가의 작품들은 만만찮은 인물들의 불꽃 튀는 대결이 압권인데, 말로는 설득할 수 없는 그들의 본성과 본성의 대결이 평행선을 그리며 비극적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말할 수 없는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고통조차 인간으로서 짊어져야 할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영웅적 인간들은 짐승과 인간의 경계에서 여전히 고민하고 방황하고 죽고 죽이는 오늘날의 인간들에게도 여전히 영웅적이고 그래서 지극히 인간적이다. 짐승으로 살 것인가, 인간으로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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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탄잘리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지음, 류시화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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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깊은 위로가 되어 준 시편들이었다. 슬플 때 슬픈 노래에서 위안을 얻듯이. 시를 모르지만 타고르의 시는 가슴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노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상상하는 시인의 마음은 종교적인 명상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종교성이 강하다고 해서 이 시의 문학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보편적인 내용이라 인상적이진 않더라도 그만큼 공감대가 넓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인 서정이라기보다 인류 보편의 무의식을 탐구한 힌두교의 전통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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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온갖 방법으로 나를 단단히 묶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보다 더 큰 당신의 사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를 자유롭게 놓아 둡니다.
내가 자신들을 잊을까 염려해 사람들은 나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또 지나도 당신은 내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내 기도 속에서 당신을 부르지 않아도, 내 마음속에 당신이 있지 않아도,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여전히 나의 사랑을 기다립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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