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대체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이 많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런 엉뚱한 마음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특히 그러한 사람이 대다수의 의견에 반대되는 행동을 기꺼이 하려고 하는 것은 그가 이웃의 찬성에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상의 인습을 타파하는 것이 곧 그 자신의 인습이 될 때, 세상의 이목(耳目)에 인습을 타파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쯤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경우 그러한 행위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자존심을 부여해준다. 따라서 위험이라는 불편을 의식하지 않고서도 용기라는 자기 만족을얻게 된다. 타인의 칭찬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아마 문명인의 가장뿌리 깊은 본능일 것이다. 때문에 격분한 사회의 도덕적 화살이나 공격에 자신을 노출시킬 만큼 대담하게 인습을 타파하려는 사람일수록사실은 체면이라는 껍질을 쓰기 위해 가장 먼저 서두를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世間)의 평판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고 큰소리치는 인간일수록 나는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허세에 불과하다. 그들이 자기들의 조그만 실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비난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다만 아무도 그들의실수를 모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 P83

"여자들 마음이란 딱하기 그지없군! 사랑, 언제나 사랑뿐이야, 왜남자가 떠나면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 당신은 내가 한 여자를 위해 바쳐온 일을 다른 여인을 위해 또 다시 재현할 만큼 어리석은 인간으로 보이나?" - P72

맥앤드루 부인은 남자들이란 언제나 자기에게 애정을 품고 대하는 여자를 버리는 잔인한 습성이 있는데, 그러한 처지에서 남자가 여자를 버렸다면 그 점에 대한 책임은 여자 쪽에 있다는, 여성들의 공통적인 견해를 공유하고 있었다(감정은 이성과도 관계 없는 특별한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P91

고생이 사람의 인격을 고상하게 만들어준다는 말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행복이 그렇게 만들 가능성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고생은 흔히 사람을 옹졸하고 표독스럽게 만든다. - P100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험담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 나로서는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그 부인의 비통한 가슴속에 들끓고 있는 버림받은 사랑에 대한 고뇌는 상처받은 허영심으로부터 오는 고통—— 내마음에 천한 것으로 느껴지는——과 뒤섞인 게 아닌가 하는 의혹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나는 아직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성실성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위선이 들어 있고, 고상함 속에 얼마나많은 비열함이, 그리고 패륜(悖倫) 속에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내재해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던 것이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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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남성 독자를 울리는 일은 쉽지 않다. 쉽게 울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애써 거부하지 않으면 그냥 조용히 눈가가 촉촉해지는 일이 그래도 가끔 드물게 일어난다.
소설을 읽으면서 사람의 인생이란 어느 것 하나 무탈하고 소소한 것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화자가 만나는 소설 속 인물들의 사정과 내면은 하나같이 복잡하고 기구하다. 그래도 그들 모두, 우리 모두 소설의 제목처럼 ‘단순한 진심’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주에게 연희의 모습은 절대 닮고 싶지 않은 노년의 모습이었지만 복희와 노파를 통해 다시 실감하게 된 연희의 인생은 끔찍하게 외롭고 절망적이진 않다. 연희는 복희가 누구보다 애타게 그리워하는 한 여인이자 노파에게는 질투심 날 정도로 가지고 싶은 이 생의 연(連)이 남겨져 있는 유의미한 삶 자체이다. 소설의 절정에 다다를수록 문주의 이야기보다는 연희의 이야기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시대의 비극을 관통해버린 여성들의 삶과 비극의 잔재를 물려 받아 살아온 다음 세대들이 조우하여 상처를 굳게 다져가는 치유의 드라마다.
흉터는 맨살보다 굳기 마련이다.
누군가 짊어지고 있는 당신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으며, 그 인생의 무게 앞에 누구도 가치 없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며, 살아가면서 잃어버리기 쉬운 인간애를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노년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관성이 되어 버린 외로움과 세상을향한 차가운 분노, 그런 것을 꾸부정하게 굽은 몸과 탁한 빛의얼굴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모습.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타인을 보며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나의 미래를 연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 P43

그러나 죄를 모른다는 건, 그 순진함 때문에 언제라도 더큰 악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P49

일단 자고 싶었다. 깊은 잠을 자고 나면나쁜 기억은 모조리 투명한 체에 걸러져 무의식의 영역으로흘러갈 것만 같았다. 이상했다. - P77

무력한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 신 앞에서는 공허한 협박이 되고 마는 고통의 몸짓들…… - P87

그녀의 말은 내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환기시켜 주긴 했다. 바로복희가 내 삶에 개입한 배우라면 내게도 복희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보호, 그건 앙리와 리사, 그리고 정우식 기관사가 내게 취한 태도이자 행동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하나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삶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 P130

그때 나는 추연희라는 한 인간이 이 세계에서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소멸되길 모두가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떨칠 수 없었다. 피를 식게 하는 생각이었다. - P200

자신의 엄마가 어떻게 불렸는지, 어떤 대우를 받았고 어떤식으로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을 때 백복희의 아픔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부류의 아픔이……. - P217

성대가 아니라 마음에서 형성되었을 그 목소리는, 그러나아주 조금은 떨렸다. - P218

중국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난 뒤, 나는 백복희를 시청역 근처에 있는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시청역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백복희를 유심히 쳐다보는 몇몇 사람들의 시선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백복희가 동의하거나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그 태생의 기원에 배타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는 무심한폭력의 시선이었다. 백복희는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는 듯자주 피로한 얼굴로 벽 쪽에 붙어 서곤 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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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싱의 후기 단편들을 먼저 접하고 나서 느낀 점은 레싱의 작품은 조금 난해한 기분을 가져다주는 소설이라는 거였다. 때문에 그녀의 장편을 읽는다는 것은 좀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그렇게 막연한 마음으로 시작한 소설이었는데 1장에서부터 소설의 결말을 보여주며 궁금증을 자아내어 사건에 빠져들게 하더니, 그 몰입감을 타고 작품에 열광하면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이 장편이 그녀의 데뷔작이라니, 글을 쓰는 능력은 타고났나 보다.

메리와 모세의 성적인 상황을 상상하게 하는 글의 분위기가 아주 절묘하게 갈등관계에 가려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뒷면 해설에서 관련된 함축된 의미의 설명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어서 끝내 혼자만의 의문으로 남고 말았다. 토니의 의심도 둘 간의 정사를 암시하고, 모세에게 살인의 충동까지 일게 할 동기가 메리와의 치정말고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는 듯 하다.

메리가 농장에서 표독스럽게 남발하는 권력을 통해 희열을 느끼는 것을 보며 군림하는 자세에 대한 (나 자신의) 성찰해보는 계기도 있었다. 사소하지만 각자 자신들에게 쥐어져 있는 요망한 권력을 행사하며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있다는 만족감의 실체를 메리를 통해 제3자의 입장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어 불편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큰 주제와 관련된 일이겠지만 인종의 문제, 성별의 문제, 계급의 문제에서 연장되어 작금의 계약관계에서 재현되고 있는 인간의 더러운 본성을 항상 억눌러야 한다는 의무감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소설은 부끄러워해야 할 과거사들을 총망라한다. 식민지, 인종차별, 성차별, 조금 더 큰 맥락에서는 멀어져 보이지만 천박한 자본주의와 자연파괴, 더불어 이제는 새롭지도 않은 가부장들의 지리멸렬한 군상까지 고발하는 주제들. 기억하고 반성해야 할 역사들이 기록되어 있고 재미까지 갖추고 있는 문학작품을 읽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옆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아무리 평범하고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여인일지라도 조명을 받으면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리처드는 그녀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해야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는 상황이달라졌던 것이다. 그날 밤에 그녀 곁을 떠나며 곧 다시 만나러오겠다고 작별 인사를 할 때도 리처드는 섭섭한 마음을 금할길이 없었다. - P81

그녀는 원주민 우두머리를 통하지 않고 냉랭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직접말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무엇이 잘못되었고 자신의 처사가 왜합당한지에 대해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이 으레 그렇듯이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서 짤막하게 훈계하면서 말을 끝맺으려 했다. 그녀는 일 그 자체를사랑하여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받는 돈 따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도 일 그 자체를 위해서 일하게 될 때까지는 원주민의 생활이 나아질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그녀는 카피르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말했는데, 토속 부락에서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원주민들은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백인을오늘날과 같은 백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일에 대한 그러한 태도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백인이 일을 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신성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며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할때 인간의 가치가 나타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한 짤막한 훈계는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일부러 생각해서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흑인 하인들에게 훈계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 그때의 기억으로 별 어려움 없이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었다. - P199

한번은 전쟁에 관해서였다.
"부인은 곧 끝날 거라고 생각하나요?"
메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간지조차 읽지 않으면서모든 것과 단절된 채 지내는 그녀에게 전쟁은 다른 세상에서일어난 루머에 불과했다. 그러나 메리는 주방 탁자 위에 깔려있는 낡은 신문을 모세가 열심히 읽는 걸 여러 차례 보았다.
그녀는 딱딱하게 모르겠다고 대꾸했다. 그 후 며칠 뒤, 그는 줄곧 생각해 왔다는 듯 다시 질문을 해 왔다.
"예수는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걸 옳다고 생각했나요?"
이번에는 그 질문에 함축된 비난 때문에 화가 났다. 그래서예수는 착한 사람 편이라고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날하루 종일 예전처럼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으며, 마침내는 저녁 때 리처드에게 물어보았다.
"모세는 어디 출신이에요?"
"선교사 밑에 있었대. 그래도 제일 고상한 녀석이오."
남아프리카 백인들 대부분이 그렇듯 리처드도 교회 출신 원주민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우야 어떻든 깜둥이들한테 읽고 쓰는 걸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그저 노동의 신성함과 백인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라고만 가르쳐 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 P266

필요에 의해서건 선택에 의해서건 이웃 때문에 번거로움을겪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면 마음이 편치못하고 기분이 몹시 언짢은 법이다. 마치 잠을 자던 사람이 깨어나 보니 침대 주위에서 낯선 사람들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역의 주민이나 일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달나라에서 사는 셈이었던 리처드와 메리 부부가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근방 농부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신세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부부의 이름 정도만 알거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도슬래터 부부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치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들처럼 그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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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tine 2022-03-25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3번째 단락이 너무 좋네요. 저도 얼마 전 이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요, 마음속으로는 막연히 느끼겠는데 언어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던 것들이 님의 글을 읽으니 확 와닿네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나는 너와 헤어지는가 -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라는 환상에 대하여
켈리 마리아 코르더키 지음, 손영인 옮김 / 오아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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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애가 끝난 이유야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애정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정확히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그 실체를 알 수 없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불행했지만 이유를 딱 꼬집어 개선을 요구할 수없는 그 모호함은 점차 더는 무시할 수 없는 몸의 감각으로 쌓여갔다. 나는 내 행복의 가치를 인정하고,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여러 가지였고 헤어지고 나서 돌이켜봤을 때도 매우 합당하다고 여겨졌다. 그중 하나가 타이밍, 그러니까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영향이다. 내가 품은 나를 위한 꿈은 우리를 위한 꿈보다 크고, 시끄럽고, 강렬했다. 그 ‘우리‘에 전 애인이 포함되든, 앞으로 사귈지도 모르는 가상의 짝이 포함되든 간에 말이다. - P7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뿐만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언제부터 이리도 어려운 일이 됐을까. 무엇보다도나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물질적인 고민과 감정적 윤리가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에 갈렸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돈과 사랑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이 언제부터 무례한 일이 되어버렸을까. 마치 자신들의 공생 관계는 반지 위에 올라가는 다이아몬드의 크기와 무관하다는 듯이 말이다. - P12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 재정적 화합은 누군가와 사귀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돈을 제외한 다른 이유로만 결혼해야 한다는 걸 전제로 누가 돈 때문에 결혼‘했는지 아닌지를 추측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대부분은 실제로 돈 때문에 결혼한다. 적어도 돈은결혼하는 이유의 일부가 된다. 결혼이라는 계약은 애초부터 경제적 동맹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는 곳, 각종 청구서, 부 또는 가난을 공유하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정부에 신고해 결혼을 공식화하거나 변호사를 통해 이혼을 확정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 P44

게다가 섹스 문제도 있다. 미혼 여성이 남성의 육욕적인 덫에걸렸을 때 여성에게 도덕적 분노가 집중됐으며, 때로는 여성의인생이 끝장나기도 했다. 특히 아이가 생겼다면 그 무분별한 행동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 처한 여성 대부분은 종교 자선단체라는 허울 좋은 도피처나 미혼모 시설에 수용됨으로써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제거됐다. - P73

"이혼은 결혼의 적이 아닙니다. 간통, 난폭함, 음탕함이 결혼의적입니다. 이혼이 결혼의 적이라고 하는 것은 의학이 건강의 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P80

"농부는 해가 뜨면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일한다. 농부의 아내는 대개 해가 지고 난 후에도 일한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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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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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작가와 비슷한 시대의 교육과정을 같이 이수한 사람으로서 최은영 작가는 정말 제대로 배운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을 지난 시대의 비극과 이에 대한 고발과 함께 병치시킨다. 극단의 시대를 통렬하게 비난하는 좀 시대착오적이고 시시한 글쓰기가 아닌 우리 주변에 스며들어 버려 우리가 감내해야 하고 책임져야 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더 이상 자기합리화로 우리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쇼코의 미소가 대승적 차원에서 개개인의 고통을 이야기했다면 내게 무해한 사람은 소승적 차원에서 자기고백과 상처를 드러내며 치유하고 있는 듯하다. 전작에 비해 실망이라는 평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최은영작가의 시각은 다른 곳을 향했지만 우리 내면을 이해하고 감싸주려는 의도는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만족스럽다. 비슷한 세대를 같이 경험한 작가의 글이다 보니 추억이 돋아나는 장치들에 의해 지난날의 향수와 어리석었던 과거의 치부들이 뒤섞여 묘한 감정을 자아냈다.

여성편향적인 시각에 대한 논란은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을 듯하다. 소설이나 영화는 사실을 예술장르로 재탄생시키면서 자연스레 미화가 된다. 잔인한 서술조차도 작가의 필력으로 피어나는 문학성 덕에 결국엔 예술성을 띄는 작품이 된다. 잔인한 현실이 작품이 되는 아이러니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마주치는 잔인한 삶은 설마 저런 일이 있을까 싶고, 소수의 사례에 불과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제 우리는 소수의 불행을 덮어버리는 미개한 시절에서 비극과 부당한 일을 드러내 함께 공감하고 반성하는 시대로 발전해 가고 있다(이런 경우는 발전, 진보라는 말이 적합하다). 그리고 현실을 더 깊게 파고보면 최은영작가의 소설은 소수의 사례를 다룬 게 아니라 너무나 일상적으로 만연하게 퍼져있는 비극일 확률이 높다.

최근에 문학계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작가 중 하나로 인상깊게 남았다. 그 오만한 권력들이 글쓰는 사람을 화나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실감했길 바란다.

엄마는 겸손의 표시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딸을 번번이 깎아내렸다. 아줌마 앞에서 효진이를 칭찬할 때면 그 칭찬의 번제물로 나의 모자람을 바치곤 했다. - P67

가까운 친구 둘은 다른 지방으로 대학을 가서 자주 볼 수 없었고 대학에서는 마음을 붙일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 P112

하지만 모래는 자신의 환경을 조금도 과시하지 않았다. 지하상가에서 산 삼천원짜리 티셔츠를 입고 다녔고 편의점에서 파는 로션을 발랐다. 그런데도 그애는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태가 났다. 그애의 넉넉함은 물질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났다. 모래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전전긍긍하지않고 애쓰지 않았다. 관대했다. - P118

어린 나는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더 착한 아이가 되면, 훌륭한 아이가 되어 민폐 그 자체인 내 존재에 대한 빚을 갚을 수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모를 이해하려고노력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부모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를 그저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쉬운 일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가짜 이유라도 만들어서 믿고 싶었다.
공무의 글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나를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를 강요받고 있었다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 P121

나를 제외한 강사들은 삼십대 초중반이었고 처음부터 학원 강사가 꿈이었던 사람은 없었다. 강사들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대학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어떤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는지, 왜 요즘 대학생들은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지, 어째서 개인주의 문화가 판을 치게 되었는지.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대표라도 된 기분으로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러는 선생님들은 왜 입시 지향적인 사교육 현장에서 일하고 있느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피치 못할 선택을한 사람들에게 자신들 삶의 모순을 또박또박 말하는 건 잔인한 짓이될 테니. 그 시간들을 거치지 않은 인간으로서 그런 비판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을 테니까. - P161

너희와 있을 때는 나의 좋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나왔어. 그래서그런 착각도 했어. 나는 나아졌고,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되었다고. 너희들에게는 너희가 좋아할 만한 내 모습만 보여주고싶었어.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식으로 내가 나를 따돌렸던 것 같아. 너희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미워 보이고 창피했던 내 모습을 따돌렸어. 예전부터 그랬었어.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왜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못나 보였을까. 저리 가. 나는 그애에게 말했어. 내 눈에도, 남들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 왜 너는 죽지도 않아? 사라지지도 않고 그대로 내 안에 남아 있어? 그렇게 거칠게 나를 대하는게 어른이 되는 것인 줄 알고서. - P178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 P179

그들은 삼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혜인이 아는 한 그런 말을 했던사람 중에 삼촌보다 더 행복한 이는 없었으니까. 겪어보지 못한 일을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 - P222

사람들은 내가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철저히 계산적이며,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이상 낯선 사람을 결코 돕지 않는다고, 설사 도와준다 해도 그런 선의의 이면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다는 오만한 기쁨이 어려 있다고. 그 말은 아마많은 경우 사실일 것이다. 어쩌면 그도 나를 돕는 행동으로 자기만족을 얻었는지 모른다. - P246

난 항상 열심히 살았어.
하민은 종종 그 말을 했다. 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hard‘는 보통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말 아닌가. ‘hardworking‘ 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는 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하민이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기를 몰아붙이듯이 살았다는 것인지, 별다른 재미 없이 살았다는 것인지, 열심히 산다는 게 그녀에겐 올바르다는 가치의문제라는 것인지, 삶의 조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지 말이다. 그녀가 그 말을 할 때, 그래서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 P265

작가는 미주를 포함해 우리가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기만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 하는 방식을 들춰낸다. - P308

자신이 느끼는 안도와 행복의 풍경이 언제나 상대의 외로움과 아픔을 철저히 밀봉했을 때에야 가능한 것임을 선연하게 의식하는예민한 윤리, 이 서늘한 거리 감각이란 최은영 소설의 요체이자 매력이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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