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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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작가와 비슷한 시대의 교육과정을 같이 이수한 사람으로써 최은영 작가는 정말 제대로 배운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을 지난 시대의 비극과 이에 대한 고발을 병치시킨다. 극단의 시대를 통렬하게 비난하는 좀 시대착오적이고 시시한 글쓰기가 아닌 우리 주변에 스며들어 버려 우리가 감내해야 하고 책임져야 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더 이상 자기합리화로 우리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쇼코의 미소가 대승적 차원에서 개개인의 고통을 이야기했다면 내게 무해한 사람은 소승적 차원에서 자기고백과 상처를 드러내며 치유하고 있는 듯하다. 전작에 비해 실망이라는 평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최은영작가의 시각은 다른 곳을 향했지만 우리 내면을 이해하고 감싸주려는 시점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만족스럽다. 비슷한 세대를 같이 경험한 작가의 글이다 보니 추억이 돋아나는 장치들에 의해 지난날의 향수와 어리석었던 과거의 치부들이 뒤섞여 묘한 감정을 자아냈다.

여성편향적인 시각에 대한 논란은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소설이나 영화는 사실을 예술장르로 재탄생시키면서 자연스레 미화가 된다. 잔인한 서술조차도 작가의 필력으로 피어나는 문학성 덕에 결국엔 예술성을 띄는 작품이 된다. 잔인한 현실이 작품이 되는 아이러니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마주치는 잔인한 삶은 설마 저런 일이 있을까 싶고, 소수의 사례에 불과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제 우리는 소수의 불행을 덮어버리는 미개한 시절에서 비극과 부당한 일을 드러내 함께 공감하고 반성하는 시대로 발전해 가고 있다(이런 경우는 발전, 진보라는 말이 적합하다). 그리고 현실을 더 깊게 파고보면 최은영작가의 소설은 소수의 사례를 다룬게 아니라 너무나 일상적으로 만연하게 퍼져있는 비극일 확률이 높다.

최근에 문학계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작가 중 하나로 인상이 깊게 남았다. 그 오만한 권력들이 글쓰는 사람을 화나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실감했길 바란다.
계속 좋은 작가로 남아있길 바란다.

엄마는 겸손의 표시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딸을 번번이 깎아내렸다. 아줌마 앞에서 효진이를 칭찬할 때면 그 칭찬의 번제물로 나의 모자람을 바치곤 했다. - P67

가까운 친구 둘은 다른 지방으로 대학을 가서 자주 볼 수 없었고 대학에서는 마음을 붙일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 P112

하지만 모래는 자신의 환경을 조금도 과시하지 않았다. 지하상가에서 산 삼천원짜리 티셔츠를 입고 다녔고 편의점에서 파는 로션을 발랐다. 그런데도 그애는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태가 났다. 그애의 넉넉함은 물질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났다. 모래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전전긍긍하지않고 애쓰지 않았다. 관대했다. - P118

어린 나는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더 착한 아이가 되면, 훌륭한 아이가 되어 민폐 그 자체인 내 존재에 대한 빚을 갚을 수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모를 이해하려고노력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부모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를 그저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쉬운 일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가짜 이유라도 만들어서 믿고 싶었다.
공무의 글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나를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를 강요받고 있었다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 P121

나를 제외한 강사들은 삼십대 초중반이었고 처음부터 학원 강사가 꿈이었던 사람은 없었다. 강사들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대학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어떤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는지, 왜 요즘 대학생들은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지, 어째서 개인주의 문화가 판을 치게 되었는지.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대표라도 된 기분으로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러는 선생님들은 왜 입시 지향적인 사교육 현장에서 일하고 있느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피치 못할 선택을한 사람들에게 자신들 삶의 모순을 또박또박 말하는 건 잔인한 짓이될 테니. 그 시간들을 거치지 않은 인간으로서 그런 비판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을 테니까. - P161

너희와 있을 때는 나의 좋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나왔어. 그래서그런 착각도 했어. 나는 나아졌고,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되었다고. 너희들에게는 너희가 좋아할 만한 내 모습만 보여주고싶었어.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식으로 내가 나를 따돌렸던 것 같아. 너희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미워 보이고 창피했던 내 모습을 따돌렸어. 예전부터 그랬었어.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왜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못나 보였을까. 저리 가. 나는 그애에게 말했어. 내 눈에도, 남들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 왜 너는 죽지도 않아? 사라지지도 않고 그대로 내 안에 남아 있어? 그렇게 거칠게 나를 대하는게 어른이 되는 것인 줄 알고서. - P178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 P179

그들은 삼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혜인이 아는 한 그런 말을 했던사람 중에 삼촌보다 더 행복한 이는 없었으니까. 겪어보지 못한 일을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 - P222

사람들은 내가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철저히 계산적이며,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이상 낯선 사람을 결코 돕지 않는다고, 설사 도와준다 해도 그런 선의의 이면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다는 오만한 기쁨이 어려 있다고. 그 말은 아마많은 경우 사실일 것이다. 어쩌면 그도 나를 돕는 행동으로 자기만족을 얻었는지 모른다. - P246

난 항상 열심히 살았어.
하민은 종종 그 말을 했다. 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hard‘는 보통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말 아닌가. ‘hardworking‘ 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는 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하민이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기를 몰아붙이듯이 살았다는 것인지, 별다른 재미 없이 살았다는 것인지, 열심히 산다는 게 그녀에겐 올바르다는 가치의문제라는 것인지, 삶의 조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지 말이다. 그녀가 그 말을 할 때, 그래서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 P265

작가는 미주를 포함해 우리가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기만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 하는 방식을 들춰낸다. - P308

자신이 느끼는 안도와 행복의 풍경이 언제나 상대의 외로움과 아픔을 철저히 밀봉했을 때에야 가능한 것임을 선연하게 의식하는예민한 윤리, 이 서늘한 거리 감각이란 최은영 소설의 요체이자 매력이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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