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남성 독자를 울리는 일은 쉽지 않다. 쉽게 울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애써 거부하지 않으면 그냥 조용히 눈가가 촉촉해지는 일이 그래도 가끔 드물게 일어난다.
소설을 읽으면서 사람의 인생이란 어느 것 하나 무탈하고 소소한 것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화자가 만나는 소설 속 인물들의 사정과 내면은 하나같이 복잡하고 기구하다. 그래도 그들 모두, 우리 모두 소설의 제목처럼 ‘단순한 진심’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주에게 연희의 모습은 절대 닮고 싶지 않은 노년의 모습이었지만 복희와 노파를 통해 다시 실감하게 된 연희의 인생은 끔찍하게 외롭고 절망적이진 않다. 연희는 복희가 누구보다 애타게 그리워하는 한 여인이자 노파에게는 질투심 날 정도로 가지고 싶은 이 생의 연(連)이 남겨져 있는 유의미한 삶 자체이다. 소설의 절정에 다다를수록 문주의 이야기보다는 연희의 이야기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시대의 비극을 관통해버린 여성들의 삶과 비극의 잔재를 물려 받아 살아온 다음 세대들이 조우하여 상처를 굳게 다져가는 치유의 드라마다.
흉터는 맨살보다 굳기 마련이다.
누군가 짊어지고 있는 당신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으며, 그 인생의 무게 앞에 누구도 가치 없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며, 살아가면서 잃어버리기 쉬운 인간애를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노년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관성이 되어 버린 외로움과 세상을향한 차가운 분노, 그런 것을 꾸부정하게 굽은 몸과 탁한 빛의얼굴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모습.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타인을 보며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나의 미래를 연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 P43

그러나 죄를 모른다는 건, 그 순진함 때문에 언제라도 더큰 악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P49

일단 자고 싶었다. 깊은 잠을 자고 나면나쁜 기억은 모조리 투명한 체에 걸러져 무의식의 영역으로흘러갈 것만 같았다. 이상했다. - P77

무력한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 신 앞에서는 공허한 협박이 되고 마는 고통의 몸짓들…… - P87

그녀의 말은 내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환기시켜 주긴 했다. 바로복희가 내 삶에 개입한 배우라면 내게도 복희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보호, 그건 앙리와 리사, 그리고 정우식 기관사가 내게 취한 태도이자 행동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하나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삶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 P130

그때 나는 추연희라는 한 인간이 이 세계에서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소멸되길 모두가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떨칠 수 없었다. 피를 식게 하는 생각이었다. - P200

자신의 엄마가 어떻게 불렸는지, 어떤 대우를 받았고 어떤식으로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을 때 백복희의 아픔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부류의 아픔이……. - P217

성대가 아니라 마음에서 형성되었을 그 목소리는, 그러나아주 조금은 떨렸다. - P218

중국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난 뒤, 나는 백복희를 시청역 근처에 있는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시청역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백복희를 유심히 쳐다보는 몇몇 사람들의 시선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백복희가 동의하거나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그 태생의 기원에 배타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는 무심한폭력의 시선이었다. 백복희는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는 듯자주 피로한 얼굴로 벽 쪽에 붙어 서곤 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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