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쓰는 법 - 독서의 완성 땅콩문고
이원석 지음 / 유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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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은 책을 평하는 글인데, 독후감이 주관적이라면 서평은 객관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자신의 입장을 객관화하는 것이 독후감과 주된 차이이다.

‘독후감은 독자에게 치유의 경험을, 서평은 통찰의 경험을 선사한다.’(26p.)

이 책은 서평뿐만 아니라 초보(?) 독서가들이 모호하게 개념 짓던 독서와 관련된 다양한 행위를 정의해준다.

‘책에 다가가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책에 대한 나름의 해석입니다. 해석을 통해 책은 계속 만들어져 갑니다. 저자의 (읽고)쓰는 행위와 독자의 읽(고 쓰)는 행위로 끝없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저자와 독자가 섞이고, 읽는 것과 쓰는 것이 합류합니다. 책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성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30p.)

“책은 항상 새롭게 읽혀야 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서평을 통해 구현된다.”(30p.)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진 나와 같은 대부분의 한국 독자들에게 독서란 (아무리 애써봐도 짐작하기 어려운) 작가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여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 해석은 독자에게 다양하게 열려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기도 해봤지만, 다수가 공감하는 해석에 도달하지 못하면 자신의 이해력이 부족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을 것이다. 작품의 의미는 책의 정답처럼, 작품해석은 정답에 대한 해설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저는 고전 텍스트를 ’텍스트-무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작품에 대한 해석이 고갈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물론 <햄릿>도 출간될 때부터 무한한 텍스트는 아니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새로운 해석이 가해지는 가운데 그것을 버텨 내는 텍스트, 그러니까 읽고 나도 계속 뭔가 읽을거리가 남는 텍스트가 바로 무한한 텍스트이고 텍스트-무한입니다. <햄릿>도 처음에는 만만한 텍스트였지만 점점 숭고한 텍스트로 격상되고, 이제는 작품의 결함조차도 의미를 갖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34p.)

확실한 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숨겨놓았다고 하든, 독자는 그 의미를 때려 맞추는 무당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 때로는 책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그 생명을 연장시킨다.

‘좋은 책을 잘 읽으면, 삶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서평은 이러한 독서의 연속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서평 쓰기의 귀결은 독서를 통해 획득한 자아와 타자에 대한 깨달음을 더 넓은 지평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앎과 삶의 일치, 즉 인격의 통합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서평을 쓸 때마다 이런 마음을 되새기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서평 쓰기의 목표 자체에 대해서는 한 번쯤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49p.)

그동안 책을 열심히 읽기만 했지 쓰는 일에는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일 년에 백 권 가까이 읽고 간단한 소감 정도 남기는 것이 전부였으니, 뒤돌아서면 아무리 인상깊었던 책이라 할지라도 당시 독서의 느낌만 가슴에 남을 뿐 책의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좋은 요약은 공정한 평가의 전제가 됩니다. 요약이 서평의 본질은 아니지만, 요약 없이 서평을 작성할 수는 없습니다. 평가가 열차라면, 요약은 레일입니다. 따라서 평가 없는 서평은 공허하나, 요약 없는 서평은 맹목적입니다. 성실한 독서와 이를 통한 적절한 요약 다음에 나름의 평가가 따라야 합니다.’(80p.)

‘독서의 첫 결실 또한 평가가 아니라 요약입니다. 충실한 독자라면 모름지기 자기가 읽은 것을 간명하게 요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의 핵심을 명확하게 도출하고, 이를 바로 자기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86p.)

사실 나는 이 책을 서평을 쓰기 위해 읽은 책은 아니다. 어렸을 때는 무엇인가 쓰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나이 들면서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과 업무처리 과정에서 일상화된 ‘복붙 습관’의 결과 보고서에 한 문장을 새롭게 추가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빈 문서’ 앞에서는 시간이 정지된 듯한 막연함을 느끼게 되었다. 일기를 쓰자니 너무 낯뜨거웠고,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 독서 어플이었는데, 한 번씩 내가 남긴 독서평을 훑어볼 때면 너무나 저급한 나의 작문 실력에 환멸을 느낄 정도였다.
물론 글을 잘 쓰고 말겠다는 욕심은 없다. 일개 독자가 독서의 즐거움을 글을 쓰는 고통으로 이어나가야 할 당위는 없으니까. 그래도 무엇인가를 쓴다는 행위는 독서 이후의 행위가 대부분이기에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은 얇은 이 책을 선택했던 건데, 의외의 수확이 많았다.

‘문체의 난해함을 인격의 얄팍함으로 해석합니다. ...... 그에 따르면 모호한 문체는 부실한 인격을 반영합니다. 그런 작가는 논의에 어려움이 발생하면 정직한 태도로 돌파하기보다는 난해한 문체로 회피한다는 겁니다.’(130p.)

‘독서는 저자와 독자의 대등한 대화입니다.’(131p.)

‘특히 문학서평은 어느 정도 문학 치유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기본 매커니즘은 동일시입니다. 자신의 실존 차원에서 소설을 겹쳐 읽고, 이렇게 자신의 삶에 비추어 서평을 쓰면 잠재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서평을 쓰는 과정은 쓰는 사람 자신을 먼저 회복시킵니다. 서평을 쓰는 삶은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자신의 자아를 직면하고, 동시에 일부 잠재 독자에게도 강력한 설득력을 행사하게 되지요.’

결국 내가 얻은 것은 독서라는 취미를 지속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다. 나의 독서는 과거처럼 습득해야만 했던 작품의 정답이 아니라 내가 삶을 좀 더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나의 해석과 그로 인해 귀결될 수 있는 내면의 치유이다. 이러한 가치는 망각이라는 인간 뇌의 피할 수 없는 숙명 때문에 기록이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특별히 내가 보는 책을 남에게 일독을 권하거나 판매해야 할 의무는 없기에 서평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는 감상문을 쓸 수 있다면 조금 다행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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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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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기억상실을 겪은 주인공 기 롤랑은 위트가 운영하는 흥신소가 폐업하여 일을 그만두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자신의 기억을 찾으려는 여정을 떠난다.
처음 만난 폴 소나쉬체와 장 외르퇴르에게서 자신에 대해 기억나는 것들을 얘기해줄 것을 요청하여 자신의 친구라는 스티오파 드 자고리에프를 알게되었고, 스티오파를 찾아간 기는 러시아 망명 귀족들 사진을 받아오면서 사진 속 젊었을 때 자신이라고 확신이 드는 인물을 발견한다. 하지만 추적 끝에 사진 속 인물은 프레디 하워드 드뤼즈라는 자신의 친구이며, 하워드의 고향인 발 브뢰즈를 찾아가 하워드가문의 정원사인 로베르를 만나 자신이 남미 출신의 페드로 맥케부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전쟁상황 중 자신의 연인이었던 드니즈 이베트 쿠드뢰즈라는 여인과 친구 페드로, 페드로의 연인 게이, 경마 기수인 앙드레 빌드메르와 함께 반 알렌의 산장으로 피난을 갔던 것을 알게 된다. 산장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중 같이 파티를 즐기던 보브 베송과 올레그 드 브레데가 므제브로 도피할 수 있는 길을 주선해준다고 하여 드니즈와 함께 따라 나섰다 그들에게 배신을 당해 길을 잃게 되었고, 그 이후로 자신이 기억상실에 걸린 것을 알게 된다. 기 롤랑, 페드로는 충격과 상실감에 빠지면서 자신의 친구 프레디가 살고있는 지역을 알아내 자신의 남은 기억을 찾아 떠난다.

자신의 근원을 찾으려는 귀소본능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치부하기엔 그것이 인간의 감정에 패인 깊이는 너무 심오하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자신의 현재이지만, 현재의 자신을 입증해주는 기반은 과거의 시간과 경험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잃어버린 페드로(기 롤랑)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이다. 무너져있는 나 자신이라는 퍼즐을 완성해야만 나라는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궤도에 진입할 수 있기에 상실된 기억을 찾는 절박한 심정이 절제된 문장 속에서도 처절하게 느껴졌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기 주변과의 관계를 잃는 것과 같다. 추억이 변질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아예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도 모르는 상실은 다른 종류의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나의 추억과 기억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기억을 상실한다는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영진닷컴에 제출했던 과제입니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의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그 예로 들어 보이곤했다. 그 남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 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위트에게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해변의 사나이‘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그 말을 위트에게 했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우리들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 - P74

나는 프레디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우리들의 사진들을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 사진들 속에는 어린 시절의 게이 오를로프의 사진도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 여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동안 나의 생각은 함수호로부터 멀리, 세계의 다른 끝, 오랜옛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양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소녀가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 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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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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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지켜내야만 했으므로 나는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내가 아는 것과 일치한다는 확신이 생길 때에만 비로소 그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들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오랫동안 읽지 않았던 책들을 꺼내쌓아놓고 그 속의 단어들을 국어사전에서 찾아 단어장을 만들기도 했다. 가끔은 단어를 정의하는 데에 사용된 단어들의 뜻조차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나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사전을 몇번이나 다시 찾아야 했다. 그 작업은 길고 더뎠다. 며칠씩 밤을 새우기도 했다. 때로는 대본 속의 대사들을 일상 속에 부려놓기도 했다.
허구의 인물처럼 나는 주어진 문장들 속에 내 진심을 숨겼다. 그렇게말들을 고르고 고르면서 나는 타인의 말을 빌릴 때에만 내가 안전할수 있음을 깨달았다. - P21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잃어버렸다고 쓰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가, 나는 자문한다. 설혹 정확한 표현이어도 내가 생각하는 ‘잃어버렸다‘와 글을 읽은 사람의 ‘잃어버렸다‘는 같은 뜻일 수 있을까, 무서워진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한 글자도 쓸 수 없겠다는 공포가 밀려온다. - P29

"나는 결코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한국말을 배우려고 결심한 것도 아버지와 communicate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었어요. 내가 벗어던지려 해도 절대, 절대 벗을 수 없는 내 피부색의 역사를 말이에요." - P80

폴, 왜 나한테 이 이야기를 해준 거야? 술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내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폴의 답이 그 순간 떠올랐다. 왠지 선생님만은내 내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줄 것 같았어요. 도대체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수많은 취객들 사이에 마주앉아, 폴이 들려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금, 삶이란 신파와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의해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내게 실연을 안겨준 그가 더이상 원망스럽지만은 않았다. 실연당한 여자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가 해준 이야기가내 초라한 사랑에 대한 그만의 응답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 P85

바그너의 반유태주의가 세상에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가 『음악신보」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 때문이었다. 그 글에서 그는 유태인들에게는 진정한 예술을 창조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바그너가 주로 공격하는 유태인은 마이어베어와 멘델스존이었는데 그 점이 그녀에게는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바그너보다 먼저 성공한 유태인 음악가들이었고, 바그너는 그들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열등감에 시달렸다. 게다가 바그너는 젊은 시절 여러 실패를 겪으며 편집증을 앓기도 했다. 만약 정말 바그너가 파쇼의 아버지고 그의 반유태주의가 나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면, 수많은 죽음이,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 한인간의 병든 마음을 토양 삼아 자라났다는 말인가. 그것은 너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도대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가슴이먹먹했다. 그는 학원에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학생들에게 말하고는했다. 양비론은 절대 안 돼. 한쪽의 입장을 택하면 다른 한쪽은 잘못됐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줘야 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하는 건 논술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야. 알았지? 그는 때때로 그가 믿는 정의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눈 속에서 빛나던 차가운불꽃. 그렇지만 옳고 그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 P107

있잖아, 당신도 들었지? 물고기들은 기억력이 삼 초밖에 안 된다잖아. 아닌가? 금붕어만 그런 거던가? 갑자기 헷갈리네. 어쨌든 기억력이 단 삼 초뿐인 생명체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불현듯 궁금해져. 삼초 후면 소멸될 것이 자명한 불안과 두려움이라면 삶은 훨씬 수월해질까. 아니, 어쩌면 지금의 행복과 짜릿함이 삼 초 후면 또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불안에 삶은 고통의 연속이 되어버릴지도. 분명한 것은 기억이 오직 삼 초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 생명에게 역사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거야. 그렇지? 결국에는 사랑도, 슬픔도, 아니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확신마저도. 그것들은 모두 기억에 의해 지속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 P121

나는 그날 밤, 아버지 옷 어딘가에, 혹은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온 이국의 모래알로 만들어진 아이였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은 분명 내 존재를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핑계였다. 엄마는 이 세계가 그럴듯한 거짓말들에 의해서 견고히 다져질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거짓말이야말로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주려 했던 가장 건전한 소통방식이었는지도. - P196

첫사랑이니 어쩌니 운운하며 선배 때문에 마신 소주가 한강을 이룰 지경이었지만 나는 정작선배에게 사랑을 고백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어느 날, 소주를 먹다가 나는 깨달았다. 그 무렵의 나는 선배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쩌면 나는 전 세대가 갖고 있는 어떤 이미지를 막연히 동경했던 것에 불과했는지도. 그러나 그 무렵의 나는 선배를 향한 사랑의 고통에 도취되어 있었다. 시대의 고통에 둔감했던 우리 세대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의 최대치라 착각하면서.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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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감당하기 어렵고 내일은 다가올까 두렵고
전강산 지음 / 강한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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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해봐야 후회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엔 안해봐서 안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고 보니 후회건 안도건 큰 차이는 없다.

누군가의 경험과 생각을 읽음으로써 비슷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지금 우리 시대 모습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위안, 공감, 그로 인한 연대.
다르지 않은 것이나 다른 것이나 똑같이 위안이 되고 공감도 된다는 것을.

남의 고통과 불행으로 위안 받는 건, 결코 무례함이나 비겁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또 다른 동료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내 이야기가 쓰인 이 책이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의 동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 P6

그즈음 나는 중간 정도의 재능을 가진 나를 매일같이 저주했다. 남들보다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많았으나 그냥 그 정도였다. 특출 나지도 않고 직업으로 삼기에는 더더욱 보잘것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따금씩 누군가의 칭찬을 받을 뿐, 그마저도 입에 발린 말이란 것쯤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많았고 내가 가진 능력은 나조차도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지만, 그러기엔 현실이 너무 무거웠다. - P17

전처럼 인정받으려고 가면을 쓴다거나, 경험담을 전시하지않았다. 이런 내 모습에 나도 놀랐다. 그러자 그는, 그러시냐고 자기는 지금까지 이런 일을 했고 앞으로 또 이런 일을 하고싶다고 말했다. 구구절절 자기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남의 꿈을 함부로 호출하는 무례함에 짜증도 났다. 자기 자랑만 할 거면 내 꿈은 왜 묻는 거야, 도대체, 그러다가 과거에는 나도 그랬겠구나 싶었다. 저 사람과 다를 바 없었겠구나.
가면을 쓴다고 해서 인정받는 건 아니었겠구나. - P37

그냥 이런 것들을 위안 삼기로 했다. 작은 것들에 위로받는삶을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건 큰 기회나 행운이 아니라, 일상 속의 작은 것들에서 느끼는 안정감일 수도 있으니까. - P119

결국 난 무작정 퇴사를 했다. 날 못마땅해하던 상사와 불화를 겪은 후에 경영진과 상담을 통해 퇴사를 한 거다. 하지만그 소식을 알리기 무서웠다. 친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난퇴사 소식을 유일하게 당시의 연인에게 알렸지만, 그 사람은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도 그 사람 몫의 슬픔이 있었다. 그는 나의 감정을 안아 줄 수 있는 상태가아니었다. 자신의 슬픔에 취해 날 돌볼 여유 따윈 없었던 것이다. 나는 연인에게 나의 슬픔을 같이 안아 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 사람의 슬픔을 더 안아주려고 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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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윤고은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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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에 이 작가의 상상력이 독보적이고 윤리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있을 법한 세상이 소설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 현시대의 비극이 슬플 따름이다.

우리 가족이 찢어진 일차적인 이유는 빚이었다. 그러나 언니의오피스텔과 내 원룸, 아빠의 트럭과 엄마의 생활비를 나눌 정도였다면 네 식구가 함께 사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평생을 싸우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가족도 있다는데, 우리 가족은 적당히 가난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차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분리되었다. 아빠와 엄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에게 냉담했고, 이혼을 미루고만 있었다. 두사람은 이십팔년간 한집을 공유했다. 집에는 수많은 잠재적 무기들이 있었다. 과용하면 독이 되는 상비약을 꾸준히 건네는 것만으로도 범죄는 가능했다. 한때는 철제 의자가 찌그러진 적도 있었다. 밤마다문짝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질풍노도의 시기마저 지나고 고요해진 지 오래였다. 평화가 아니라 침묵이었다. 내공이 쌓인 두사람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공유하면서도 대화하지 않는, 농담하면서도 웃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사에 조금 앞서서두사람은 공식적인 부부관계를 청산했다. 나는 그저 덤덤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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