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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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지켜내야만 했으므로 나는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내가 아는 것과 일치한다는 확신이 생길 때에만 비로소 그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들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오랫동안 읽지 않았던 책들을 꺼내쌓아놓고 그 속의 단어들을 국어사전에서 찾아 단어장을 만들기도 했다. 가끔은 단어를 정의하는 데에 사용된 단어들의 뜻조차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나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사전을 몇번이나 다시 찾아야 했다. 그 작업은 길고 더뎠다. 며칠씩 밤을 새우기도 했다. 때로는 대본 속의 대사들을 일상 속에 부려놓기도 했다.
허구의 인물처럼 나는 주어진 문장들 속에 내 진심을 숨겼다. 그렇게말들을 고르고 고르면서 나는 타인의 말을 빌릴 때에만 내가 안전할수 있음을 깨달았다. - P21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잃어버렸다고 쓰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가, 나는 자문한다. 설혹 정확한 표현이어도 내가 생각하는 ‘잃어버렸다‘와 글을 읽은 사람의 ‘잃어버렸다‘는 같은 뜻일 수 있을까, 무서워진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한 글자도 쓸 수 없겠다는 공포가 밀려온다. - P29

"나는 결코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한국말을 배우려고 결심한 것도 아버지와 communicate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었어요. 내가 벗어던지려 해도 절대, 절대 벗을 수 없는 내 피부색의 역사를 말이에요." - P80

폴, 왜 나한테 이 이야기를 해준 거야? 술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내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폴의 답이 그 순간 떠올랐다. 왠지 선생님만은내 내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줄 것 같았어요. 도대체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수많은 취객들 사이에 마주앉아, 폴이 들려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금, 삶이란 신파와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의해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내게 실연을 안겨준 그가 더이상 원망스럽지만은 않았다. 실연당한 여자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가 해준 이야기가내 초라한 사랑에 대한 그만의 응답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 P85

바그너의 반유태주의가 세상에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가 『음악신보」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 때문이었다. 그 글에서 그는 유태인들에게는 진정한 예술을 창조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바그너가 주로 공격하는 유태인은 마이어베어와 멘델스존이었는데 그 점이 그녀에게는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바그너보다 먼저 성공한 유태인 음악가들이었고, 바그너는 그들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열등감에 시달렸다. 게다가 바그너는 젊은 시절 여러 실패를 겪으며 편집증을 앓기도 했다. 만약 정말 바그너가 파쇼의 아버지고 그의 반유태주의가 나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면, 수많은 죽음이,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 한인간의 병든 마음을 토양 삼아 자라났다는 말인가. 그것은 너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도대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가슴이먹먹했다. 그는 학원에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학생들에게 말하고는했다. 양비론은 절대 안 돼. 한쪽의 입장을 택하면 다른 한쪽은 잘못됐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줘야 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하는 건 논술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야. 알았지? 그는 때때로 그가 믿는 정의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눈 속에서 빛나던 차가운불꽃. 그렇지만 옳고 그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 P107

있잖아, 당신도 들었지? 물고기들은 기억력이 삼 초밖에 안 된다잖아. 아닌가? 금붕어만 그런 거던가? 갑자기 헷갈리네. 어쨌든 기억력이 단 삼 초뿐인 생명체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불현듯 궁금해져. 삼초 후면 소멸될 것이 자명한 불안과 두려움이라면 삶은 훨씬 수월해질까. 아니, 어쩌면 지금의 행복과 짜릿함이 삼 초 후면 또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불안에 삶은 고통의 연속이 되어버릴지도. 분명한 것은 기억이 오직 삼 초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 생명에게 역사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거야. 그렇지? 결국에는 사랑도, 슬픔도, 아니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확신마저도. 그것들은 모두 기억에 의해 지속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 P121

나는 그날 밤, 아버지 옷 어딘가에, 혹은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온 이국의 모래알로 만들어진 아이였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은 분명 내 존재를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핑계였다. 엄마는 이 세계가 그럴듯한 거짓말들에 의해서 견고히 다져질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거짓말이야말로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주려 했던 가장 건전한 소통방식이었는지도. - P196

첫사랑이니 어쩌니 운운하며 선배 때문에 마신 소주가 한강을 이룰 지경이었지만 나는 정작선배에게 사랑을 고백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어느 날, 소주를 먹다가 나는 깨달았다. 그 무렵의 나는 선배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쩌면 나는 전 세대가 갖고 있는 어떤 이미지를 막연히 동경했던 것에 불과했는지도. 그러나 그 무렵의 나는 선배를 향한 사랑의 고통에 도취되어 있었다. 시대의 고통에 둔감했던 우리 세대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의 최대치라 착각하면서.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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