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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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작가의 소설이다. 주로 믿는 점은 감정의 복선을 밑바닥에서 절대 위로 띄우지 않고 항상 먹먹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게 동시대의 삶을 관철하게 해주는 작가라는 것. 그래도 김애란의 소설은 나를 울리지는 않았는데 몇 번 울어버린 것 같다.
김애란은 인생을 통찰하게 해주는 (가령 좀 한심스러울 정도로 직업정신이 투철한 방송작가와 아름이의 대화장면 같이) 인간 본성의 신랄한 공격을 담담하게 풀어내는게 주특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먹먹함이라니.
나이 듦에 대해서, 늙음에 대해서 아름이와 장씨아저씨 같이 대조적인 시선을 통해, 또 너무나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늘 곁에 있지만 찰나의 지나버린 순간에서야 문득 깨닫게 되는 늙는다는 것에 대해, 죽는다는 것에 대해.

어머니는 이상한 듯 갸웃거렸지만, 그러고는 그걸 또 금방 잊어버렸지만, 나는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생각에 그녀들은, 아마 미안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활달함 혹은 친절함이란 누군가와 무의식적으로 이별을 준비할 때 나오는 태도 중의 하나니까. - P41

올해 나는 열일곱이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지금까지 산 것이 기적이라 말한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 중열일곱을 넘긴 이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나는 더 큰 기적은 항상보통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런 것이 기적이라 믿어왔다. 내가 보기에 기적은 내 눈앞의 두 분,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외삼촌과 외숙모였다. 이웃 아주머니와 아저씨였다. 한여름과 한겨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 P47

더욱이 세상물정 모르는 얼굴은 딱 열일곱살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눈빛, 두 눈 속에 담긴 기운이 어딘가 달랐다. 그 속에는 이제 막 한 존재를 책임져야 하는 이들의 피로와 슬픔, 그리고 자부가 묘하게 엉겨 있었다.
‘그런 걸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고민하다 그런 걸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그냥 부모의 얼굴이라 부른다‘ 라는 문장을 이어붙였다. 부모는 부모라서 어른이지, 어른이라 부모가 되는 건 아닌 모양이라고. - P78

"이 물만 해도 그래. 우리집은 대수가 보리차 좋아해서 물 끓여먹거든? 근데 봐봐, 밥상에 물 한잔 올려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절차가 필요한지. 물 끓여야지, 식혀야지, 주전자 씻어놔야지, 물병소독해야지, 병에다 다시 물 담아야지, 냉장고에 넣어야지…… 근데 그렇게 끓인 물이 또 이틀을 못 가. 예전에 물 마실 땐 아무 생각없었는데. 참,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어 진짜, 나도 물 마실 때 그런 생각 안하는데." - P83

‘고요‘라는 단어를 읊어보았다. 그것은 곧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기척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는 동그라미를 만들어냈다. 신기한 일이었다. 0계급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줄 알았는데, 0계급이무언가 하고 있었다. - P199

그러자 문득 무언가를 가지려고 하는 만큼, 가지지 않으려고 하는것 또한 욕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했으면서 아무것도 안 가진 척하는 것도 기만일 수 있다고……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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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인간의 피안
하오징팡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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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중 가장 미래 인공지능과 함께할 사회에 대한 충격적이면서 고무적인 에피소드는 ‘사랑의 문제’였다. 인공지능과 연관된 살인사건에서 인간의 소송의 상대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개발한 기업이 된다는 점, 그러한 대립 구도는 결국엔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계란으로 바위치는 겪이 돌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감정적이지 않고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는 전제로 인공지능이 배심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설정도 인상적이다.
인공지능이 우리 삶에 침투해왔을 때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견, 흔히들 강한 인공지능이 인간을 공격해오는 전투적이고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지만, 일각에서는 약한 인공지능에 의해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보다 인공지능과의 유대를 선호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미래에 대해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하오징팡의 책에서는 이보다 한발 더 앞서나가 약한 인공지능에 의해서도 불완전성이라는 이유로 인간이 주체성과 주도권을 상실하게되어 권력구조가 전복되어 버리는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소송, 다수의 인공지능 배심원들에 의해 인간에게 불리하게 된 판결, 그 뒤에 숨은 기업과 자본의 힘에서 인간 개인이 잃지 말아야 할 정치적인 자세와 안목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출현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인공지능이 우리를 파멸시키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상황이다. - P7

"회장님은 정말로 저희의 ‘분신‘ 상품을 한번 써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회의 여덟 개도 거뜬히 참여할 수 있다니까요."
"하하."
장진타오는 살짝 웃었다. 런이의 너스레를 받아주는 건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글쎄요. 이야기대로라면, 우리가 한 세트를 사면 다음번에 만날 때 당신을 대하는 건 당신의 상품이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 P10

쑤쑤가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건단순히 돈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이 의지할 만한 버팀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 P12

하지만 면접은 순탄치 않았다. 쑤쑤는 이제 막 졸업한 대학생이 아니다. 그들처럼 취업의 관문을훌쩍 통과하는 우월한 신분도 아닐뿐더러 그들처럼 기회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 만큼 열정적이지도 못하다. 면접관의 비위를 맞추려 마음에도없는 말을 할 리가 없고, 일해본 경험도 있고 창업을 지켜본 바도 있어 소위 말하는 자기 성격이라는 게 있다. 면접관이라면 하나같이 "전 정말이지이 일을 좋아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만,
쑤쑤는 사실 그대로 "이런저런 쪽으로 이력서를냈어요"라고 말해 있는 대로 눈총을 받곤 했다. - P12

"난 단지 그게 정말로 두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들어. 유전자와 기억은 똑같고 단순히 신체만 바뀌었을 뿐이야. 그러면 같은 사람으로 봐야 하지않을까?" - P28

"그것 역시 그렇지 않아. 대뇌 역시 날마다 변하고 있지. 비록 기억은 연속적이지만, 인간의 생각은 전부 변한 것이지. 대뇌 역시 변한다고 할 수있어." - P29

"그렇다면 사람한테서는 대체 뭐가 안 변할까요?"
가짜 어머니가 말했다.
"만약 구체적인 원소나 사상이......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하지만 이런 문제에 너무 천착할필요는 없어. 천착해봤자 답이 없을 테니까. 변하는 건 부분이고 변하지 않는 건 총체야. 넌 언제나여전히 너야." - P29

첸루이는 죽음을 앞둔 날들 속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자신의 생명이 다 되어간다는 사실을 알고스스로 가족 안에 차지했던 자신의 자리를 신인에게 내주길 원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출렁이는 연연함일 것이다. 자신과 아버지를 향한 버리지 못한 애착이자 자신과 아버지에 대한 위로 일것이다. - P33

"맞습니다. 나는 인간을 통제합니다."
"당신이 인간을 통제하는 목적이 뭡니까? 당신을 섬기라고? 왜 인류를 죽이지 않죠? 당신이라면 식은 죽 먹기일 텐데."
"내가 왜 인류를 죽여야 합니까? 인류는 내 데이터의 출처인데, 데이터는 나의 토양입니다. 누가자신이 사는 집을 허니까? 그리고 모든 인간을죽이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들겠습니까? 인간은 대자연이 수억 년 동안 진화해온 결과물입니다. 많은 부분에서 완벽에 가까운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이미지 식별, 신체의 움직임과 유연성에 대한 통제, 상황에 대한 판단과 반응 등 여러부분에서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신체기능을 갖춘 로봇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아십니까? 인간은 그저 음식만 조금 먹으면 되는데 말이죠. - P86

나는 나의 냉담을 인정하지만 당신은 인정하지않을 뿐입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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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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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이건 어느 상태이건 의도치 않게,
예상하지 못하게 밀려드는 감정들이 있다. 패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이라니, 골키퍼가그런 상황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상태는 아니었나 보다. 무엇인가 만들어 낼 의지는 없는 상황에서 무엇인가 다가올 것 같은 불안. 그런 감정의 서사를 따라가며 약간 (현재 내 상황에서는) 사치스러운 ‘불안함‘을 한껏 느껴볼 수 있었던 독서였다.
서평에서는 서술 중심에서 내용 중심으로 변모한 한트케의 첫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내용에 감동할 수 있는 작품이라기 보다는 서술에 감탄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에 가깝다. 카뮈,
카프카, 베케트부터 남미 문학인 마르케스, 보르헤스 등 다양성, 새로움의 상징이 되는 작가들의 작품(국내라면 한강, 김봉곤 정도랄까?)을 접하면서 독자들에게는 ‘이해‘ 보다는 ‘읽기‘에 집중하게 되는 독서의 분야가 있는 것 아닌가.

페널티킥이 선언되었다. 관중들은 골문 뒤로 달려갔다.
"골키퍼는 저쪽 선수가 어느 쪽으로 찰 것인지 숙고하지요."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그가 키커를 잘 안다면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나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골키퍼는,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공이 오리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을 해서 원래 방향대로 차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겠죠? 이어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블로흐는 모든 선수들이 차차 페널티에어리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페널티킥을 찰 선수는 슛 지점에 공을 갖다놓았다. 그런 다음 그도 뒷걸음질로 페널티에어리어 밖으로 나갔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차게 됩니다."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골키퍼에게는 한 줄기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
키커가 맹렬히 달려왔다. 환한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골키퍼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페널티 키커는 그의 두 손을 향해공을 찼다. - P120

흔히 우리는 문학작품이란 숙련된 작가가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문체로 서술해야하고, 독자는 그것을 읽고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알았다기보다는 그렇게 교육된 것이다. 그런데 한트케의 실험작은 형식과 내용 가운데 의도적으로 내용을 무시하고 있다. 내용보다는 서술이 우선인 문학 작품이라니, 18~19세기의 문학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진한 감동과는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20세기의 이름 있는 작품들, 즉 카프카의 『변신』이나 까뮈의 『이방인』,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등이 진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슨 내용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인내심 깊은 원시시대의 독자나 인문주의 시대의 독자라 하더라도 마침내 자제심을 잃고 격노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문학은 감동과 아름다움이 충만한 것인데, 도대체 이게 뭐냐는 심정에서 소위 비난의 봇물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한트케도 이러한 실험 작품을 시작으로 다수로부터는 혹독할 정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소수에게는 새로운 문학 세계를 열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다 1970년대에 들어와 그의 서술 기법이 실험적인 것에서 전통적인 것으로 돌아선다. 무시했던 내용을 다시 복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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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너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부족한 인간성이 문제다. 기후변화와 인류세는 아무 생각 없이 발을 질질 끌며 멸종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 없는 생명체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진짜 모습 중 한 가지 극단적인 부분만을 모방한 설명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정치적 우울감에 주목해야 한다. 좀비는 슬픔을 느끼지도, 분명 무력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정치적 우울감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생명체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할 때 경험하는 감정을 뜻한다. 절망감과 무력감마저 사실은 항의의 절규인 셈이다. 그렇다.
정치적 우울감은 자신이 어떻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도록 만든다. 그런 절망과 회의 속에는 중요한 깨달음이하나 묻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내에서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인간성‘ 이라면 우리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관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뒤집힐 것이다. 즉 우리는 ‘영속성의 심오함에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영속성을 비웃을 만큼 연쇄적이고 혼란스러운 ‘변화의 심오함에 압도당할 것이다.

‘체호프의 총(작품에 등장한 장치는 반드시 사용돼야 한다는 안톤체호프의 극 이론-옮긴이)

사실 현생 인류는 20만 년 전부터 존재했지만 농업(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는 삶을 끝냈으며 도시와 정치 체계는 물론 오늘날 우리가 ‘문명‘ 이라고 여기는 대상을 불러일으킨 혁신)은 불과 1만 2,000년 전에 시작됐다. 심지어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y에서 서구 산업사회가 부상하는 과정을 지리생태학적으로 설명하고 문명의 붕괴 Collapse)에서 다시 생각하자는 흐름의 전신을 마련한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조차 신석기 혁명을 가리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 라고 부른다.

그에 비하면 유발 하라리의 접근법은더욱 특이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환경 위기가 닥치고 있는 와중에 인류 진보에 대한 집단적인 신념을 뿌리부터 다시 생각하도록 권하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자신이 동성애자로서 커밍아웃한 일이 어떻게 이성애나 진보 개념 등 널리 퍼진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론으로 이어졌는지 감동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또한 자신이 군사역사학을 공부했음에도 어떻게 신화를 까발리는 해설자로서 빌 게이츠, 버락 오바마, 마크 주커버그를비롯한 대중의 찬사를 받게 됐는지 설명한다. 하라리의 핵심적인 통찰은, 집단이 공유하는 허구적인 이야기가 사회를줄곧 하나로 묶어 왔으며 지금이라고 해서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단지 종교나 미신이 차지하던 자리를 진보나 이성 같은 가치가 대체했을 뿐이다.

과실을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 협력적인 지원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구권의 부유한 국가가 지구온난화의 고통을 가장 심하게 겪을 가난한 국가에게 기후 부채를 지고 있다고 시인한 적은 아직 거의없다.

문제의 규모가 거대하다는 사실, 문제가 모든 면을 아우른다는 사실, 달리 준비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문제를 외면할 때 얻는 이득이 탐스럽다는 사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서구권 선진국의 전문직 중산층이 점차 쌓여 가는 불만에도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합리화하게 만드는 기초적인 근거가 됐다.

추측건대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꿀벌에 관한 허위 정보를 즐기기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위기를 우화로 다루는 것이 어떤 식으로인가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의미를 통제할 수 있는 이야기 속에 문제를 가둬 두려는 것과 같다.

사실 온난화는 이미 인간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기후변화의 늘어나는 공세를 확인하기 위해 굳이 멸종위기에 놓인 동물이나 위험에 빠진 생태계 등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얼음 조각 위에고립된 북극곰 이야기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산호초 이야기를 보며 슬퍼하는 등 애써 주의를 돌린다. 우리는 기후변화를 우화로 다룰 때면 우리의 목소리를 투영하지 않는 이상 입을 다물고 있는, 그리고 우리 손에 죽어 가고 있는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좋아하는 것 같다(에드워드 윌슨은 2100년까지 그중 절반이 멸종되리라고 추정한다). 19 오늘날 우리는 기후변화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을 직접 경험하고 있음에도 동물에게 주의를 돌린다. 존 러스킨JohnRuskin이 남긴 ‘감상적 오류pathetic fallacy‘라는 표현으로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는대신 짧게나마 동물의 고통에 공감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동물에게 감정이입하는 편이 이상할 만큼 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직접 폭풍을 일으켰고 지금도 매일 그러고 있지만 오히려 무기력한 태도를 학습함으로써안도감을 얻으려 한다.

실제로 기후 종말을 묘사하는 영화를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 영화가 기업의 탐욕을 겨냥하고있었다. 하지만 전 세계 탄소배출량에서 운송업과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40퍼센트 미만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 이상 기업에 모든 책임을 부과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기후변화에 관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거나기후변화를 대대적으로 부인하는 기업이라면 충분히 악당이라고 부를 만하다.

미국 이외의 국가 역시 탄소 배출 문제에 늦장 대응을하고 있고 실질적인 정책 변화를 강하게 거부하는 상황 속에서 부인주의적인 태도는 문제 축에도 못 낀다. 물론 화석연료 사용에 기업이 미치는 영향은 실재한다. 하지만 타성에 젖어 단기적인 이익을 좇고 기호를 포기하지 않으려는전 세계 노동자 및 소비자의 태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들 가운데는 다 알면서도 이기심을 부리는 사람부터 시작해아예 무지한 사람은 물론 나태해 보일지언정 현실에 안주하는 본능에 충실할 뿐인 사람까지 책임 수준이 다양한 온갖사람이 포함된다. 이를 이야기에 담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기후변화가 전쟁의 원인이 아니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기후변화가 허리케인의 원인이 아니라는 말과 맥락을같이한다. 다시 말해 기후변화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사실이며 따라서 원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언어상의 구분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기후변화가 특정한 나라에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불과 3퍼센트 올린다 하더라도 간과할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에는 거의 200개의 나라가 존재하므로 실질적으로는 기후변화에 따라 전쟁이서너 번 내지는 대여섯 번 더 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일부 전문가들은 기온과 폭력성 사이의 모호한 상관관계를 수치화하기도 했다. 예컨대 기온이 0.5도 상승할 때마다 무력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10~20퍼센트증가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얼음은 냉동된 역사이기도 하며 그중 일부는 얼음이 녹아내리면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현재 북극의 빙하에는 지난 수백만 년 동안 공기 중에 퍼진 적이 없는 질병이 갇혀 있다. 인류가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질병도 있다. 그런 인류 역사 이전의 질병이 얼음 밖으로 나오면 오늘날 우리의 면역 체계는 대응하는 방법조차 모를 것이다.

기온이 4도 증가한 세계에서는 지구환경 곳곳에서 수많은 자연재해가 들끓다 보니 사람들이 자연재해를 그냥 ‘날씨‘ 라고 부를 것이다.

해수면 문제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고열, 이상기후, 전염병 등 다음 세대를 공포에 질리게 할 다른 온갖 기후 재앙을 독자의 눈앞에서 치워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해수면 상승 문제가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다 해도 기후변화가 초래할 재난의 중심에 두기에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미래에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리라는 전망에 이미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익숙해졌다는 사실은 광범위한 핵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체념만큼이나 침울하고 당황스러운 일이다. 차오르는 바닷물이 불러일으킬 참상의 규모 역시 핵전쟁만큼이나 심각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인류가 얻은 교훈은 암울하다. 지구온난화가 문제로 인식된 지 70~8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문제에 대처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는커녕 에너지 생산 및 소비 방식에 이렇다 할 조정을 가하지 않았다. 너무나 오랫동안 일반인 관찰자들은 과학자들이 기후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상이 그에 맞춰 변화하리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 방안들이 저절로 실현되기라도 할 것처럼 사실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시장 논리에 따라 더 싸고 범용성 있는 녹색에너지가 출현했지만 바로 그 동일한 시장 논리에 따라 에너지 혁신은 이윤 목적으로 이용당했을 뿐 탄소배출량은 계속 늘어만 갔다. 정치권에서는 세계적으로 방대한 결속과 협력을 이룰 듯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을 저버렸다. 기후변화 운동가 사이에서는 오늘날우리에게 기후재난을 피하는 데 필요한 도구는 모두 주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주 흔한 일이 됐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치적 의지는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하찮은 요소가 아니다. 주어진 도구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빈곤, 전염병, 여성 학대 같은 문제를 해결할 도구도 가지고 있다.

2019년에 한 싱크탱크에서는 인터넷 포르노 사업이 초래하는 탄소량이 벨기에가 초래하는 탄소량에 맞먹는다고 계산하기도했다.

우리가 충분히 ‘탈공업화 사회‘로 넘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직도 온갖 일상용품이 화석연료를 태워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지도모른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면 세상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제로섬 경쟁을 벌이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이므로 자신이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운 좋게 출생복권에도 당첨된 이상 앞으로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결국 상대적으로는 늘 그랬듯이 승자가 되리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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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등을 외치고, 갑질과 차별에 분개한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이 무시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지내가 다른 이를 무시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 P229

어느 방송에서 흙수저, 금수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워낙 이슈였던 터라 어딜 가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다.
그중 한 패널이 우리가 식당에 들어갈 때숟가락을 보고 식당을 고르는 게 아니듯숟가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떠먹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숟가락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걸 떠먹으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멋진 비유이자 위로였고, 선한 마음으로 이야기한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흙수저, 금수저에 대한 이야기는진짜 숟가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본질은 세습 자본주의에 있다. - P197

우정의 기초와 세상에 대한 신뢰를 다져야 했던 그 시절,
우리는 더 좋은 대학, 더 높은 성적을 위해경쟁적 대인관계를 독려 받았다.
그건 타인을 신뢰하는 대상이 아닌 경쟁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했고,
우리의 공동체 의식을 말살시키며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훼손시켰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초집단주의 사회임에도
OECD의 ‘공동체 지수’도 ‘사회적 관계‘도 모두 꼴찌를 차지했다. - P168

사회가 개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개인주의 사회가 주로 개인의 죄책감‘을 사용한다면,
집단주의 사회는 주로 ‘수치심‘을 사용한다.
죄책감이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라면,
수치심은 타인을 통해 바라본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통제하며, 끊임없이 타인을 의식하도록 요구받는다.
역지사지라는 가르침 속에,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고,
그 결과 "보란 듯이 잘 살겠다"
"남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같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다. - P164

당시에는 개인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억압하고도리라는 이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미덕이었고,
이것은 아무리 울화가 치밀어도 화합을 위해희생을 강요하는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미덕이 있었는데 바로 근면 성실이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몸이 아프거나 다쳐도빠짐없이 학교에 가면 개근상장을 줬고,
칠판 위에는 ‘근면 성실‘이라는 급훈이 쓰인 액자가 걸려있었다.
왜 그랬을까?
근면 성실을 최고의 미덕으로 배운 건우리 사회가 제조업 기반의 사회였던 것에 있다.
제조업에서는 창의력이나 개성보다근면함과 성실함이 가장 필요한 자질이었으니 말이다. - P85

내 동생은 늦둥이다.
막냇동생은 부모님의 남은 숙제랄까.
엄마는 동생이 자리 잡고잘 사는 걸 봐야 자신도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 마음이 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엄마가 행복하면 좋겠는데,
엄마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동생이 행복해야 한다.
그 말은 엄마의 행복이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뜻이다.
그건 자기 행복의 결정권을 문밖에 두고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주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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