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너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부족한 인간성이 문제다. 기후변화와 인류세는 아무 생각 없이 발을 질질 끌며 멸종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 없는 생명체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진짜 모습 중 한 가지 극단적인 부분만을 모방한 설명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정치적 우울감에 주목해야 한다. 좀비는 슬픔을 느끼지도, 분명 무력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정치적 우울감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생명체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할 때 경험하는 감정을 뜻한다. 절망감과 무력감마저 사실은 항의의 절규인 셈이다. 그렇다.
정치적 우울감은 자신이 어떻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도록 만든다. 그런 절망과 회의 속에는 중요한 깨달음이하나 묻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내에서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인간성‘ 이라면 우리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관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뒤집힐 것이다. 즉 우리는 ‘영속성의 심오함에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영속성을 비웃을 만큼 연쇄적이고 혼란스러운 ‘변화의 심오함에 압도당할 것이다.

‘체호프의 총(작품에 등장한 장치는 반드시 사용돼야 한다는 안톤체호프의 극 이론-옮긴이)

사실 현생 인류는 20만 년 전부터 존재했지만 농업(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는 삶을 끝냈으며 도시와 정치 체계는 물론 오늘날 우리가 ‘문명‘ 이라고 여기는 대상을 불러일으킨 혁신)은 불과 1만 2,000년 전에 시작됐다. 심지어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y에서 서구 산업사회가 부상하는 과정을 지리생태학적으로 설명하고 문명의 붕괴 Collapse)에서 다시 생각하자는 흐름의 전신을 마련한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조차 신석기 혁명을 가리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 라고 부른다.

그에 비하면 유발 하라리의 접근법은더욱 특이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환경 위기가 닥치고 있는 와중에 인류 진보에 대한 집단적인 신념을 뿌리부터 다시 생각하도록 권하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자신이 동성애자로서 커밍아웃한 일이 어떻게 이성애나 진보 개념 등 널리 퍼진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론으로 이어졌는지 감동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또한 자신이 군사역사학을 공부했음에도 어떻게 신화를 까발리는 해설자로서 빌 게이츠, 버락 오바마, 마크 주커버그를비롯한 대중의 찬사를 받게 됐는지 설명한다. 하라리의 핵심적인 통찰은, 집단이 공유하는 허구적인 이야기가 사회를줄곧 하나로 묶어 왔으며 지금이라고 해서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단지 종교나 미신이 차지하던 자리를 진보나 이성 같은 가치가 대체했을 뿐이다.

과실을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 협력적인 지원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구권의 부유한 국가가 지구온난화의 고통을 가장 심하게 겪을 가난한 국가에게 기후 부채를 지고 있다고 시인한 적은 아직 거의없다.

문제의 규모가 거대하다는 사실, 문제가 모든 면을 아우른다는 사실, 달리 준비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문제를 외면할 때 얻는 이득이 탐스럽다는 사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서구권 선진국의 전문직 중산층이 점차 쌓여 가는 불만에도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합리화하게 만드는 기초적인 근거가 됐다.

추측건대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꿀벌에 관한 허위 정보를 즐기기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위기를 우화로 다루는 것이 어떤 식으로인가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의미를 통제할 수 있는 이야기 속에 문제를 가둬 두려는 것과 같다.

사실 온난화는 이미 인간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기후변화의 늘어나는 공세를 확인하기 위해 굳이 멸종위기에 놓인 동물이나 위험에 빠진 생태계 등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얼음 조각 위에고립된 북극곰 이야기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산호초 이야기를 보며 슬퍼하는 등 애써 주의를 돌린다. 우리는 기후변화를 우화로 다룰 때면 우리의 목소리를 투영하지 않는 이상 입을 다물고 있는, 그리고 우리 손에 죽어 가고 있는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좋아하는 것 같다(에드워드 윌슨은 2100년까지 그중 절반이 멸종되리라고 추정한다). 19 오늘날 우리는 기후변화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을 직접 경험하고 있음에도 동물에게 주의를 돌린다. 존 러스킨JohnRuskin이 남긴 ‘감상적 오류pathetic fallacy‘라는 표현으로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는대신 짧게나마 동물의 고통에 공감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동물에게 감정이입하는 편이 이상할 만큼 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직접 폭풍을 일으켰고 지금도 매일 그러고 있지만 오히려 무기력한 태도를 학습함으로써안도감을 얻으려 한다.

실제로 기후 종말을 묘사하는 영화를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 영화가 기업의 탐욕을 겨냥하고있었다. 하지만 전 세계 탄소배출량에서 운송업과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40퍼센트 미만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 이상 기업에 모든 책임을 부과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기후변화에 관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거나기후변화를 대대적으로 부인하는 기업이라면 충분히 악당이라고 부를 만하다.

미국 이외의 국가 역시 탄소 배출 문제에 늦장 대응을하고 있고 실질적인 정책 변화를 강하게 거부하는 상황 속에서 부인주의적인 태도는 문제 축에도 못 낀다. 물론 화석연료 사용에 기업이 미치는 영향은 실재한다. 하지만 타성에 젖어 단기적인 이익을 좇고 기호를 포기하지 않으려는전 세계 노동자 및 소비자의 태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들 가운데는 다 알면서도 이기심을 부리는 사람부터 시작해아예 무지한 사람은 물론 나태해 보일지언정 현실에 안주하는 본능에 충실할 뿐인 사람까지 책임 수준이 다양한 온갖사람이 포함된다. 이를 이야기에 담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기후변화가 전쟁의 원인이 아니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기후변화가 허리케인의 원인이 아니라는 말과 맥락을같이한다. 다시 말해 기후변화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사실이며 따라서 원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언어상의 구분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기후변화가 특정한 나라에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불과 3퍼센트 올린다 하더라도 간과할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에는 거의 200개의 나라가 존재하므로 실질적으로는 기후변화에 따라 전쟁이서너 번 내지는 대여섯 번 더 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일부 전문가들은 기온과 폭력성 사이의 모호한 상관관계를 수치화하기도 했다. 예컨대 기온이 0.5도 상승할 때마다 무력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10~20퍼센트증가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얼음은 냉동된 역사이기도 하며 그중 일부는 얼음이 녹아내리면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현재 북극의 빙하에는 지난 수백만 년 동안 공기 중에 퍼진 적이 없는 질병이 갇혀 있다. 인류가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질병도 있다. 그런 인류 역사 이전의 질병이 얼음 밖으로 나오면 오늘날 우리의 면역 체계는 대응하는 방법조차 모를 것이다.

기온이 4도 증가한 세계에서는 지구환경 곳곳에서 수많은 자연재해가 들끓다 보니 사람들이 자연재해를 그냥 ‘날씨‘ 라고 부를 것이다.

해수면 문제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고열, 이상기후, 전염병 등 다음 세대를 공포에 질리게 할 다른 온갖 기후 재앙을 독자의 눈앞에서 치워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해수면 상승 문제가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다 해도 기후변화가 초래할 재난의 중심에 두기에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미래에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리라는 전망에 이미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익숙해졌다는 사실은 광범위한 핵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체념만큼이나 침울하고 당황스러운 일이다. 차오르는 바닷물이 불러일으킬 참상의 규모 역시 핵전쟁만큼이나 심각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인류가 얻은 교훈은 암울하다. 지구온난화가 문제로 인식된 지 70~8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문제에 대처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는커녕 에너지 생산 및 소비 방식에 이렇다 할 조정을 가하지 않았다. 너무나 오랫동안 일반인 관찰자들은 과학자들이 기후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상이 그에 맞춰 변화하리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 방안들이 저절로 실현되기라도 할 것처럼 사실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시장 논리에 따라 더 싸고 범용성 있는 녹색에너지가 출현했지만 바로 그 동일한 시장 논리에 따라 에너지 혁신은 이윤 목적으로 이용당했을 뿐 탄소배출량은 계속 늘어만 갔다. 정치권에서는 세계적으로 방대한 결속과 협력을 이룰 듯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을 저버렸다. 기후변화 운동가 사이에서는 오늘날우리에게 기후재난을 피하는 데 필요한 도구는 모두 주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주 흔한 일이 됐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치적 의지는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하찮은 요소가 아니다. 주어진 도구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빈곤, 전염병, 여성 학대 같은 문제를 해결할 도구도 가지고 있다.

2019년에 한 싱크탱크에서는 인터넷 포르노 사업이 초래하는 탄소량이 벨기에가 초래하는 탄소량에 맞먹는다고 계산하기도했다.

우리가 충분히 ‘탈공업화 사회‘로 넘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직도 온갖 일상용품이 화석연료를 태워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지도모른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면 세상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제로섬 경쟁을 벌이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이므로 자신이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운 좋게 출생복권에도 당첨된 이상 앞으로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결국 상대적으로는 늘 그랬듯이 승자가 되리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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