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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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보다는 연대가 더 어렵다. 연대를 우선하다가는 호오에 갈려 진위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항상 비슷한 자들끼리는 경쟁이 붙고 우열을 가려내는 과정에서 상처를 주고 받는다. 결국 적은 내부에 있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우리는 대의 안의 목표의식과 정체성을 상실하고 분열하고만다.
페미니즘 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가짜 기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향수를 느끼는 것˝이라는데, 모든 상징하는 것들,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서 그냥 대충 때려 맞추고 넘어가는 모호한 것들이 우리를 괴리속에 빠져들게 만드는 게 아닌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상처 받을 준비‘를 하고 이어나가야 하는 게 삶인가 보다.

우정이라는 적금을 필요할 때 찾아 쓰려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적립을 해뒀어야 했다. 은정은 그런 적립을 해둬야 한다는 생각도,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예측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식의 적립과 인출이 너무도 부자연스럽다고, 노골적인 이해관계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친분을 쌓는 사람들을 남몰래 폄하했다. - P23

- 손님을 평가하지 마, 절대로, 머릿결이 많이상하셨네요, 피곤해 보이시네요, 여기 목뒤에 뭐가 나셨어요. 피부가 안 좋으시네요. 이런 말 절대하지 마. 손님들이 자기 상태를 모를 것 같니? 다아는데 좀 나아지게 하려고, 기분이 조금이라도좋아지려고 미용실에 오는 거잖아. 그런데 머리하러 와서까지 그런 말을 들어야겠니? 그렇게 무신경할 거면 이 일 하지 마, 아예. - P30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삶이 반드시 제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
세연은 상상 속에서 친구를 속물로 만들고 있는 자기 자신이 지극히 속물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불편함은 실재하는 것인데. - P79

- 우리가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어. 억지로그러려고 했다간 계속 싸우게 될 거야.
같아지겠다는 게 아니고 상처받을 준비가 됐다는 거야, 진경이 중얼거렸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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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 황금부엉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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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두꺼워 보이지 않았는데 읽다 보니 종이 재질이 얇다는 걸 알게됐고, 책의 분량은 450페이지에 달했으나 다행히 지루하진 않았다.
지능이 높아지는 과정 중에 사물의 이면에 숨은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한마디로 의심), 타인의 과오와, 단점을 들춰내는 능력(한마디로 기만)을 습득하면서 감정적으로 피폐해지고 냉소적으로 변한다면 지능이 높다는 것은 저주를 받았다는 말로 갈음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순수하게 산다는 것이 아둔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라며 조롱을 했고, 자기 이익이 되는 실속을 챙기고 남들보다 손해를 조금 덜 보고 사는 것이 현명하다. 생각했다. 앞으로 그렇게 살지 않을거란 허망한 다짐도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삶에 답답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것 같다.

나는 니머 교수님과 버트와 함께 심리학 사무실로 다시 들어갔고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들이 날 놀리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내가 너무 무지해서 알 수 없을 때에는 나를 속인다고 확신하고있었다. 분노는 내게 자극적이고, 짜릿한 느낌을 주어서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다.
나는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니머 교수님이 테이프를 가져오기 위해 보관 케이스로 갔을 때, 버트가 설명했다. "지난번에도 오늘과 거의 똑같은 단어들을 사용했어요. 이런 테스트들을 매번 시행할 때마다 똑같은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하니까요."
"그 말은 직접 들어보고 믿을게요."
니머 교수님과 버트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는 피가 얼굴로 몰려서 확 달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나를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내가 방금 전에 했던 말을 깨달았고, 내 목소리를들으면서 두 사람이 눈짓을 주고받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들은 웃고있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분노와 의심이 내 주위의 세상을향한 첫 번째 반응이었던 것이다. - P95

"찰리는 사물의 겉모습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기 시작하는 중이에요. 부분들이 하나에 속해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꽤 좋은 통찰력이에요." - P123

대학교의 카페에 앉아서 대학생들이 역사와 정치와 종교에 관해 토론을 벌이는 것을 듣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그것들이 모두 어린애들이노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기초 수준에서 사상들에 관해 토론을 나누는 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다. 문제가 가진 복잡성에 접근하지 않는 점을, 그러니까 표면의 물결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른다는 점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화를 낸다. 지능이 높아져도 여전히 좋지 않은 점이 있고, 나는이런 것들에 관해서 비크맨 대학교의 교수들과 토론하려는 시도도 포기했다. - P151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늘 빠져나갈 변명을 찾으려 했고, 자신들의 지식이 좁은 영역에 국한되어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두려워했다. 지금 와서 보면 교수들이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교수들을 지식에있어서 거인이라고 늘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교수들도사람이며, 세상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들추어낼까 봐 두려워한다. - P153

언어가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도 있다는점을 내게 다시 알려준다. 지능의 차이가 만드는 장벽의 반대편에 내가 놓이다니 무척 아이러니하다. - P175

"선생님이 뭘 알아요? 잘 들어요. 그중에서 가장 나은 사람들도 잘난체하면서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생색을 냈죠. 자신들이 우월해 보이면서 부족한 점은 감출 수 있도록 저를 써먹으면서 말이죠. 누구든지 바보 옆에 있으면 자신이 똑똑한 것처럼 느껴지죠." - P188

"냉소적으로 변했군." 니머 교수가 말했다. "이 모든 기회를 통해 자네가 얻어낸 결과가 고작 그런 것인가? 천재가 되더니 세상과 동료에대한 믿음을 죄다 잃었군 그래."
"그 말씀이 완전히 옳다고는 할 수 없죠." 나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지능 하나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여기 당신들의 대학에서는 지능과 교육과 지식을 모두 숭배하죠. 하지만 당신들이 모두 놓친 한 가지 사실을 이제 저는 알게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능과 교육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조화를이루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근처에 달린 찬장에서 마티니를 꺼내 마시며 설교를 이어갔다.
"오해는 마세요." 나는 말했다. "지능은 인간에게 주어진 뛰어난 능력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식을 추구하다가 사랑을 몰아내는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최근에 발견한 다른 사실이 있는데요. 가설로 제시하죠. 애정을 주고받을 줄 모른다면, 지능은 정신적이거나 도덕적인 붕괴로 이어지고, 신경증이나 정신병까지 낳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기적인 목표에 온 정신이 팔려 타인과의 관계를 배척하면 분명 폭력과 고통만 남게 되겠죠." - P366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자신이나 가족들보다 겉으로 비친 모습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매트는 몇 번이고,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라고 말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없었다. 노마는 옷을 잘 입어야 했고, 집에는 좋은 가구를 두어야 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점을 알지 못하도록 찰리는 집 안에 있어야 했다. - P382

나는 두렵다. 삶 혹은 죽음 혹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사실이 두려운 게 아니라,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낭비되는것이 두렵다. 그런데 입구를 지나가려 하자 내 주위에 압력이 느껴지면서, 동굴의 입구 쪽으로 거친 파도와 같은 움직임이 나를 밀어낸다. - P415

이 점에서 과학소설은 미래를 예측해서 적은글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묘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어슐러 K. 르 귄의 주장과 맞닿는다. - 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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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오늘의 젊은 작가 24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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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짜여진 스토리의 상업영화를 본 기분이다. 작가가 문화, 예술, 취미의 세계를 성실히 조사했는지, 원래 조예가 깊은지는 모르겠지만(동생이 사려던 써벨로의 S5를 실물로 보자마자 모델명까지 알아보는 여자는 비현실적이다... 차라리 몇 년 식까지 언급을 해보지 그랬다... 이건작가들이 얘기하는 핍진성도 아니고 전문성도 아니고 그냥 남들이 잘 모르는 무엇인가가 쓰이면 글의 가치가 높아 보인다는 믿음에 근거한 수작이다) 집중력을 오히려 떨어트리는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캐릭터들의 입체성이 부족한 진부한 클리셰들이 큰 문제였는데 참고 완독할 만 했다.(그래서 영화 같은 것이고, 어쨌든 결말은 궁금하니까....)
‘자신이 배운 지식의 양과 정의의 크기가 비례한다‘는 착각을 하는 정우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섬세하고 엄격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며 치료까지 필요해 보이는 섬머는 끝내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정체도 모르고,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도 모른다. 마지막에 최후를 맞이하는 훙의아버지 말처럼 ‘누군가 넘어져서 땅이 파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또 넘어지듯이 진실의 행방을 알 수 없는 묘연한 사건들은 폭력의 크기만 다를 뿐 일상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핑계라고 할 수 있고, 자연스러운 인생이랄 수도 있는 것인가. 활력만 남아 있다면 이 인생을 소중한 ‘추억으로 둔갑시킬 힘’을 남겨두기 위해....

자신만의 규칙이 있어 철저히 따르고 있는 듯했다. 홍은정인의 그런 면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만의 규칙이 있는 사람은 지나친 선행을 베풀지 않았고, 쓸데없는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무의미한 웃음을 흘리지 않았다. - P16

팟퐁을 찾은 사람들은 낮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시는 낮이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밤을 소비했다. 서로를 유혹하고 희롱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터져 나오는 분수처럼 웃고 울었다. 서로에게 아무렇지 않게 피해를 주고 아무렇지 않게 사과했다. 죄책감이 낮의 일이라면 밤의 일은 질문을 지워 버리는 것이었다. 적어도 팟퐁의 밤은 그랬다. - P23

섬머는 인간도 동물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인간은 동물보다 나은 존재여야 했다. 윤리가 기준이었다. 섬머의 말에 따르면 윤리적이지 않은 인간은 모든 생명체에게 고통만을 안겨 주는, 신의 가장 큰 실수일 뿐이었다. 언젠가 벤은 섬머의 주장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엄마가 윤리적이지 못해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건아냐.
그건 다른 문제예요.
윤리적인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언제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겨. 의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할 뿐이지. 나는 뭐가 다른 문제인지 모르겠군.
아빠는 좀 더 섬세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아니, 우리모두가 그래야 해요. - P30

나쁘기만 한 사람도 아냐. 많은 사람이 그래. 인간이 할 수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일이라고 생각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사람이 더 많아. 그래서 끝없이 고통이 반복되는 거야.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눈을 감지 않는 게 중요해.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어. - P50

갖은 고생 다 하고 살아온 애들은 안 돼. 엄마 봐. 자기 손해 보는 일 절대 안 해, 희생은 여유에서 나와, 여유 있는 외국남자 만나. 설마, 회사에 마음에 드는 놈이 있는 건 아니지? - P60

그러냐? 사실, 나도 그 창녀를 나쁜 년이라 생각하지 않아,
그 여자가 엄마를 죽인 거예요.
누군가 넘어져서 땅이 파인 자리에는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또 넘어지게 되는 법이야. 그 창녀도 누군가한테 옮았겠지. 네가 내 아들로 태어난 것처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그렇지만 너하고 트린한텐 정말 미안해, 트린을 잘보살펴야 해. 알겠지? - P92

술집 앞에 놓인 플라스틱 테이블에 모여 앉아 술잔을 부딪치는 사람들은 활력이 넘쳐 났다. 그들에게는 찰나의 하룻밤을 오랫동안 기억에남을 찬란한 추억으로 둔갑시킬 힘이 아직 있어 보였다. - P139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나 싶어. 어쩔 수 없이 상처 주고 상처받고, 다들 그렇게 사니까. 삶의 어느 순간에 제일 중요하다 싶은 것이 머리에 차오르면 다른 건 눈에 안 들어와. - P158

섬머가 지금까지 데려온 놈들은 하나같이 예의 바르고 잘난 놈들이었지. 그런 놈들이 있어. 자신이 배운 지식의 양과자신이 가진 정의의 크기가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놈들 말이야. 내가 알기로는 그 반대거든. 예의 바르게 말하고 정의로운척하면서도 속에서는 잔머리를 굴리고, 실제로 용감해야 할때는 한없이 비겁하고 비굴해지지. - P191

정우는 한숨을 쉬었다. 정우는 타인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마다 않는 사람들을 보며 종종 생각했다. 위대한 사람들이긴하지만 동시에 치료도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그들의 행동은마음속 어딘가가 크게 구멍이 난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정우는 눈앞에 있는 섬머가 바로 그런 사람처럼 느껴졌다. - P234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립니다. 예의는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기사에서 봤는데 한국이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이 1위더군. 이런 생각이 들었지. 저놈의 나라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고등학교에 총질을 하거나, 마구잡이 연쇄 살인으로 푸는 대신에 예의 있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로 해결하는 거 같다고 말이야.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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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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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를 찾아 나서지만 세상엔 가짜만 가득했다. 미련, 위선, 가난과 고통, 부조리로 가득한 밑바닥 인생을 겪으면서 남은 희망이라면 ‘진짜 엄마’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따듯한 인정이었을 테지만 누군가에겐 ‘진짜 엄마’인 사람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인간성을 보이면서 희망을 져버리게 한다. 세상의 모든 자들이 쥐떼로 보이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역겨워 지는 순간.

어느 작가의 소설에 어른이라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것이라는 문장이 있었나. 이미 어른이 되어 역겨운 쥐가 되었고 쥐 떼의 군상을 이루는 한 사람으로서 위선을 장착하고 고통에 체념하고 사는 삶에는 희망을 버려야 하는 필요조건이 전제되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을 보면 지난 날의 순수함을 상기시키며 그 순수한 마음을 지키고 싶은 보호본능이 일게 되는 것인가.

시간은 멈출 수 없기에 사람은 결국 성장해버리고 만다. 쥐떼같은 우리를 복제한 어른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성장이라는 것을, 어른이 된다는 것을 너무 아름다운 미사어구로 포장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미련하고 위선적이고 부조리하고 희망 없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만행은 멈춰야 하지 않을까.

소설을 읽는 동안 소녀와 나를 동일시하고 너무 슬프기만 했지만 책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 나니 나와 다른 어른들을 비추어 부끄러움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찬수의 책장에 꽂혀 있던 동화책을 떠올렸다.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에 대한 동화인데, 동굴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던 곰은 결국 사람이 되었고 호랑이는 사람이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동화를 읽으며 나는 사람이 된 곰을 등신이라 생각했다. 이왕에 곰 아닌 무언가가 될 거라면 사람보다는 호랑이가 낫지 않나? 도대체 뭣하러 사람 같은 게 되겠다고 백일 동안 쑥과 마늘만 처먹은 거지? 곰이 쑥과 마늘만 먹다가 사람이 돼버린 건 멍청한 곰에게 내려진 최고의 벌이 분명하다. - P42

그것도 사랑의 힘인가? 사랑은 다친 데를 치료해주는 연고 같은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언니는 상처가 아닌 곳에 연고를 덕지덕지 바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멀쩡한 곳에자꾸 연고를 바르니까 진짜 상처는 점점 썩어 들어가고 멀쩡한 곳의 연고는 미끄덩미끄덩, 언니와 백곰의 관계를 자꾸 엇나가게 하는 것이다. - P48

백곰의 눈엔 내가 열 살도 안된 어린애로 보이겠지만, 나는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보고 듣고 짐작하는 천 년의 세월을 살았다. 태어나서는 그보다 훨씬 지독한 세월을 단숨에 견뎌냈다. 맞고 때리고 지르고 울고, 부수고 찌르고 할퀴고 물고, 박살내고 집어던지고 다치고 도망가고, 닦고 짓이기고 삼키고 내혀부터 씹어대는 그런 것들. - P52

나에게 좋은 일이 아들에게도 좋은 일이라면좋겠지만, 누군가가 웃으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울어야 한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 P99

내가 진짜엄마를 찾는 이유는 진짜엄마가 그리워서도, 진짜엄마가필요해서도 아니다. 가짜를 가짜라고 확신하기 위해서. 이유는 그 뿐이다. 진짜를 찾아내야 가짜를 가짜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세상이 온통 가짜뿐이라면, 가짜가 가짜임을 증명할 수가 없지 않나. - P111

나는 할머니에게 화만 내고 싶은데, 그것마저 못하게 하니까 할머니는 진짜 나쁘다. - P115

사람들이 목소리를 그렇게 칭찬할 때마다 (그게 칭찬인지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올바르게 웃는 법을 가르치는 책이 있다면, 그가 웃는 모양을 사진으로 찍어 실어도 될 만큼. 문제는, 그가 그 이상으로 착하려고 애쓰다보니 착하지 않은 자기는 지나치게 경멸하는 것이었고, 더 큰 문제는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그런 착함을 강요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 면에서 제일 나쁜 건 사람들이다. 자기들은 하기도 싫고 할 마음도 없는 착한 행동을 목소리에게만 강요하는 거니까.) 목소리가 나를 보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사람들은 그를 더 많이칭찬했다. 그래서 목소리는 나를 더 깨끗하게 입히고 얌전한 아이로 만들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좀 헷갈렸다. 목소리가 나를 보살피는 게 정말 나를 아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인지. - P133

그 순간 내가 왜 경적을 울렸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미남이 이모와 용이 삼촌이 그러고 있는 걸 대장이 보는 게 싫었다. 보면대장이 크게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이미 상처를 받은 사람은 제 상처가 깊어지는 것 따윈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 주기가 더 쉽다. 더 이상 보호해야 할 자기가 없으니까, 다칠 걱정따윈 하지 않고 맘껏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진짜엄마는 가짜엄마든 찾으면 당장 죽여버리겠다는 대장의 말을 다른 사람들은 격한농담 정도로 받아들이지만, 나는 안다. 그건 대장의 진심이다. 자신의상처를 재료로 허풍을 떠는 사람은 없으니까. - P188

다들 뭔가를 예감하고 있으면서 그 예감이 사실로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것 같아서.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불행에 대한 예감은 실현되고야 만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면서 불행을 자꾸 떠올리면 불행이 옳거니, 여기가 내 자리구나 하면서 냉큼 달려드니까. - P189

용이 삼촌과 미남이 이모는 돈뿐만 아니라대장 가슴 속의 빛나는 부분까지 같이 훔쳐간 것이다. - P201

구걸은, 나는 너무 불쌍해요, 나는 너무 배고파요, 나는 너무 불행해요, 라는 얼굴로 돈을 요구하는거다. 자신의 불행을 대가로 돈을 받는 것. 불행을 좋아하는 사람은아무도 없다. 불행에 인자한 사람 역시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상대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 불행으로 살 수 있는 건 동정뿐이다. 동정은 아무 힘이 없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 나는 동정받는다고 느낄때 가장 비참했다. 그건 내게서 즐거움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거니까. 나를 동정할 때, 나를 동정하는 사람의 마음이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차라리 불행할 것이다. 대장과 달수 삼촌은 내게 그이치를 가르쳐줬다. 불행을 주긴 쉽지만 웃음을 주긴 어렵다는 걸, 우리가 웃음을 주려고 하면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어디 한번 해보시지‘ 라는 눈빛을 마구 뿜어냈다. 사랑하던 사람이 도망가고, 돈을 다잃고, 마음속에 활활 불이 타올라도 우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웃어야 했다. 그럼 우리를 보는 사람도 웃었다. 웃다가도 어쩔 수 없이 울면, 우리를 보는 사람도 울었다. 그 눈물에, 표정에, 코를 훌쩍이는 소리에 위안을 받았다. 그건 동정이 아니다. 같은 마음이다. 그렇게울고 웃는 사이 불행은 평범해졌다. 평범해진 불행에 힘이 없다. 그냥 그까짓 것이 된다. - P230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웠다. 극한의 불행에 빠뜨리는 방법.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을 부숴버리면 된다. 하지만 나리의 새아빠는 그런 게 없다. 그래서 불행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아, 하나 있긴 하다. 돈, 그가 가진 돈과 땅과 건물을 모두 없애버리면 되는데. 그건 불가능하다. 모두 그의 돈을 지키려고 안간힘이니까. 세상 사람 전부. 왜냐. 세상은 가진 자를 숭배하고 보호하는 곳이니까. 그리고 못 가진자를 경멸하고 없애는 곳이니까. - P260

날마다 새로운 날이 아니라, 날마다 같은 날. 아주 사소한 것들만 변할 뿐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틀과 원리는 어디든 비슷해서, 맞는 사람은 늘 맞고 으스대는 사람은 늘 으스대며 때리는 자는 늘 때리는 자다. 그것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 알 순 없었지만, 짐작은할 수 있었다. 그것을, 그런 이치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그들의 뜻대로 굴러간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반쯤 헐린 나의 공간에서 지켜보았다. - P269

불길은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 삼켰다. 나는 내가 불태운 숱한 가짜들을 떠올렸다. 그땐 그것들이 모두 가짜인 줄 알았지만, 그것들이 가짜라면 세상에 가짜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온통 가짜투성이고 진짜는 하늘에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니, 진짜 따윈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이제 와 내가 무언가를 불태워야 한다면, 이세상을 통째로 태워서 까만 재로 만들 것이다. 진짜 따윈 없다. 진짜인 척하는 가짜로 세상은 이미 가득 찼다.
나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불타는 집을 보고 사람들은 미친 듯 울며 용역에게 매달렸다. 용역은 그들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용역에게 주먹질을 하는 사람도있었다. 그 옆엔 친절한 경찰이 있어서, 주먹이 용역에게 닿기도 전에그 사람을 잡아갔다. 돈 없고 빽 없고 힘없는 것이 죄라면 죄였다. 모든 것은 주님의 뜻대로 될 거라고, 목소리가 말했었지. 이런 것이 정말 주님의 뜻이라면 천국은 지옥보다 더 지독한 곳일 거다. - P271

아침이 되어 일을 마친 상호를 따라 그가 사는 방으로 갔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거리는 북새통이었다. 무가지를 집어 지하철역으로내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어떤 표정도 없었다. 쥐 떼…… 같았다. 쥐에겐 표정 같은 게 없으니까. 그저 맛있고 배부르고 위험한 것에만반응하니까. 지하철과 버스마다 가득찬 쥐 떼를 상상하니 구역질이났다. 거리 한가운데서 허리를 굽힌 채 구역질을 했다. - P286

나이 들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점점 멍청해진다. 알 수없는 세계에 대해 구체적 짐작을 시도할 때, 그리고 그것을 물질로 풀어낼 때면 당연하다 믿던 것들이 기이한 세상으로 이동한다. 소녀가진짜인 척하는 가짜를 수집하듯, 나는 당연한 척하는 부조리를 모으는 중이다. 이러다 더 멍청해질 수도 있다. 상관없다. 밑져야 본전이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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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그녀, 클로이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6월
평점 :
판매중지


흔하고 진부한 로맨스 소설에도 장애인, 인종차별에 관한 문제의식을 녹여내는 진보한 작가, 의식 있는 사회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 부부는 자기들이 할 일은 전혀 없다는 듯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다른 사람들을 부려먹어요.

"그러니까 얼마간이라도 엘리베이터운전을 하기에는 네가 너무 중요한 사람이다. 그 말이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아니, 너는 방금 그렇게 말했어."

사람들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그녀와 달리 온전한 신체를 가졌다는 불공평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클로이는 워싱턴스퀘어 파크에 들어가서 한 체스장 앞에 자리를 잡았다. 노련한 체스 선수들이 쉽게 돈벌이를하려고 무모한 아마추어들을 등쳐 먹고 있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그런 뜻이 함축되어 있었어요."

"참고로 말씀드리는데 나는 낮에도 일하잖아요."
"리베라도 낮에는 요양원에 있는 아내를 보살폈으니 당연히 휴식 없는 고단한 생활을 했어. 너보다 마흔살이나 많은 사람도 해냈는데 넌 잘해낼 수 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될 텐데."
"때로는 침묵이 쓸데없는 말 몇 마디보다 낫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그럼 내일 보자, 부탁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형사는그렇게 이해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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